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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한국 교회의 인물상: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설립과 한국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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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10-09 ㅣ No.1596

[한국 교회의 인물상 · 126]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설립과 한국 진출

 

 

머리말

 

메리놀 외방전교회(The Catholic Foreign Mission Society of America, 이하 메리놀회)는 1911년 6월 29일 월시(James A. Walsh, 1867~1936) 신부와 프라이스(Thomas F. Price, 1860~1919) 신부의 주도로 아시아 선교를 목적으로 창설된 미국의 천주교 외방전교회이다. 메리놀회는 전교지 『그 먼 땅에(The Field Afar)』를 간행하여 미국 천주교 신자들에게 아시아 전교의 중요성을 널리 전파하였다. 메리놀회는 1918년 로마 교황청 포교성성1)으로부터 중국 광둥성(廣東省)과 광시성(廣西省)의 포교권을 위임받고 아시아 선교를 시작하였다. 1922년에는 한국의 평안도 지역을 위임받아 이듬해 한국에 진출하였다. 1932년에는 만주의 푸순(撫順), 1935년에는 일본 교토(京都) 지역을 맡으면서 활동 범위를 넓혀갔다.

 

한국의 경우를 자세히 살펴보면, 메리놀회는 1922년 11월 로마 교황청 포교성성으로부터 평안도(平安道) 지역의 포교권을 위임받아 평양 지목구 설정 준비를 위해 1923년 한국에 진출하였다. 이후 포교성성은 1927년 3월 17일 평안도 지역을 서울 대목구에서 분리하여, 평양 지목구로 설정하였다.

 

한국교회사연구소는 1923년 메리놀회의 한국 진출 100년을 기념하기 위해 2023년 10월 14일(토) 메리놀회의 한국 진출과 더불어 동아시아 선교 활동의 의미에 관한 학술대회를 개최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메리놀회의 동아시아 선교사업의 의미와 평양교구사를 넘어 북한 교회사가 재조명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메리놀회의 한국 진출 100년을 기념하며, 한국교회사연구소 2023년 국제 심포지엄을 홍보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에 메리놀회의 설립, 메리놀회의 한국 진출, 평양 지목구의 설정 과정을 대략 살펴보고자 한다.

 

 

메리놀회의 창설과 창립자들

 

개신교 국가 미국에 19세기 중반 이후 유럽의 천주교 신자들이 대거 이민해 왔다. 미국 사회는 밀려들어 오는 아일랜드와 독일 이민자에 놀라 천주교인의 이민을 제한하려는 움직임까지 일어날 정도였다. 특히 1830년대 아일랜드인들은 미국 전체 이민의 3분의 1을 차지하였을 정도였다.2) 남북전쟁 이후 이민자는 그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숫자로 증가하였으며, 아일랜드·폴란드·중남미·독일 등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이민하였다. 천주교 신자의 급증과 교세 확장에 직면한 기존 개신교를 믿는 주류 미국인들은 미국이 가톨릭 세력권에 흡수될 가능성이 있다고 엄포를 놓을 정도였다.

 

성장을 거듭해 온 미국 천주교회는 아직 선교 대상 국가였다. 외방 선교를 위한 신학교나 수도회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점차 외방 선교에 나서야 할 책임과 필요를 인지해 나갔다. 이에 미국 천주교회 자체 내에서 선교 활동을 보다 조직화하고 정기화하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11년 월시 신부와 프라이스 신부가 미국 천주교 외방전교회를 창설하였다. 이 외방전교회는 1911년 4월 27일 미국 주교회의 인가를 얻었고, 6월 29일 교황 비오 10세의 인준을 받았다. 메리놀회는 창설 1년 후 본부를 뉴욕(New York)주 호손(Hawthorne)에서 오시닝(Ossining)에 있는 언덕으로 이전하여 이때부터 ‘메리놀(Maryknoll)’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3)

 

메리놀회를 창설한 월시 신부는 1867년 개신교의 교세가 특히나 강한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Cambridge)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 월시 신부는 지역 개신교의 선교 프로그램을 직접 목격하며 자랐다. 교세가 약했던 천주교는 프랑스 전교 후원회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개신교와 천주교의 선교 활동을 접한 월시 신부는 성 요한 신학교에서 공부하며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활동과 순교에 대해 배우며 크게 감동하였다. 1892년 사제 서품을 받고 보스턴에서 사목하며 꾸준히 해외 선교에 관심을 기울였던 그는 미국 천주교 신자들에게 해외 선교에 관한 관심과 미국 선교사 양성을 위한 신학교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우선 그는 1907년 미국 천주교의 해외 선교에 관한 잡지 『그 먼 땅에』를 창간하였다.4)

