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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명작 속 하느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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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10-04 ㅣ No.228

허연 기자의 명작 속 하느님 (1)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복음 12장 24절)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펼치면 맨 앞장에 나오는 성경구절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알렉산드르 수도원에 있는 도스토예프스키 무덤 묘비에 적혀 있는 귀절이기도 하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모든 소설에는 신앙에 대한 고뇌가 바탕에 깔려 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그중에서도 가장 극적으로 신앙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후세의 누구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두고 ‘그리스도교 소설’로 분류하지 않는다. 실제로 이 작품은 종교와 언어, 국적과 사상을 뛰어넘어 전 세계인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하버드 대학 도서관에서 가장 많이 대출되는 소설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다. 이 소설은 왜 세계인이 사랑하는 소설이 됐을까.


톨스토이도 사랑한 소설

같은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임종을 맞았을 때 그의 옆에는 단 한 권의 책이 놓여 있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었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는 동시대를 살았지만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같은 러시아인이자 추종을 불허하는 대가였지만 문학세계와 삶은 너무도 달랐다. 톨스토이 문학이 자연적인 건강성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면,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은 병적이고 도시적이었다. 톨스토이가 부와 명예를 얻는 동안 도스토예프스키는 시베리아 유형지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도박장을 전전해야 했다.

이렇듯 다른 운명을 살았음에도 톨스토이는 “세상에 있는 책 모두를 불 질러버리더라도 도스토예프스키는 남겨놓아야 한다.”고 말했을 정도로 그를 흠모했다. 톨스토이뿐만 아니다. 카뮈, 카프카, 헤세, 헤밍웨이, 마르케스를 비롯해 자신의 문학적 입지 중심에 도스토예프스키가 있음을 시인한 작가들은 셀 수 없이 많다.

왜 그랬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렇다. 인간에 대해, 인간 존재의 비극성에 대해, 인간의 한계에 대해 그렇게 치밀하면서도 거대하게 조망한 작가는 없었기 때문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가장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작품이다. 작품 속에서 번뜩이는 그의 고뇌를 만나는 건 어렵지 않다. 평생 운명과 싸운 작가답게 그는 작품 속에서 이렇게 외친다.

“내 일평생에 대해 스스로를 응징하노라. 내 일생을 벌하노라.”

바로 이 인간의 한계라는 지점에서 신앙이라는 빛이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은 인간의 한계를 처절하리만큼 생생하게 그려낸다. 그것은 곧 인간 모두의 한계이자 우리가 신앙 앞에 고개 숙일 수밖에 없는 근거이기도 하다. 이 세상 어느 누구가 인간적인 욕망과 고뇌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래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영원한 고전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른 세계관을 지닌 문제적 주인공들

도스토예프스키의 모든 문학작품들은 ‘죄와 벌’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특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는 “만인은 만인에 대해 유죄”라는 사상, 즉 “모든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 앞에서 모든 일에 있어서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라는 말로 구체화되어 있다.

소설에는 5명의 문제적 주인공이 등장한다. 아버지 표도르 카라마조프는 탐욕스럽고 방탕한 노인이고 큰아들 드미트리는 아버지를 닮아 음탕하지만 고결함을 동경하는 순수성도 함께 지니고 있다. 둘째 아들 이반은 대학을 졸업한 지식인으로 “천국행 입장권을 반납하겠다.”고 말하는 무신론자이자 허무주의자다. 셋째 아들 알렉세이는 수도원에서 신앙의 길을 걷는 매우 종교적인 인물이다.

사생아인 스메르자코프는 아버지 표도르와 백치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간질을 앓고 있다. 묵묵한 머슴처럼 보이지만 표도르에 대한 뿌리 깊은 분노를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표도르와 장남 드미트리는 그루센카라는 여인을 두고 서로 증오하게 된다. 표도르가 아들의 연인인 그루센카에게 연정을 품으면서 촉발된 반목은 걷잡을 수 없이 깊어지고 어느날 표도르는 죽은 채 발견된다. 무신론자인 이반에게 영향을 받은 스메르자코프의 소행이었다.

