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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인간: 교회의 길 - 그리스도교 인본주의를 향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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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3 ㅣ No.473

인간 - 교회의 길


그리스도교 인본주의를 향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가르침

 

 

우리가 여기서 다루게될 내용은 보다 완전한 인본주의를 추구하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가르침을 통해서 교회가 궁극적으로는 무엇을 추구하고 있고, 그것을 위해서 어떻게 노력해 왔는가를 살펴보면서 인간은 교회에게 있어서 어떠한 존재인가를 구체적으로 파악해보는 일이다. 교회는 결코 인간이 이 사회 안에서 살아가면서 던지는 질문이나 의문들에 대해서 모른척하는 방관자는 아니다. 그리스도의 빛이 모든 인간을 비추고 인간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처럼, 교회 역시 복음화라는 자신의 임무를 통해서 모든 인간을 만나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숱한 문제들을 떠맡는다. 

 

교회는 자신의 존재가 의미하는 것처럼 자신의 행동에 있어서도 인간과의 친밀하고도 생동하는 관계를 떠나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교회가 인간에게 봉사해야만 하는 이유는 그래야만 교회가 떠맡고 있는 신적 소명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빌어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태 20,28)고 끊임없이 외친다. 바로 이 때문에 인간은 교회가 걸어야만 하는 첫 번째이며, 동시에 가장 기본적인 길이 되는 것이다. 교회와 또 교회가 걸어야 할 길로서의 인간 사이의 관계는 곧 성부와 성부를 향해서 걸어가는 성자 그리스도의 일생과 비유할 때 아마 가장 적절한 비유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의 모든 전승은 끊임없이 "인간 개개인은 교회가 따라 걸어야 할 길이며, 교회는 인간 개개인과 함께 이 길을 걷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통하여 성부와 그분의 사랑을 계시하시면서 걸으셨던 발자취를 따라서 걸어야 한다"고 가르쳐온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가르침에서의 핵심은 언제나 인간이다. 교황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언제나 인간을 자신의 가르침의 중심으로 삼고 있다. 교황은 자신의 첫 번째 회칙 {인간의 구원자}에서도 교회의 근본 선택의 의미와 내용을 인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두 번째 회칙인 {자비로우신 하느님}에서도 역시 그리스도교 인간학을 중심 주제로 삼으면서 인간의 그리스도교적 개념을 확고하게 가르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참으로 그리스도는 인간을 인간에게 완전히 드러내 보여주실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인간 자신의 품위를 인간에게 되돌려 주시면서 성부의 자비로우신 사랑을 인간에게 밝혀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신비의 빛으로 인간의 품위와 하느님의 자비가 만나 서로 합쳐지면서 인간의 참된 모습이 드러나게 되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가 지향하는 참된 인본주의의 모습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바탕을 가지고 우리는 엄밀히 말해서 신학적인 통찰이나 역사적 상황에 대한 분석과는 거리를 두면서 사목적인 방향에서 교회와 세상의 인간을 위한 움직임, 곧 인간에 대한 봉사를 으뜸으로 하고, 인간들 사이에 하느님의 자비를 전달해주는 자비의 전달자로서의 교회의 모습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1. 교회의 사명 : 인간을 위한 봉사

 