 

프라이스 신부는 1860년 노스캐롤라이나주 윌밍턴(Wilmington)의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프라이스는 1886년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첫 사제 서품을 받은 인물이다. 그는 매우 적극적으로 선교 활동을 수행하였다. 수백 마일을 걸어 다니며, 주로 개신교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개시하였다. 그는 선교에 있어 천주교 진리를 알려주는 잡지 출간이 매우 긴요한 문제라고 판단하고, 1897년 잡지 『진리(Truth)』를 창간해 천주교를 올바로 알리고 신앙을 증진하고자 하였다. 신학교 건립과 고아원 운영 등의 활동도 아울러 수행하며 점차 외방 선교를 진지하게 고려하였다. 그는 선교 활동에 관한 생각을 『진리』에 발표하기도 하였다.5)

 

메리놀회 공동 창립자 월시 신부와 프라이스 신부는 미국 천주교회가 선교의 대상에서 벗어나 해외 선교 활동에 나서기를 바라며 각자의 자리에서 메리놀회 설립의 기초를 다져갔다.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은 1910년 9월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제23차 세계성체대회에서 조우하여 외방 선교라는 같은 생각을 공유하였고, 그것을 구체화하여 1911년 메리놀회를 창립하였다.6)

 

 

한국 진출과 평양 지목구 설정

 

평안도 지역은 조선시대 부경사행(赴京使行)의 통로이자 천주교 신앙이 조선에 전파되고, 초기 천주교 신자들이 밀사를 통해 중국 교회와 연락하며,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조선으로 들어오는 입국로 역할을 하였다. 천주교가 이 지역에 전해진 시기는 19세기 중엽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1866년 병인박해로 시련을 겪고, 신자들의 헌신으로 교회를 재건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제7대 조선 대목구장 블랑(J. Blac, 白圭三, 1844~1890) 주교는 1885년 프와넬(V. Poisnel, 朴道行, 1855~1925) 신부를 평양에 파견하였으나 1년 만에 서울로 전임되었다. 1896년에 이르러서야 르 장드르(L. Le Gendre, 崔昌根, 1866~1928) 신부가 평양 본당에 파견되어 평안도 지역의 첫 본당이 생겼다. 그 후 천주교 신자 수가 꾸준히 늘어나고 본당도 계속 증설되었다.7)

 

하지만 이 지역에는 1893년부터 개신교 선교사들이 들어와 교회를 세우고 교육과 의료 사업을 벌이는 등 왕성한 선교 활동으로 급속히 개신교 교세를 확장하고 있었다. 1920년대에 들어 개신교와 천주교의 교세 차는 급격히 차이를 보였다. 일례로 메리놀회가 한국에 진출한 1923년 평안도의 총인구는 244만 1,400명에서 천주교 신자 수는 4,800명인데 반해 개신교 신자 수는 41,500명으로 9배가량 차이가 났다. 천주교는 프랑스 신부 3명과 한국인 신부 2명이 5개 본당에 50여 개 공소를 담당하였지만, 개신교는 미국인 목사 50명과 많은 한국인 목사가 72개 예배당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8)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만으로 평안도 지역을 감당할 수 없자, 서울 대목구장 뮈텔(Gustave Charles Marie Mutel, 閔德孝, 1854~1933) 주교는 포교성성 장관에게 평안도 지역 선교 문제를 상의하며, 메리놀회에 평안도 지역 선교를 맡겨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의 급속한 교세 확장에 대응하는 방안을 건의하였다. 한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는 선교지에 큰 타격을 입혔다. 한국에서 활동하던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가 전쟁에 징집되어 본국으로 돌아갔을 뿐 아니라 프랑스에서 오던 후원금을 받기도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신부들의 공백으로 인해 한국 천주교회가 처한 어려움을 호소하며 메리놀회가 한국 선교에 나서줄 것을 촉구하였다.