“신이 만든 세상을 인정하지 않는 이상 인간은 모든 걸 용서받을 수 있다.”는 이반의 말에 세뇌된 스메르자코프가 아버지를 죽인 것. 하지만 스메르자코프는 간질 발작 때문에 혐의에서 벗어나고, 아버지와 크게 반목했던 드미트리가 살인범으로 체포된다. 결국 스메르자코프는 자살하고, 뒤늦게 깨달음을 얻은 드미트리는 아버지를 증오했던 마음의 죄를 인정하듯 순순히 20년형을 선고받는다.

언뜻 단순해 보이는 줄거리 구도 속에는 정신과 육체, 무신론과 유신론 등 대립하는 가치들 간의 갈등이 속속들이 아로새겨져 있다.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단순한 싸움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행위나 논쟁 속에는 인간 존재에 대한 궁극적인 물음이 파편처럼 녹아 있다.

소설 속에서 드미트리는 땅을, 알렉세이는 천국을, 이반은 지옥을 의미한다. 주인공들은 서로 대립하고 뒤엉키면서 현실과 영성을 넘나든다.


신앙에 고개 숙인 인간의 모순

여기서 잠시 도스토예프스키의 삶을 들여다보자.

도스토예프스키는 25세이던 1846년에 첫 소설 ‘가난한 사람들’을 발표하면서 당시 러시아 문단의 총아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 후, 사회주의 경향을 띤 모임에 출입하다가 사형선고를 받기에 이른다. 기막힌 우연이었는지 집행 직전에 사형이 취소되고 대신 유형을 떠나게 된다.

전도유망한 신인 작가였던 도스토예프스키가 감옥과 군대에서 8년의 유형생활을 하는 동안 유일하게 읽을 수 있었던 책은 성서였다. 그의 마지막 작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성서에 대한 깊이 있는 독서와 유형생활을 하면서 들은 이야기가 절묘하게 섞여 탄생한 작품이다.

4부 12편으로 구성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가운데 5편 ‘Pro와 Contra’는, 도스토예프스키 스스로 이 소설의 정점이라 부른 부분이다. 여기에는 ‘대심문관’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이반의 서사시가 포함돼 있다.

이반이 동생 알렉세이에게 “신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신이 만든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요지의 고백을 하고, 이 논리를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대심문관’이며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로마 가톨릭의 부패가 극에 달하고 연일 종교재판이 열리던 16세기 스페인에 그리스도가 나타난다. 대심문관은 그를 감옥에 가두고 자신의 지상낙원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유를 누릴 자격이 없는 인간에게 빵을 주고 대신 자유를 반납받았으며, 그리하여 그들을 온순한 양떼로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대심문관의 기나긴 독백이 끝났을 때 그리스도는 대심문관에게로 다가가 그의 핏기 없는 입술에 조용히 입을 맞춘다.

작품이 발표된 이후 수많은 비평가와 철학자들이 이 ‘대심문관’에 대해 논평하고 분석해 왔다. 이 부분만이 따로 책으로 묶여 출간되기도 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대심문관’에 대한 반론으로 조시마 수도사의 설교인 제6편 ‘러시아의 수도승’을 쓰면서 자신이 생각했던 이상적인 신성(神聖)에 대한 이야기를 그려낸다.

조시마는 사랑과 화합, 용서와 복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설 속에서 조시마는 욥의 믿음을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외친다.

“아아, 이 얼마나 위대한 책이며 이 얼마나 위대한 교훈인가! 성서란 얼마나 고마운 책이며 위대한 기적인가! 그리고 이 책은 인간에게 얼마나 큰 힘을 부여해 주는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 영혼에 가장 가까이 간 작가다. 인간 내면의 온갖 모습이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그의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곧, 인간 모순과 정면으로 맞닥뜨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곧 신앙의 절실함으로 귀결된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쓰면서 도스토예프스키는 논리와 이론의 세계와 이별을 고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인간의 삶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아무리 훌륭한 진리와 부귀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신앙에 위배된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편에 설 것이다.”

[평신도, 제43호(2014년 봄), 허연 바오로(매일경제신문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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