요한 바오로 2세는 {인간의 구원자}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모든 사람과 일치시키신 것이 사실이라면 교회는 이 신비 속으로 깊이 들어가고 이 신비의 풍부하고 보편적인 언어를 새겨들음으로써 교회의 본성과 사명을 보다 깊이 생활에 옮기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회칙 {인간의 구원자}에서 기본 주제로 삼고 있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업적을 통한 인간의 구원이며, 이는 항상 그리고 구체적으로 교회를 통해 실현된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회칙이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는 또 하나의 생각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이 미래를 움직이는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요한 바오로 2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금세기의 공의회가 교회가 나갈 길로 설정하였고, 선임 교황 바오로 6세께서 그분의 첫 회칙에서 지적하신 길은 상당히 오랫동안 우리 모두가 따라야 할 길임에 틀림없다. 그러면서도 이 새로운 단계에서 우리는 마땅히 이런 질문을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어떻게, 어떤 방도로 이 길을 계속 나아가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실상 공의회의 가장 기본적인 역할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인데, 이에 대한 대답은 단순히 말로써만 해답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고 역동적인 움직임을 통해서 가능할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하면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심혈을 기울여 추구하고 있는 것은 바로 교회가 성숙되고 자율적인 보편의식을 가지고 기본적인 역할을 수행해야만 한다는 것인데, 무엇보다도 현대 사회 안에서 교회의 본성과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와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인간의 구원자}가 인간을 위한 봉사로서의 교회의 사명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 점에 대해 세밀하게 살펴보고, 나아가 공의회와 요한 바오로 2세의 가르침 사이에서 드러나고 있는 발전에 대해서도 살펴볼 것이다. 

 

1.1. 성서의 시각 

 

공의회나 {인간의 구원자} 모두가 봉사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사명과 교회의 사명을 언급하는 데 있어서 온전히 일치하는 것은 둘 모두가 성서적 시각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약성서가 보여주고 있는 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사명은 이 세상을 향한 성부의 사랑을 구체화시키는 일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 주실 정도로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셨다."(요한 3,16) 교황이 언급하는 것처럼 이 아들의 사명은 하나는 신적 요소를 지니고 있고, 또 하나는 인간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이 두 요소는 하나로 일치된다. 즉 성서에서 자주 언급되듯이 '봉사'의 범위가 이 두 요소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공의회와 {인간의 구원자}는 자주 다음과 같은 복음을 인용한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마태 20,28) 

 

이렇게 볼 때 신약성서가 말하는 그리스도론의 기초에는 그리스도의 봉사가 성부께 대한 봉사, 인간들에 대한 봉사라는 이중적 차원이 하나로 일치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함만(A. Hamman)은 이 점에 대해 아주 정확하게 언급한다: "성서를 주의 깊게 읽어 가는 사람은 봉사와 섬김의 개념이 성서에서 매우 핵심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곧 봉사란 봉사자 그리스도의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역설적으로 드러내주는 개념이다. 예수 자신은 자신의 사명의 특징으로서 봉사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으며, 교회 역시 그 모습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봉사의 의미는 매우 광범위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하느님께 대한 봉사, 인간들에 대한 봉사, 원수들을 사랑하는 것, 이 모두가 같은 구원 경륜에 포함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원 사명은 전체적이며, 따라서 인간 삶의 모든 분야와 관련된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든 종말론적인 지평에서이든, 개인의 내적 삶이든 사회적 삶이든 모든 분야에 그리스도의 구원사명은 작용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시어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셨다. 우리는 그 아들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속박에서 풀려났다."(골로 1, 13-14) 그리스도는 내적 회개에로 인간들을 초대하셨고, 이기주의를 극복케 하셨는데, 그 힘은 인간들이 그리스도와 맺은 새로운 계약, 곧 이웃에 대한 사랑,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 소외 받는 사람들, 박해받는 사람들을 위한 사랑 위에 기초한 계약을 통해서 나타나게 된 것이다. 

 

1.2.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기본적 시각 

 

