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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37: 1400대 곤장을 버틴 사내, 박취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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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2-02 ㅣ No.1341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37) 1400대 곤장을 버틴 사내, 박취득


곤장 1400대 맞고도 신앙 증거… 풀뿌리 교회의 횃불이 되다

 

 

- 박취득 라우렌시오가 온갖 형벌에도 굴하지 않자 옥졸들이 새끼줄로 목을 졸라 죽이고 있다. 그림=탁희성 화백.

 

 

‘부헝이’와 ‘북실이’들

 

옛 기록을 보다가 거기 적힌 이름 앞에 울컥할 때가 있다. 앞서 본 1791년 12월 11일에 충청도 관찰사 박종악이 정조에게 올린 비밀 보고서 별지를 볼 때도 그랬다. 당시 그가 충청도 관내 각 지역에서 검거한 천주교인들의 명단과 그들에게서 압수한 서책과 성물 등의 물품 목록을 적은 것인데, 면천군 관련 기록은 이렇다.

 

“면천의 강주삼(姜柱三), 황아기(黃惡只), 박일득(朴日得)은 깨우쳤으므로 다짐을 받고 풀어주었습니다…. 신귀득(申貴得), 노막봉(盧莫奉), 김의복(金儀福), 모조이(牟召史), 김선돌(金先乭), 한봉돌(韓奉乭), 김부허응(金夫許應)은 자복을 받고 풀어 주었습니다. 하귀복(河貴福), 강세종(姜世宗), 유엇재(劉於叱才), 김만익(金萬益), 이오직(李五直), 김북실(金北失), 김답금(金畓金), 방백돈(房白頓), 박산흥(朴山興), 김계룡(金癸龍), 김종택(金宗宅), 이쾌손(李快孫), 김상요(金尙要), 강점복(姜占福), 강행복(姜行福)은 자복을 받고 풀어 주었습니다.”

 

뒤쪽에 나오는 사람들은 이름으로 보아 대부분 노비 신분이었을 것이다. 성씨는 떼고 그저 막봉이, 선돌이, 봉돌이, 엇재, 오직이, 답금이, 백돈이 등으로 불렸을 눈물겨운 이름들이다. 김부허응(金夫許應)은 아마도 눈이 부엉이 눈처럼 동그랗대서 ‘부헝’이로 불린 것을 음을 취해 이렇게 적어놓은 것일 테고, 김북실(金北失)은 태어났을 때 북실북실 퉁퉁해서 얻은 이름이었을 것이다. 이 명단을 통해 당시 면천군의 교세가 상당했고, 그것도 대부분 신분 낮은 백성들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사는 일 답답하고, 평생 업신여김만 당하며 살아온 인생들이 천주학을 만나면서 삶이 문득 변했다. 사람이 이렇게 서로를 위해주고 아끼는 세상도 있었구나. 밥상에 떨어지는 음식 부스러기를 주워 먹던 라자로가 천주의 품에 먼저 안겨 행복하더라는 천국의 소식에 이들은 고마워서 울었다. 뜻 모르고 외우던 천주경과, 너무도 단순해서 무섭던 십계명의 가르침만 따르면 죽음 뒤에는 못된 양반도 없고, 간악한 아전도 없는 천당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 복자 박취득 라우렌시오 초상화.

 

 

박일득과 박취득 형제

 

면천 고을 체포자 명단 첫머리에 나오는 강주삼과 황아기는 부부였을 가능성이 높다. 박일득은 이들 부부와 함께 면천 교회를 이끌던 지도자급의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를 바로 이어 앞서 살펴본 김필군과 그의 아들 이름이 등장한다.

 

박일득은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도 그 이름이 나온다. 그는 복자 박취득 라우렌시오의 친형이었다. 형 박일득이 면천 고을로 붙잡혀가 여러 달이 지나도 석방되지 않자, 박취득이 아침에 관청문을 두드려 군수 정동표(鄭東杓) 앞에 섰다. “죄 없는 사람을 사납게 매질하고 여러 달 감옥에 가두니, 이것은 큰 잘못이 아닙니까?” 그가 박일득의 동생이란 말을 들은 군수는 불같이 화를 내며 그에게 칼을 씌워 혹독하게 매질했다. 그는 가벼운 나무 칼 말고 무거운 쇠칼을 씌워 달라며 대들었다. 그는 면천 관내에서 인심을 얻은 인물이었다. 읍내가 들썩이며 민심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군수는 입장이 난처해졌다. 그 마저 옥에 갇힌 지 한 달쯤 되었을 때 조정의 석방 공문이 내려왔다. 이렇게 해서 1791년의 소동은 겨우 가라앉았다.

 

그로부터 6년 뒤인 1797년 8월 19일 박취득은 홍주(洪州) 목사 김이호(金履鎬)에게 다시 체포되었다. 그의 형 박일득에 관한 기록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처음에 피해 달아났던 그는 아들이 자기 대신 잡혀갔다는 소식에 자진 출두했다. 목사가 임금과 관장의 명을 무시하고, 남의 아내를 범하며, 재산을 쓸데없는 데다 낭비하고, 조상에게 제사도 지내지 않는 패륜을 행한다며 나무라자, 그는 십계의 가르침을 낱낱이 대면서 목사의 말에 따박따박 반박했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 어째서 재산을 쓸데없이 낭비하는 것이냐며 따졌다.

 

그는 매를 흠씬 맞았다. 형리는 집게로 맨살을 집어 뜯기까지 했다. 책과 성패(聖牌)와 그림을 불사르라고 하자, 죽어도 못한다며 그리스도의 강생과 수난 공로, 부활과 승천, 재림에 대해 설교했다. 목숨을 앗아가겠다는 협박에는 이렇게 말했다. “죽어야 한다면 그것이 무슨 대수입니까? 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습니다. 삶은 잠시 지나는 나그네 길이요, 죽음은 본향으로 돌아감입니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았다.

