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강론자료

2024-02-04.....연중 제5주일 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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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24-02-03 ㅣ No.2430

                                연중 제5주일 (나해)

7,1-4.6-7      1코린 9,16-19.22-23      마르코 1,29-39

2024. 2. 4.

주제 : 나는 무엇을 목적으로 사는가?

세상의 삶은 고통이고, 힘든 일만 내 앞에 있다고 말하기가 쉽습니다. 혹시라도 다르게 말하는 사람도 있기는 하겠지만, 우리가 살면서 말하거나 듣는 소리에는 삶이 힘들고 어렵다는 소리가 많을 수 있습니다. 일부러라도 사람은 삶에서 행복과 사랑을 더 많이 말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자기의 삶이 실제로 행복하거나 즐거움이 많아서 그렇게 좋은 소리를 말한다기보다는, 기대하는 바람을 담아서 좋은 일이 많으면 더 좋겠다는 희망을 담을 거라는 소리입니다.

 

남자 어른과 여자 어른이 세상에서 나눈 사랑의 결과로, 어머니의 뱃속에 자리를 잡은 일이 사람이라는 생명체의 시작이겠지만, 우렁찬 소리와 함께, 어머니와 하나로 살던 몸이 서로 다른 모양으로 갈라서면, 그때부터 삶에는 마냥 기쁨과 행복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어머니의 품을 떠나면 그에게 찾아오는 일이 기쁨과 행복이 되게 하려면 많이 노력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기본적인 현실을 말하고 나면, 그 누구도 현실에서 편하게만 사는 사람이 없다고 말할 것이고, 자기가 만족하는 대로 사는 사람도 없다고 할 것입니다.

 

개인의 생각을 물으면, 힘들게 살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개인의 생각을 물으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현실을 문제가 없이 잘 견딜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래서 사람의 삶은 자기가 바라는 대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불편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런 현실을 안다면, 내가 처한 현실을 어떻게 해석하고 대하느냐에 따라서 나의 삶이 달라진다고 말할 것입니다.

 

오늘 독서로 들은 말씀에서, 욥은 자기의 삶이 기쁘지 않다고, 힘겨운 모습을 말합니다. 사람의 삶은 언제부터 이렇게 힘들어졌을까요? 그 원인을 우리가 무엇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원인을 알면 현상을 바꾸는 방법도 생각한다고 하겠지만, 욥기의 말씀만 들으면, 내가 처한 현실을 안다고 해도, 그 현상을 다르게 바꾸는 방법은 찾기가 어렵습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좋은 결과를 만끽하는 방법과 신앙의 처지에서 좋은 일이 생기게 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삶은 어렵다는 말을 누구나 쉽게 합니다.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현실은 그 말대로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지만, 한계를 알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이 사람의 현실입니다.

 

오늘, 마르코 복음의 말씀은 사람이 현실에서 겪는 어려움을 줄이거나 없애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마귀들의 영향력의 크기를 줄이려고 활동하신 모습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신앙인으로 옳게 사는 길을 생각하는 것이 먼저이고 순서입니다만, 그러한 좋은 뜻을 앞에 세우고서도 우리의 삶은 무너지기가 쉽습니다. 삶에서 겪는 고통과 힘겨움이 우리의 삶을 힘들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르는 미래를 알려고 점을 치고, 나에게 한번 다가온 좋은 삶의 결과는 나를 떠나서는 안 된다고 큰 소리로 주장하기도 쉽습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잡은 손을 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늘 내 곁에 머물러 계셔야 한다고 주장하면 그 주장은 얼마나 큰 잘못이겠습니까? 예수님은 갈릴레아 호수 주변에서 시작하여 복음이 더 넓은 지역에 퍼지기를 원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하면 깨닫겠습니까?

 

올해 신앙인들이 세상에서 실천할 일로 교구장님께서 정하신 일은 내가 받아들인 신앙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는 일입니다. 세상의 일이라면 나에게 이익이 생기고 좋은 결과가 생길 때 그대로 한다고 하겠지만, 신앙을 드러나게 담은 일에는 어떻게 행동하겠습니까?

 

내가 나와 다른 사람을 생각하여 좋은 일을 하는 것으로 사도 바오로가 알려주는 방향은 권리의 행사가 아니라, 내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의 실천이라는 표현도 잘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복음선포를 의무로 실천해야 하는 것인지 한 번 더 생각하면서, 사도 바오로가 가졌던 마음과 생각을 본받는다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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