교회의 사명을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봉사로서의 그리스도의 사명과 비교해 볼 때 교회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명을 끊임없이 구체적으로 실천해 나가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교회의 소망은 성령의 인도로 그리스도 자신이 하시던 일을 계속하려는 것 한가지뿐이다. 진리를 증거하고, 판단하기보다는 구원하며, 봉사를 받기보다는 봉사하러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일을 계속하려는 것뿐이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헌장은 자신의 "완전한 소명"의 실현을 위하여 "인간에 대한 봉사"를 가장 핵심적인 기초로 두면서 교회의 총체적 사명의 틀에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사목헌장 3장은 공의회의 사상 전체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열쇠라고 할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완전한 봉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공의회의 사상을 종합해 볼 때 이 세상에서의 교회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사명처럼 복합적이기는 하지만 '봉사'라는 한 마디로 요약해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는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선포하는 기능으로서의 '복음선포의 기능'을 천직으로 가지고 있으며, 이는 동시에 교회 공동체 내에서 가시적 표지를 통하여 구원을 구체화시키는 '성사적 기능'을 통해서 드러나기도 한다. 교회의 이러한 기능은 곧 교회라고 할 수 있는 공동체 안에 구원을 가져다주는 구체적인 '친교의 기능'이며, 모든 인간과 개별 인간의 해방을 위한 인간에 대한 봉사로서의 '봉사의 기능'인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바탕에서 {교회의 선교활동에 관한 교령}은 교회의 유일하고도 따로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사명으로서 인간들의 현세 생활 안에 그리스도 정신을 불어 넣어주는 성화와 복음화의 사명에 대해서 언급한다. 12항에서는 교회의 목적은 이 땅위에 그리스도의 왕국을 확장시키고, 그리스도의 구원 업적으로부터 드러난 구원에 모든 인간들을 참여시키는 일이라고 강조하고 있으며, 5항에서는 교회의 사명이 펼쳐지는 두 분야에 대해서 언급하고, 6항에서는 첫 번째 분야로서의 복음화와 성화의 분야에 대해 분석하며, 7항에서는 두 번째 분야로서 인간들의 현세 생활이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무장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사목헌장은 {교회의 선교활동에 관한 교령}에서와는 달리 다양한 신학적인 틀을 가지고 현대 세계 안에서의 직접적이고도 우선적인 차원에서의 교회의 사명에 관해 말한다. 사목헌장이 말하고자 하는 강조점은 곧 '인간의 완전한 소명'이며, 이 소명은 하느님의 창조와 관련된 인간적 의무라든가 그리스도의 구원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모든 인간적 가치를 포함한다. 하느님의 창조 계획과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 사이의 일치 그리고 인간 삶의 유일한 목적을 모두 포함하는 이러한 시각은 사목헌장이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 사이의 차이에 큰 비중을 두지 않고, 또 그 구조 자체가 현세 질서와 영적 질서, 사회화와 성화 사이를 구별하는 데 있어서 큰 관심을 갖지 않도록 한다.

 

사실상 사목헌장의 이러한 새로운 시각은 여러 가지 위험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도 인정된다. 교회의 사명이 모든 인간적 가치의 증진을 추구하면서 인간 활동이 이루어지는 각각의 분야와 역사의 모든 영역에서 모든 인간적 가치만을 최고의 가치로 부여하고, 인간의 지상 활동에서 합리성만 추구되고 또한 사회적 및 정치적 구조가 갖는 권한들이 세속적인 기준에서의 합법성만을 고려하게 된다면 교회의 사명이 안고 있는 내면적인 움직임들이 감추어지고, 또한 교회에만 맡겨져 있는 특수한 권한이 소홀히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왜 사목헌장이 인간의 지상에서의 삶에 대해 한 장(章)을 할애하고 있고, 왜 교회의 특수한 권한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사목헌장 42항은 인간의 완전한 소명에 대한 봉사에 교회의 소명이 있다는 점을 강조한 다음에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맡기신 고유의 사명은 정치, 경제, 사회에 관한 것이 아니고 교회에 정해주신 목적은 종교적 질서에 관한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교회의 종교적 사명은 인간의 경제, 사회 및 정치적 삶과의 본질적인 관계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종교적 삶이 인간의 경제-사회-정치적 삶과 결코 분리될 수 없고 따라서 종교적 영역이 인간 삶의 모든 분야에 관련되기 때문에 교회의 사명은 인간 삶의 모든 영역으로 미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의 사명은 인간 삶의 완전한 증진을 위한 봉사이다. 이렇듯이 교회의 사명을 종합해 볼 때, 교회가 인간의 종교적 영역을 위해 봉사한다는 점과 함께 인간의 전체성을 위한 봉사에 전적으로 투신한다는 점이 바로 인간 실존의 모든 분야와 본질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바로 이 점이 공의회가 개방시켜 놓고 있는 문제이며, 또한 실천적인 신학적 반성을 통해 더 심화시키고자 하는 문제이다. 