 

때마침 1917년 9월부터 동양 선교 여행을 하던 메리놀회 총장 월시 신부는 10월 25일 뮈텔 주교를 만난 뒤 한국에서 메리놀회의 선교 가능성을 의논하고 한국 선교에 대단히 흥미를 갖게 되었다. 이후 1922년 11월 메리놀회는 교황청 포교성성으로부터 평안도 지역의 포교권을 위임받았다. 1922년 11월 27일 월시 총장 신부는 평양 지목구 설정 준비 책임자로 패트릭 번(James Patrick Byrne, 方溢恩, 1888~1950) 신부를 임명하였다.

 

평양 지목구 설정 지령을 받은 번 신부는 1923년 미국을 출발, 도중 로마에서 교황 비오 11세를 알현한 후 고베(神戶)를 들르고 이후 교토 지목구장이 될 지역이었던 교토도 방문하였다. 그리고 5월 23일 한국에 도착하였다. 이후 10월 22일 클리어리(Patrick H. Cleary, 吉, 1896~1970) 신부, 11월 모리스(John E. Morris, 睦怡世, 1889~1987) 신부 등이 차례로 입국하자 의주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고 평양 지목구 신설을 위한 준비 작업에 매진하였다. 이후 메리놀회 수녀들도 파견되어 선교 활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메리놀회 선교사가 계속 파견되어 평안도 지역 선교 활동이 자리를 잡아가자, 포교성성은 1927년 3월 서울 대목구에서 평양 지목구를 분리·설정하고, 초대 지목구장에 패트릭 번 신부를 임명하였다.

 

 

맺는말

 

2023년 10월 14일(토)에 있을 한국교회사연구소 2023년 국제 심포지엄에서는 메리놀회의 한국 진출 100년을 기념하기 위해 1918년 메리놀회의 중국 광둥성(廣東省)과 광시성(廣西省) 선교 활동, 위에서 살펴본 메리놀회의 한국 진출 과정과 의미, 1935년 일본 교토(京都) 지목구 설정의 의의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나아가 메리놀회의 동아시아 선교에 대한 열정과 노력을 되새기며, 새 시대의 선교 방향을 전망해 보고자 한다. 많은 분이 한국교회사연구소 국제 심포지엄에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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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금의 교황청 ‘인류복음화성(人類福音化省)’을 말한다. 교황 그레고리오 15세가 1622년에 처음 설립하였고, 전 세계 선교 활동과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1967년에 교황 바오로 6세의 교황청 개편 때 ‘인류복음화성 또는 포교성’으로 바뀌었다가, 1988년 ‘인류복음화성’으로 불리게 되었다.

 

2) 1870년대 280만 명에서 1880년대는 520만 명의 이민자가 미국에 왔다. 그 뒤로도 이민자의 수는 더욱 폭발적으로 증가하였고, 1889년부터 1915년까지 미국에는 2천만 명 이상이 이민해 왔다(Angelyn Dries, The Missionary Movement in American Catholic History, Orbis Books, pp. 22~42).

 

3) 메리놀 회원들은 메리놀 외방전교회 본부를 1912년 뉴욕 오시닝(Ossining) 근처 언덕 위로 이전하면서 성모 마리아의 중재를 간구하였고, 자신들이 있는 장소를 ‘마리아의 언덕(Mary’s Knoll)’이라고 불렀다. 이때부터 메리놀이 선교회의 명칭이 되었다(김성희, 「메리놀 외방전교회」, 『한국가톨릭대사전』 4, 2004, 2593~2594쪽).

 

4) 메리놀 미션 아카이브 월시 신부 약전(https://maryknollmissionarchives.org/bishop-james-a-walsh).

 

5) 메리놀 미션 아카이브 프라이스 신부 약전(Marryknoll Mission Archives(https://maryknollmissionarchives.org/father-thomas-f-price).

 

6) 메리놀회의 창설 과정은 Wiest Jean-Paul, Maryknoll In China, Hutchinson, 1988 ; 최선혜, 「한국 천주교회의 미국 천주교 외방선교회(메리놀회)와의 교류와 그 의의 : 1911~1923)」, 『교회사연구』 49, 2016, 102~112쪽 참조.

 

7) 평안도 지역 천주교 신앙 전파는 천주교 평양교구사 편찬위원회 편, 『천주교 평양교구사』, 분도출판사, 1981, 30~46쪽 참조.

 

8) 천주교 평양교구사 편찬위원회 편, 위의 책, 70~74쪽.

 

[교회와 역사, 2023년 10월호, 글 이민석 대건 안드레아(한국교회사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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