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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3: 서울 - 더 나은 신앙생활 위해 서울로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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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7-17 ㅣ No.1563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 (3) 서울


더 나은 신앙생활 위해 서울로 이주

 

 

- (붉은 점선 안 부분) 제11조목대로 물은 즉 답왈 : 최 방지거는 죄인의 부친이라. 그 사정을 자세히 아옵니다. 태생은 홍주 다래골이요. 어느  때 문교한지 잊었으나 홍주 살 때부터 수계하고 이 마리아와 혼인한 지 수삼 년 후 서울 공덕리로 이사하기는 재물도 있고 외인 친척이 번다하여 수계함에 조당됨이 많아 사주구령하기를 위함이요. 그 후에 강원도 김성 땅에서도 살고 부평으로 이사하였다가 외인을 피하려고 과천 수리산으로 죄인 열두 살 되던 해에 들어갔는지라. 「기해ㆍ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 101회차 최 베드로 증언 중.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 성 최경환(프란치스코, 1805~1839)은 교리를 배우고 더 나은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고향을 버리고 25명이나 되는 가족 모두를 데리고 서울로 이사한다. 

 

그의 둘째 아들 최의정(야고보)은 182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로 이사한 지 3년이 지나 신자임이 탄로 나 산속으로 피신했다’는 최양업 신부의 서한(1851년 10월 15일자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과 「기해일기」 내용을 정리하면, 최 신부 일가가 청양 다락골 새터에서 서울로 이주한 때는 대략 1824년에서 1827년 사이였다. 최 신부가 1821년생이니 만 3~6세 때이다.

 

 

공덕리, 벙거지골, 난동 세 가지 다른 증언 

 

최 신부 일가가 서울에 터 한 곳은 어디일까. 크게 3가지 다른 증언이 나오고 있다. 먼저 「기해ㆍ병오 순교자 시복 재판록」(1883년 3월부터 1901년 5월까지 105회차에 걸쳐 열렸던 조선대목구 시복 재판 기록)에는 ‘공덕리’ ‘벙거지골’에 최 신부 일가가 살았다고 한다. 또 청주교구 배티성지 양업교회사연구소가 펴낸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에선 고향에서 ‘서울 낙동’으로 이주했다고 한다(2009년 초판 1쇄, 104쪽 주16). 

 

시복 재판에서 최경환의 아들이라고 밝힌 최 베드로(최 신부의 형제 중 베드로는 없다. 학자들은 이 증언자가 둘째 의정으로 그가 야고보와 베드로 2개의 세례명을 사용했을 것이라고 한다. 당시 병인박해 순교자 이성국은 베드로와 필립보로, 김성화는 요한 또는 야고보로 불렸다)는 “문밖에 위치한 공덕리(현 서울 공덕동)에 살았다”고 했다. 

 

또 1834년부터 조선 교회 밀사로 북경을 왕래하며 1836년 1월에 정하상(바오로), 조신철(가롤로), 이광렬(요한)과 함께 변문에서 모방 신부를 입국시켰던 김 프란치스코도 “최(경환) 프란치스코가 고향을 떠나 서울로 와서 문밖에 큰 집 하나를 사 살다가 위험이 있어 집을 버리고 시골로 여러 곳에 이사했다”고 시복 재판에서 밝혀 최 베드로의 증언을 뒷받침해 줬다. 

 

두 사람의 증언과 달리 현석문(가롤로)의 대자로 부평에서 최경환과 3년간 같이 산 이 베드로는 “최 프란치스코가 서울 벙거지골(현 서울 종로3가 일대) 살 때 앞집 포교가 잡으려 해 세간을 버리고 도주해 시골로 피하니 가산이 점점 없어졌다”고 했다.

 

- 오늘날 벙거짓골 일대로 창덕궁 돈화문을 중심으로 길 양편으로 귀금속, 음식, 국악기점 들이 상가를 이루고 있다. 리길재 기자.