 

1.3. 회칙 {인간의 구원자}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인간의 구원자}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함으로써 무엇보다도 먼저 교회론을 통해 설명되는 공의회의 기본적인 역할을 인식시키고자 한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가 지녀야 할 본격적이고 보편적인 의식을 형성키 위해 굉장한 작업을 하였고 그것을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당신의 첫 번 회칙에 기술하신 바 있다... 공의회는 이 지구를 여러 종교들로 분포된 한 편의 지도로 우리에게 제시함으로써 교회의 자기 의식을 형성하는데 박차를 가하였다." 

 

{인간의 구원자}는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중점적 역할에 대해서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는데 특히 사목헌장에서 제기된 '시대의 징표들'을 어떻게 인식하고 수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교회의 능동적인 자기 의식을 형성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이런 점에서 회칙 {인간의 구원자}는 오늘날의 사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구원과 교회의 사명이 어떻게 펼쳐져야만 하는지를 꿰뚫고 있는 예언자적 문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회칙 {인간의 구원자}에서는 교회의 창립부터 교회가 떠맡고 있는 사명은 항구히 불변한다는 교회론의 기본적 요소와 교회의 본질적인 역사성이 함께 종합되어 다루어지고 있다. 상황적 요소와 역사성, 그리고 시대성이 일치와 항구성, 그리고 정체성으로서의 교회 사명의 본질적 요소와 통합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현대 세계의 인간 상황을 분석하고 있는 {인간의 구원자} 제 3장은 이 회칙 전체의 이해를 위한 핵심적 열쇠라고 할 수 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현대 세계를 분석하는 데 있어서 사목헌장이 사용하고 있는 일반적인 방법론을 따른다. 곧 일반적인 방법론이란 현상학적, 심리학적, 사회학적, 철학적 및 신학적 방법론이다. 회칙은 이렇게 말한다: "끊임없이 또 급속하게 증가하는 인류 가족의 경험에 비추어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통찰할 때에, 우리는 현대의 교회가 따라가야 할 이 모든 길의 저변에 단 하나의 길이 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가 걸어가야 할 이 길이 바로 인간이라고 강조한다. 이 길은 "교회가 자기의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서 반드시 따라 걸어야 하는 첫째가는 길이다." 왜냐하면 인간이야말로 "그리스도 친히 따라 걸으신 길이며, 변함없이 강생과 구속의 신비 속을 거쳐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강생과 구속의 신비를 통해서 그리스도는 존재론적 의미에서의 인간에 대한 계획을 펼쳐나가셨다. 즉 인간들이 안고 있는 숱한 문제들에 대해 신학적인 해결 방법이라든가 어떤 이상을 펼치신 것이 아니라 인간 삶에 새로운 실재를 부여하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인간에 일치시키신 것이다. {인간의 구원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아무런 예외도 없이 누구나, 심지어 본인이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당신에게 일치시키셨다." 이러한 일치는 인간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영적, 물질적 영역이든 개인적 사회적 영역이든 모든 분야에 있어서 인간으로서 충만하게 자신을 실현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에게 봉사한다는 것, 인간에 대해 결코 소홀히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하자면 교회에 있어서는 "이 일치를 이룩하고 끊임없이 갱신하는 일이 근본 과업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의 생의 여정을 함께 걸으시면서 강생과 구속의 신비에 담겨진 인간과 세계에 대한 진리의 힘과 그 진리에서 비추어 나오는 사랑의 힘을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증가일로에 있는 역사 과정들이 현시점에서 각양각색의 체제들과 이념적인 세계관과 사회조직들의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곳에 어느 면에서 전혀 새롭게 현존하시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명은 시공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지속적인 구원을 중재하는 일이다. 각각의 인간에게 말씀과 구원 사건을 전달하고, 해석하고 상황에 맞게 적용하는 일이 바로 교회가 해야할 일인 것이다. 그래서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의 사명을 인간을 위한 봉사이며, "이 진리야말로 인간에 대한 시간성의 테두리를 넘어설 수 있게 해 주며, 아울러 이 시간성의 차원 내에서 인간의 생명과 인간 정신의 생명에 영향을 끼치는 모든 사물에 각별한 애정과 관심을 쏟을 수 있게 해 준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에 대한 봉사는 '교회의 주된 관심'이며, "교회의 보살핌의 대상은 유일무이하고 반복될 수 없는 인간 실재, 하느님의 모상과 유사성을 그대로 보전하고 있는 인간이며", 이 점이 바로 모든 인간의 착한 목자이신 그리스도 자신의 관심이 됨과 동시에 인간 자신의 요구에 대한 그리스도의 응답인 것이다. 왜냐하면 교황이 강조하는 것처럼 "교회의 이 길은 인간의 현세적 복지와 영원한 복지를 위해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이러한 관심의 밑바닥에는 "모든 면에서 세계를 인간의 고귀한 존엄성에 더욱 부합시키어 인간의 생활을 보다 인간답게" 만들고자 하는 고뇌가 담겨져 있으며, 또한 교회는 "인격의 초월성의 표지요 수호자"라는 자의식도 함께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인간의 구원자}에서 말하고 있고, 또한 교회의 사명이라든가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표현하는데 가장 적절하게 사용되고 있는 '봉사'를 어떤 범주에서 이해해야 되는지를 보도록 하자. 봉사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사명에 대해 특별히 쓰여진 회칙 {인간의 구원자} 21항에서는 이 봉사에 대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그 기초에는 봉사란 "그리스도의 왕다운 사명에 참여하는 것이며... 이 왕직은 그리스도의 모범을 명심하여 남에게 봉사하려는 준비 자세로 표현된다." 따라서 교회의 봉사를 위한 사명은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이신 그리스도의 구원 사명을 완성하는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가장 크게 요구되는 요소이다. 