 

 

꿈에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새로 부임한 목사 앞에서도 그는 사람들의 첫째 아버지시요, 만물의 최고 주재자이신 천주를 결단코 배반하지 않겠다며 어떤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다. 목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혹독한 매질을 더한 뒤 그를 서학 죄인들을 전문적으로 취조하던 해미의 좌영(左營)으로 넘겼다. 당시 해미 현감은 조한진(曺翰振)이었다.

 

심문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었고, 고문의 강도는 점점 더 세졌다. 현감은 한마디도 지지 않고 교리로 가르치며 따지는 그에게 화가 날 대로 났다. 천주를 배반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하자, 우리는 죽어 천당에 올라 큰 행복을 누리겠지만, 악인들은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구덩이에서 끝없는 고통을 받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니 목을 쳐서 당장에 죽여달라고 했다.

 

현감은 감사에게 처분을 요청했고, 매질해도 항복하지 않으면 죽여도 좋다는 답변을 받아냈다. 현감은 박취득에게 그 공문을 읽어주었다. 그는 꿈쩍하지 않았다. 이후 여러 달 동안 박취득은 8일 또는 10일에 한 번씩 끌려가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 상처투성이의 그를 옷을 벗긴 채 진흙 속에 던져 밤새 추위 속에 비를 맞게까지 했다. 박취득은 온몸이 너덜너덜한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옥중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봄과 가을은 흐르는 물처럼 지나갑니다. 세월은 부싯돌에 이는 불똥과 같아 길지 못합니다. 저는 잠결에 십자가를 따르라고 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1799년 2월 27일, 그는 15번 또는 16번째의 심문에서 곤장 50대를 맞았다. 현감은 아예 그를 죽일 작정으로 때리면서 물까지 부어 물볼기를 쳤다. 그래도 그는 죽지 않았다. 현감과 형리들은 죽지 않고 여전히 살아 있는 그를 귀신 보듯 했다. 완전히 까무러친 그는 감옥에 다시 내던져졌다.

 

몇 시간 뒤 그는 혼자 힘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감방에 들어가 누웠다. 이튿날 그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말을 들은 현감은 옥사장을 때리며 너까지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옥사장은 감옥으로 다시 와서 박취득을 죽도록 더 때렸다. 때리다 지친 옥사장이 잠깐 잠이 들었을 때, 감옥에 함께 갇혀 있던 교우들이 다가가자 박취득은 깨어나 그들에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상처는 이미 다 나아 흔적도 없었다.

 

옥사장은 눈앞의 광경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요술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그는 새끼로 목을 졸라서 마침내 박취득의 긴 목숨을 거두었다. 달레의 기록에 따르면 1799년 2월 29일 오전 11시에 그는 세상을 떴다. 그가 감옥에 갇힌 뒤에 맞은 곤장은 모두 1400대가 넘었다. 8일 동안 물 한 모금 안 주고 굶긴 적도 있었다. 인간의 한계를 한참 벗어난 잔혹한 매질이요 고문이었다.

 

 

풀뿌리 교회의 횃불

 

하지만 박취득이 1799년 2월 29일 오전 11시에 죽었다고 시간까지 적시한 다블뤼와 달레의 기록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1799년 6월 21일에 당시 충청감사 이태영이 올린 상소문의 기록 때문이다. 당시 그는 이존창의 석방을 청했다가 조정이 들끓자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고 저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당시 충청도에서 사학 문제로 전향하지 않아 미결수의 상태로 갇혀 있던 사람은 이존창과 박취득 두 사람뿐이었다. 그런데 박취득은 지난달에 갑자기 죽고 이존창만 남았는데, 지난 가을 이후 이존창의 자세가 바뀌어 마음으로 맹세하고 입으로 다짐하는 태도에 진정성이 느껴져서 석방을 청하게 되었노라고 보고했다.

 

이 글에 따르면 박취득이 죽은 것은 1799년 2월 29일이 아니라 1799년 5월이었다. 실제 해미에서 2월에 죽은 것을 감사에게는 5월에 죽었다고 보고해서 이태영이 잘못 알았을 가능성이 있지만, 당시 조선의 죄수 관리와 보고 체계가 그렇게 허술하지는 않았다.

 

이존창을 정점에 두고 형성된 충청도 일대의 신앙은 양반 지식인층이 선도에 섰던 다른 지역과 달리 기층민 중심의 풀뿌리 교회였다. 정작 지도자였던 이존창이 1791년부터 여러 차례 배교 행동을 반복했음에도, 박취득이 조금의 흔들림없이 굳건하게 신앙을 지켜낸 것은 그 의미가 특별했다. 그의 주변에 형 박일득과 김필군 부자, 그리고 그들을 믿고 따랐던 부헝이와 막봉이와 엇재, 그리고 수많은 북실이들이 있었다. 1400대가 넘는 곤장으로도 결코 꺾을 수 없었던 박취득의 신앙은 그의 죽음 이후 점차 횃불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박취득은 한양에서 지황 사바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그러니까 박취득이 지황(池潢, 1767~1795)에게서 신앙을 받아들인 것은 그가 처음 면천 군수 앞에 섰던 1791년보다 훨씬 전의 일이었다. 지황은 1795년 주문모 신부 실포(失捕) 사건 당시 윤유일, 최인길과 함께 의금부로 붙잡혀 가서 단 하루 만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했던 인물이다. 이들의 죽음에도 감춰진 얘기가 많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1월 31일,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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