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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프랑스 선교사들의 고향을 가다: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 고향, 퀴퀴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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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4-04 ㅣ No.1541

[프랑스 선교사들의 고향을 가다] (3)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 고향, 퀴퀴롱


조선의 양떼 위해 온몸 바친 선교사의 흔적 찾아

 

 

- 노트르담 드 볼리외 성당 내부 전경. 페레올 주교는 어릴 적 이곳에서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했다.

 

 

프랑스 동남부 아비뇽(Avignon)에서 60여㎞ 떨어진 곳에 자리한 전통적인 요새 마을 ‘퀴퀴롱’(Cucuron). 중세 모습을 간직한 이 시골 마을은 한국 천주교회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 첫 한국인 사제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에게 사제품을 준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Jean Joseph Ferreol, 1808∼1853) 주교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 바로 이곳이다.

 

마치 중세 시대로 돌아간 착각이 들었다.

 

눈앞엔 700여 년 동안 퀴퀴롱을 지켜온 성문이 서 있었다. 입구를 좁게 만들어 위로 높이 쌓아 올린 성문은 ‘어디서 온 누구냐’고 내려다보며 묻는 듯했다.

 

성문 안은 황금빛으로 물결쳤다. 마을을 이루고 있는 옛 건물 외벽 대부분은 파스텔톤 노란색으로 채색돼 있었다. 마을 전체가 따스한 지중해 햇살을 머금은 듯했다. 작은 광장에 놓인 아담한 분수대는 마을에 여유로운 분위기를 더했다. 바람이 불면 빵 굽는 냄새가 풍겨왔다. 이런 소소한 풍경들은 퀴퀴롱만의 따뜻한 정취를 자아냈다.

 

 

노트르담 드 볼리외 성당

 

‘RUE DE L’EGLISE’(성당 가는 길).

 

성문 정면으로 난 좁은 골목길에 알림판이 붙어 있었다. 성당 가는 길은 눈이 즐거웠다. 건물 귀퉁이의 독특한 조각, 집집이 다른 색으로 꾸민 창살, 아기자기한 화초까지 정신없이 구경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성당 앞이었다.

 

성당은 꽤 큰 편이었다. 화려한 조각과 장식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부분적으로 고딕 양식을 따른 성당은 소박한 퀴퀴롱 마을과 잘 어울렸다. 이곳이 어린 페레올이 세례받았던 ‘노트르담 드 볼리외’(Notre Dame de Beaulieu) 성당이다.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성당 마당에서 만난 파란 눈의 할아버지가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 순례단을 향해 반갑게 외쳤다. 1961부터 17년간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한 태요한(Olivier Tellier, 파리외방전교회) 신부였다. 그는 퀴퀴롱 지방 신자들과 순례단을 맞이했다. 한국을 떠난 지 오래였지만 밝은 미소와 한국어 실력은 여전했다.

 

- 페레올 주교가 어린 시절 세례 받은 세례대. 성당 내부에 전시돼 있다.

 

 

그의 안내로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성당에 들어서자마자 왼편에 세례대가 있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페레올이 유아 세례를 받은 바로 그 세례대였다.

 

주 제단 왼편 경당 벽에는 페레올 주교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까만 눈썹과 눈동자, 짙은 색 수염까지 동양인이라 해도 믿을 법한 외모였다. 퀴퀴롱 신자들이 주교를 기억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성당을 나서며 태 신부가 말했다. “제가 한국에 있던 1960년대만 해도 한국인 사제가 많지 않았어요. 근데 지금은 수백 명도 더 되잖아요. 한국에서 사목했던 사제로서 너무나 기쁜 일입니다. 모두가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던 선조들과 신자들을 포기하지 않았던 선교사들 덕분 아니겠어요?”

 

 

다시 찾은 생가터

 

태 신부에 이어 퀴퀴롱 지방 역사학자 르네 볼로(Rene Volot)씨가 페레올 주교 생가로 안내했다. 성당에서 300m 정도 떨어진 골목길 안쪽에서 그가 멈췄다. “이곳이 페레올 주교가 태어난 곳입니다.” 볼로씨가 가리킨 곳은 막힌 벽이었다. 허물어진 틈 사이 벽돌로 메운 곳, 그 자리가 생가 입구였다. 제3대 조선대목구장의 생가터가 처음으로 한국 교회에 알려진 순간이었다.

 

- 페레올 주교가 태어나서 소신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살았던 집.

 

 

페레올 주교는 소신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자랐다. 정육점을 대대로 운영해온 덕에 그의 집안은 비교적 여유가 있었다. 주교의 부모는 종종 번 몫 중 일부를 양로원에 기부했다고 한다. 어려운 이에게 자신의 것을 나눴던 주교의 부모와 어려운 교회를 위해 자신을 헌신했던 주교의 삶이 어쩌면 닮았단 생각이 들었다.

 

순례 후 작은 세미나가 열렸다. 볼로씨는 어린 시절부터 조선에 입국하기까지 페레올 주교의 일대기를 순례단에게 상세히 설명했다. 그리고 마지막 인사 시간, 태 신부를 비롯한 퀴퀴롱 신자들은 순례단을 위해 지방 민요를 노래로 선물했다. 순례단의 답가도 퀴퀴롱에 울려 퍼졌다. 어쩌면 페레올 주교도 불렀을지 모를 노래였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페레올 주교는 누구인가

 

페레올 주교는 1838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 1839년 기해박해가 한창이던 조선 선교를 위해 프랑스를 떠났다. 우여곡절 끝에 주교는 김대건(안드레아) 신부, 다블뤼 신부와 1845년 조선 입국에 성공했다. 이들의 선교 활동으로 박해 이후 폐허가 된 조선 교회는 다시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입국 당시 6000여 명에 불과했던 신자 수가 8년 후 두 배가 될 정도였다. 그는 또 1839~1846년 순교자 82명의 전기 자료를 교황청에 보내 시복시성을 청원했는데, 그 중 70명이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성됐다.

 

하지만 1846년 병오박해 발발로 김대건 신부를 비롯해 신자 9명이 순교했고,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교우촌으로 몸을 피해야 했다. 그래도 주교는 교우촌 방문과 성직자 영입을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과중한 업무로 페레올 주교의 건강은 점점 쇠약해졌고 결국 1853년 2월 3일 주교는 병으로 서울에서 선종해 미리내 성지 김대건 성인 묘지 옆에 묻혔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평화신문, 2016년 4월 3일, 글ㆍ사진=백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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