 

회칙 {인간의 구원자}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일치된 사명이 지니는 이중적 범위는 분리될 수 있는 성질이 결코 아니라고 강조한다. 곧 그리스도의 구원이 지니는 신적 및 인간적 요소가 단순히 그리스도론적 의미만 내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론적 의미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며,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구원은 신적인 가치뿐만 아니라 인간적 가치도 동시에 지향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구원자} 10항에서 언급하듯이 구원 신비의 인간적 요소는 교회의 구원 사명의 인간적 요소와 일치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교회로부터 이루어지는 구원은 인간-하느님, 인간-인간 관계 안에서의 진실된 화해이며, 하느님께 대한 사랑, 인간과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을 통해 가능해진다. 이것이 곧 하느님께 대한 봉사이며, 인간을 위한 봉사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인간의 구원자}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함으로써 교회의 사명은 교회 자신의 종말론적 특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도 간과하지 않는다: "종말론적 신앙에서 영감을 받는 교회는, 인간을 위한, 그의 인간성을 위한, 지구상의 인류의 미래를 위한, 따라서 개발과 진보의 전체 과정을 위한 염려가 교회 사명의 본질적이고 떼낼 수 없는 요소라고 간주한다. 교회는 이 염려의 원리원칙을 복음이 증언하는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아낸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명은 초월적이며, 종말론적이며, 동시에 이 세상 안에서 지속된다. 시대성-종말론의 관계는 교회의 구원 사명의 내부에 자리잡지만, 교회는 본질적으로 세상을 초월하는 동시에 세상 안에 있으며, 역사와 꾸준히 함께 하면서 종말론적 특성과 현실적 특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으며,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적 구원이 지니는 이 세상에 대한 초월적 요소와 내재적 요소 사이의 긴장 관계, 다시 말해서 인간을 하느님과 종말론의 관계에서 바라보는 구원과 역사성과 시대성, 그리고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구원 사이의 긴장 관계를 극복하게 된다. 

