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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Hello 대한민국, Hello 교황청 지상 중계1: 박해시기 교황청과 한국 천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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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9-29 ㅣ No.1594

한국교회사연구소 ‘Hello 대한민국, Hello 교황청’ 지상 중계 (1) 박해시기 교황청과 한국 천주교회


이수광의 「지봉유설」에서 처음으로 교황 언급

 

 

본지는 한국-교황청 수교 60주년을 기념해 한국교회사연구소 ‘Hello 대한민국, Hello 교황청’ 공개대학 강좌를 7회에 걸쳐 지상 중계한다. 한국교회사연구소는 6일부터 매주 수요일 저녁 7시 30분 서울대교구 영성센터에서 공개대학을 열고 있다. 제1강 조한건(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신부의 ‘박해시기 교황청과 한국 천주교회’를 소개한다.

 

 

한국과 교황청의 상호 인식

 

교황의 존재가 한국에 처음 알려진 것은 조선 중기 실학자 이수광이 1610년대 지은 「지봉유설」을 통해서였다. 이수광은 유럽을 소개하며 “그 풍속에 임금(君)을 ‘교화황(敎化皇, 교화하는 황제)’이라 하는데, 결혼하지 않으니 자식이 세습하지 않고 현자를 가려 세운다”고 설명했다.

 

교황이 조선을 처음 언급한 때는 1660년이었다. 알렉산데르 7세 교황이 중국 남경대목구를 설정하며 조선도 포함한 것이다. 이후 북경 주교가 1702년 조선 재치권(교회를 다스릴 권한)을 교황청에 요청해 허락받았다.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조선인으로 처음 세례를 받았고, 이듬해 부임한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가 이 사실을 교황청에 보고했다. 조선인들이 스스로 복음을 받아들인 소식에 감동한 비오 6세 교황은 1792년 조선 포교지에 대한 권한을 구베아 주교에게 위임하고, 은화 500냥을 지원했다. 구베아 주교는 1795년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파견했다. 주 신부는 북경에서 회장 제도와 명도회를 도입하고, 「묵상지장」 등 교리 서적을 수입해 번역하며 선교에 힘쓰다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한다.

 

 

조선 신자들이 교황에게 보낸 편지

 

그 뒤로 성직자 없이 신앙생활을 이어간 조선 신자들은 1811년 교황과 북경 주교에게 각각 지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써 북경으로 보냈다. 교황에게 보낸 서한에서 조선인들은 ‘조선 교회가 자발적인 진리 탐구를 통해 시작됐다’고 소개하고, 사제를 보내달라고 절절히 호소한다. “교황님께서는 목자 잃은 이 나라의 양 떼를 굽어보시고 불쌍히 여기시어, 주님의 복음이 널리 전파될 수 있도록 하루빨리 사제를 보내 주시기를 바라옵나이다.”

 

조선 신자들은 또 “경계가 삼엄한 육로보다는 뱃길이 유리하다”고 알리고, 조선 국왕에게 줄 선물과 편지도 요청한다. 천주교가 외교를 통해 공적으로 인정받아 신앙의 자유를 얻기를 바란 것이다. 편지는 교황청에 전달됐지만, 선교사 파견은 불발로 끝났다. 교황청이 나폴레옹 전쟁으로 큰 타격을 입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조선 신자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정하상(바오로)과 유진길(아우구스티노)은 1824년(혹은 1825년) 교황에게 비슷한 내용의 서한을 또 보냈다. 마카오 포교성성 대표부 움피에레스 신부가 이를 라틴어로 번역해 전달하며 의견을 덧붙였다. 북경교구에서 조선을 분리하고, 수도회에 선교를 맡기자는 내용이었다. 이에 공감한 교황청 포교성성 장관 카펠라리 추기경은 1827년 예수회에 이어 파리외방전교회와 교섭했으나, 인력과 비용 부족·위험성 등을 이유로 진전이 없었다.

 

 

조선대목구 설정과 박해

 

이때 시암(태국)대목구 부주교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선교를 자원했다. 조선인들에게 애정을 느낀 브뤼기에르 주교는 1829년 선임 대목구장에게 편지를 보내 조선 선교에 대한 허락을 얻었다. 카펠라리 추기경은 1831년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으로 선출됐으며, 그해 9월 9일 조선대목구를 설정하고,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 대목구장에 임명했다. 조선이 선교지 교계제도 수립을 통해 비로소 사도적 교회에 결합, 보편교회에 참여하고 교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파견 소식에 감격한 조선 신자들은 교황에게 감사 서한을 보내고, 주교를 위시해 모든 선교사를 기꺼이 영접할 것을 서약했다. 안타깝게도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 입국을 시도하던 중 1835년 중국에서 병사한다. 곧 모방·샤스탕 신부가 1836년, 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가 1837년 조선 입국에 성공하나 1839년 기해박해로 순교한다.

 

이후로도 천주교에 대한 조선 왕조의 박해는 계속됐고, 1857년 9월 24일 조선 순교자 82명이 가경자로 선포됐다. 1866년 최대 규모인 병인박해가 벌어지자 비오 9세 교황은 조선 신자들을 위로하는 서한을 보낸다. 교황은 또 1874년 「한국천주교회사」를 지은 달레 신부에게 축사를 보내고, 그의 저서가 매우 귀중한 것이라고 치하했다. 1925년 비오 11세 교황에 의해 조선 순교자 79위가 시복됐고, 1962년 성 요한 23세 교황은 한국에 교계 제도를 설정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9월 17일, 이학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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