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 (목)
(백)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너희 기쁨이 충만하도록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레지오ㅣ성모신심

길 위의 사람들: 비밀 헌금 안에 깃든 성모님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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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9-05 ㅣ No.827

[길 위의 사람들] 비밀 헌금 안에 깃든 성모님의 지혜

 

 

- 아기 예수를 등에 업은 성모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 평범한 세상 사람들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을 성모님께서는 마음속에 간직하셨습니다. 이 간직함의 덕행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귀감이 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마음속에 묻고, 깊이 생각하고, 그것을 기도로 가져가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삶은 든든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수녀원에 들어오기 전에 활동했던 레지오 마리애 회합 시간에 비밀 헌금 주머니를 돌리던 기억이 새록새록 납니다. 아직 학생이던 제게 비밀 헌금은 아주 매력적이었습니다. 뭐라도 한 가지 하면 다 떠벌리는 세상에 비밀스럽게 각자의 몫을 봉헌하고 마음에 간직하는 것에 감동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가난한 과부의 헌금(루카 21,1-4)에 묘사된 하느님의 사람을 기억하며 살았던 제게는 더 그랬습니다. 회합 도중 어느 결에 비밀 헌금 주머니가 돌면 정말 아무도 모르게 가진 것을 몽땅 넣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성모님께서도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받으신 후 완전히 하느님의 사람으로, 공인으로 자신을 다 내려놓는 ‘피앗’을 아무도 모르게 사셨습니다. 성모님의 하느님 체험은 전 존재를 다 내어드리는 가장 완전한 비밀 헌금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왜 비밀 헌금이냐고요? 성모님의 일을 지금 우리는 성경을 통해 훤히 알고 있지만, 당시에는 모든 것이 마음속에 간직된 채 누구에게도 공개되지 않은 하느님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만 알려진 숨은 삶을 사는 것에 대해 묵상하던 어느 날, 절두산 성지 미사에서 낯익은 모습으로 서 있는 한 부부의 뒷모습을 보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마드렌 자매와 토마스 형제님이었습니다. 미사 후 잠깐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열심한 이 부부는 멀리서 이곳 성지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미사를 온다는 것입니다. 참 인상적입니다. 가끔은 몇 시간을 걸어서 오기도 한다고 하니 그 열정이 대단합니다. 아마도 성지순례이기 때문에 나름의 고행을 하면서 우리 한국 순교자들의 마음에 가 닿으려는 의도가 있었나 봅니다.

 

제가 마드렌 자매를 만난 것은 피정 동반을 하면서입니다. 딱 부러진 말투와 유난히 깔끔한 헤어스타일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게다가 공감 능력이 아주 뛰어났습니다. 피정집 소담재에서 비밀 헌금 같은 마드렌 자매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수련하듯 피아노를 익혀 반주 봉사로 재능 봉헌

 

마드렌 자매는 하느님께 충실한 신앙인입니다. 넘치는 은총을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그 사랑을 표현해 하느님께 전해 드리고 싶은 열망에 온 힘을 다 기울여 피아노를 배웠습니다. 숱한 어려움을 통과해 결국 미사 시간에 반주를 봉헌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나이가 40이 훌쩍 넘어서였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성가 반주 봉사를 할 수 있는 것에서 얼마나 주옥같은 은혜가 쏟아지는지를 나눴습니다. 이러한 하느님 체험을 하면서 형용할 수 없는 충만함과 조금씩 자신을 하느님께 열어가는 방법을 터득하면서 복음의 기쁨을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우리 열정을 부추기시면서 당신께 사랑을 표현하기를 원하십니다.

 

수많은 갈등을 딛고 수련하듯 피아노를 익혀 거룩한 미사에서 자신의 재능을 봉헌한 마드렌 자매는 아이들에게도 재능을 개발해서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에 대해서 간혹 나눔을 합니다. 재능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받은 것에 십일조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것을 아이들에게 시간이 날 때마다 훈육했습니다. ‘봉헌을 하되 절대로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티를 내지 말고 그냥 잊어버려라. 하느님께서 그것을 기쁘게 받으시도록….’

 

그래서였을까요. 아이들은 다들 취업 후 급여의 십 분의 일을 어딘가에 기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을 나비효과라고 하는 것일까요? 아이들은 어떤 상황이 되어 친구들과 나눔을 하게 될 때 그것을 들은 친구들은 감동을 받아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신자가 아닌 친구들도 기부에 동참하여 다른 선한 영향력을 퍼뜨리게 된다는 이야기를 나눠 마음이 따뜻해졌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큰 사랑의 파장인가요.

 

마들렌 자매의 나눔은 유전적 요소도 있습니다. 깊은 신앙도 유전이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관대한 나눔도 유전이 되는 것일까요? 5대째 신앙을 이어 온 마드렌 자매의 외갓집은 교회에서 원하는 것은 언제든지 희사할 준비를 하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것을 이어 어머님은 밥 먹는 시간에 혹시 걸인이라도 지나가면 불러 밥을 나누고, 집안에 들인 누구도 그냥 보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교회가 필요로 하면 집안 소유로 있는 땅도 흔쾌히 내놨다고 하는 비밀 헌금 같은 이야기도 살짝 나눠주었습니다. 어머님의 그러한 관대함을 보고 자라서인지 마드렌 자매의 나눔은 남다릅니다. 하고 나서 생색내는 나눔이 아니라 하느님만 아시게 골방으로 가져갑니다.

 


거룩함은 일상의 작은 결단들이 모여 서서히 자라나

 

가난한 나라에서 선교하는 성직자들을 남모르게 도와 교회 건축에 보탬이 된 예화도 아주 감동적입니다. 큰 금액을 한꺼번에 봉헌하는 것이 아니라 식구들이 각자 조금씩 모아 둔 희사금을 송년 가족 만남의 자리에 가지고 나와서, 어떻게 모으게 되었는지를 나누며 그 자리에서 선교지로 보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몇 년을 하고 나서 가족들이 모두 충만한 기쁨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을 나눌 때는 얼굴에 환한 빛이 감돌았습니다. 큰 액수를 희사하는 부자들은 자신의 이름이 어딘가에 나오기를 바랄 터인데 마드렌 자매의 가족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비밀 헌금입니다.

 

이 가족의 구성은 모두 관대함으로 초대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아원에서 퇴소해 자립하는 청소년을 돕는 큰딸, 미혼모가 낳은 영아들을 돕는 둘째 딸, 청년 실업으로 어렵게 살고 있는 자기 또래의 청년을 돕는 막내 딸. 이 모두가 엄마, 아빠의 모습을 보면서 저절로 몸에 밴 좋은 덕행입니다.

 

저는 이 가족들을 보면서 ‘옆집의 성인’이라는, 교황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Gaudete et Exsultate)’에 언급된 말이 떠올랐습니다. ‘옆집의 성인’은 복자품이나 성인품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낸 삶의 모습을 통해 가정과 공동체를 돌보고 변화시킨 사람들을 일컫습니다.

 

마드렌 자매의 관대함을 보면서 성모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키우실 때도 이렇게 가정에서부터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 것을 몸소 실천하신 것에서 예수님의 연민 어린 마음도 강화되신 것은 아닐까를 상상해 봅니다. 거룩함은 일상의 작은 결단들이 모여 서서히 자라나 큰 나무를 이룬다는 것을 보다 생생하게 느낍니다. 마드렌 자매의 숨은 애덕이 하늘에 별들처럼 빛나기를 기도하면서 다시금 일상 안에서의 비밀 헌금을 돌아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2년 9월호, 이은주 마리 헬렌 수녀(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서울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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