 

1.4.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의 사명 

 

요한 바오로 2세는 1987년에 반포한 회칙 {사회적 관심}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우선적인 선택 혹은 사랑'에 대해 국제적인 시각에서 언급한다. 이 가난한 이들을 위한 특별한 선택에 관한 주제는 요한 바오로 2세가 1979년 1월 멕시코의 과달라하라를 방문하여 자포판(Zapopan)의 성모 마리아 대성전에서 행하신 강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교황은 이렇게 말한다: "... 다른 사람들을 위한 명백한 의무, 특별히 가난하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한 명백한 의무, 사회를 변화시켜야 할 명백한 의무는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이를 위해 우리 모두를 초대하십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에 대해 복음은 강조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인 선택 혹은 사랑'이 지니는 깊은 의미는 실상 현실적인 통치에 있어서 자율적인 힘을 갖지 못한 특정한 문화적 상황에 처해 있는 국가라든가 민족들을 고려하면서 보내는 몸짓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한 문화적 상황, 곧 전형적인 현대화의 과정에 있고, 민중들이 의식화되어 가는 과정에서의 상황에서 가난한 사람은 일종의 제도적인 예외에 속하게 되며, 정책 안으로 흡수되지 못하고 만다. 당연히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우선적인 선택은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며, 소외와 결핍을 극복하기 위한 선택이다. 가난한 이들은 자율적인 힘에 있어서 부유한 사람들과 비교하여 열악하며, 권리를 행사함으로써 스스로를 실현시킬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소명을 실현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방법과 수단을 사용하지 못하거나 장애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이 존재한다면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인 선택, 사랑'은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억압받고 있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받아들이고, 건강을 위한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건강을 돌려주는 등의 숭고한 가치로서 높이 평가되어야만 한다. 이런 의미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우선적인 선택'을 호소하는 요한 바오로 2세의 초대는 곧 '인간적 품위를 잃고 사는 사람들을 위한 인본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적 삶을 비참하게 하는 모습으로서의 가난에 대항해야 할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지워져 있다는 데서부터 가난이 인본주의적 문화의 한 상징적 가치를 드러낸다는 새로운 문화의 전망이 열린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우리의 문화를 형성시킨 역사적 변천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가질 것을 강조한다. 인간은 이제 자신의 재능이 자신의 고유한 목적을 규명하고 거기에 순응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였다. 그렇지만 재능을 발견하고 사용한다는 것은 어쩌면 문화가 가져다주는 혜택이다. 그런데 그러한 문화가 결과적으로 인간을 위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면 결국 인간 자신이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의 기술적 진보에서 이러한 모습을 본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신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여러분은 굶주리고 헐벗고, 살아갈 모든 수단을 잃고 헤메이는 사람들, 그리고 문화가 주는 혜택을 전혀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커다란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복음서의 풍요로운 말씀에 의하면 가난은 모든 인간이 지향하는 덕(德)이다. 그렇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아무에게도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소외와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의 비참함으로부터 끌어내어 그들 자신의 처지를 해방시키는 일은 의심의 여지없이 필요하다. 그러나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있어서는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교황은 1979년 푸에블라에서 개최되었던 제 3차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 총회 개막 연설에서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를 정확히 끄집어내고 있다: "국제 생활에서도 우리는 윤리 원칙과 정의의 요구, 사랑이라는 첫째가는 계명에다 호소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윤리적인 것, 영적인 것, 인간에 대한 완전한 진리에서 흘러나오는 것에다 우선권을 부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황의 이러한 통찰은 자신의 완전한 인본주의를 향한 장엄한 서언이며, 하나의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있어서는 분명 가난한 사람들은 우선적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가난한 사람들을 향하는 교황의 열정적 관심은 다음의 문장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 본인은 여러분과 굳게 결합되어 있음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가난하기 때문에 본인의 특별한 관심을 끌 권리가 있기 때문이며, 여러분은 누구보다도 더 특별히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자신도 교회를 창립하면서 가난하고 힘없는 인류를 끌어 안으셨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가난하게 태어나셨고, 또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사셨던 예수를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의 가난을 통해 우리 인류를 부유하게 하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2고린 8,9 참조)" 

 