 

 

배티성지 양업교회사연구소는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에서 “최경환과 형제들 가족은 1827년경 고향인 홍주 다래골을 떠나 서울 낙동(현 중구 회현동 인근에 있던 마을)으로 이주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 낙동은 기해ㆍ병오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에도 언급된 ‘난동’(蘭洞, 현 서울 회현동 2가)을 잘못 기록한 게 아닌가 여겨진다.

 

최 신부 일가가 서울로 이주할 당시 공덕리와 남문 밖 마포, 서강 일대, 경기 감영 앞 등 서울 서부 지역에 신자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기해일기」와 「기해ㆍ병오 순교자 시복 재판록」을 통해 서울 신자들의 거주 지역 분포를 연구한 방상근(한국교회사연구소 책임연구원) 박사는 “당시 신자들은 도성 밖에 더 많이 거주했으며, 서부 지역 거주 비율이 월등히 높았다”고 한다. 그는 “19세기 중반 서울 교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전체 신자의 3분의 2가 도성밖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이라며 “이는 박해를 겪는 과정에서 도성 안보다는 밖에서의 전교 활동이 좀더 자유로웠던 상황도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된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시복 재판록과 19세기 전반기 서울 지역 신자 거주 지역 기반 연구 자료를 토대로 종합해 볼 때 최 베드로(야고보)의 증언처럼 ‘도성 밖 공덕리’에 최양업 일가가 터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최경환 성인 주도해 가족 모두가 서울로 이주한 목적이 교리를 익히고 더 나은 신앙생활을 살기 위함이었음을 살피면 교회 지도자들을 찾아 공덕리와 벙거지골, 난동을 옮겨 다녔을 수도 있다.

 

- 최양업 신부 일가는 서울로 이주해와 당시 교우들이 많이 살던 도성 밖 공덕리에 터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은 1900년께 촬영한 서울 서소문 밖의 모습. 평화신문 자료 사진.

 

 

박해 후 조선 교회 ‘재건의 중심지’ 

 

최 신부 일가가 서울로 이주할 당시 조선 교회는 1801년 신유박해로 무너진 기초를 다시 세우던 시기였다. 박해를 피해 전국 각지로 흩어졌던 교우들은 연락망을 구축해 교회 조직을 추슬렀다. 주문모 신부와 평신도 지도자들의 순교 후 성사생활과 교리교육을 위해 무엇보다 사제가 절실하다고 판단한 정하상(바오로), 유진길(아우구스티노), 현석문(가롤로) 등 교회 지도자들은 성직자 영입 운동을 추진했다. 최양업 일가는 조선 교회 재건의 중심지였던 서울 남대문과 서소문을 잇는 서부 지역에 터하며 뜨겁게 신앙생활을 했다. 

 

“서울로 와서 최(경환)프란치스코는 열심함으로 인해 한동네 살던 교우 어린아이까지 데리고 10여 명이 같이 오며 강론하고 위로하니 포교들도 즐거워하여 우두커니 서서 강론 듣기를 간청했다”(「기해ㆍ병오 순교자 시복 재판록」 97회차 이 베드로 증언 중에서).

 

최양업 신부 일가는 서울에서 3년 또는 수년간 이토록 뜨겁게 신앙생활을 하며 살다 다시 박해를 피해 300여 명의 신자가 교우촌을 이루며 사는 강원도 김성(현 강원도 김화읍, 일명 금성)으로 이주했다. 이때가 1827년에서 1830년 사이이다. 

 

“서울을 떠난 최 신부 일가는 이 산골 저 산골로 이사 다니면서 손으로 가시덤불과 자갈밭을 개간해 연명했습니다. 그들은 과거에는 부자였으나 그리스도를 위해 자진해 이러한 궁핍과 재난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모범을 더욱 철저하게 따르는 것이라는 사실을 유일한 희망으로 삼고 만족해하며 살았습니다”(최양업 신부가 1851년 10월 15일자로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 중에서).

 

[평화신문, 2016년 7월 17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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