이렇게 볼 때 교회는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신비와는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예수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를 요구하는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렇게 말한다: "교회는 인간을 도와주고 인간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의무와 노력에서 제 삼자일 수 없습니다. 인간이 고통을 겪고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그 고통받는 사람의 자리에 그리스도가 있으며 (마태 25,31-45 참조), 인간이 고통을 겪고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그 옆에는 항상 교회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가 인간에 대한 신비와 인간 소명에 대한 몫을 교회에 부여함으로써 교회가 떠맡아야 할 인간에 대한 사명은 사실상 훨씬 더 근본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교회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기본적인 권리와 의무에 대해 항상 깨어 있어야 하며, "인간 존재의 존엄성에 부합하는 권리 전체를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곧 영적인 영역이든 물질적인 영역이든 전혀 변형시키는 일없이 존중해야만 한다.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들은 인간으로서의 본질적인 요구를 위한 것이며, 인간으로서의 참된 자유를 누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인간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요구된다. 그러나 그러한 권리들은 항상 그리고 어디서나 인간과 관련되며, 충만한 인간적 삶을 위한 것이다." 

 

실제로 국내외적인 모든 지평에서, 모든 사회 단체, 모든 사회 구조에서 인간,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의 참된 증진을 위한 새로운 실재와 이를 위한 새로운 움직임이 요구된다. 이러한 요구 앞에서 가난한 이들과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교회의 임무는 무엇보다도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하여 강조할 수 있겠다. 

 

1)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존중에 헌신하는 일. 

 

2) 가난한 사람들, 비 그리스도인, 인간다운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들, 또한 그러한 상황에 처해있는 민족들을 복음화 시키는 일. 복음화를 통해 이러한 외침이 현실화되도록 인간들의 책임있는 투신을 시발점으로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고, 복음화를 통해서 정치와 경제의 체제를 인간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3) 교회는 교육과 활동을 위해 소중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 이 노력은 특별히 평신도의 영역이다. 평신도를 밀쳐내는 일을 피하는 일, 평신도의 존재 이유를 보전하면서 특정한 방법으로 그들을 대신할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4) 교회는 교회 스스로가 내부적으로 지니고 있는 거대한 선(善)에 대해 늘 자각할 수 있도록 항상 인간들과 그들의 공동체를 돕는 일에 헌신해야 하며, 그럼으로써 인간들로 하여금 새로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특별히 정의와 사랑을 필요로 하는 시대이다. 이 세상에서 교회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그리스도 자신이며, 따라서 교회는 인간들을 위한 참 인간이신 그리스도께 충성을 다 한다. 그리스도는 길이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인간의 길을 걸어가셨다. 인간은 인간을 위해 희생되셨고, 인간을 위해 이웃을 위한 사랑의 법으로서의 새로운 계명을 주신 그리스도의 길이다. 이웃은 곧 그리스도 자신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너희가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서로 상관 관계에 있는 것이다. 이웃 사랑이란 우선적으로 인간에 대한 의무들을 실천하는데서 드러나며, 이러한 사랑의 정신에서부터 정의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사랑과 정의가 이렇듯이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듯이 참된 정의를 위한 길은 결코 사랑의 길과 다르지 않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콜롬비아의 주교들과의 담화에서 정의가 곧 그리스도인의 행동 양식이라고 말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참된 희망을 주도록 하십시오. 그들은 초자연적인 희망만을 가지면서 교회만 쳐다보고 있으며, 교회만이 유일하게 자신들을 보호해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발표하는 교서들을 통해서 그들에게 참된 해방과 희망의 길을 열어 주도록 하십시오. 그것이 곧 정의를 위한 행동 안에서 드러나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교회는 진실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가 되어야 하며, 그들에게 자신들의 비참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참된 희망을 심어줄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는 각각의 인간들의 교회보다 더 우선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사랑과 정의의 실천을 통하여 우선적으로 자신의 심장 안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야 하며, 이것이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인간의 길을 걷는 교회의 참된 모습을 위한 기초가 될 것이다. 

 

 

2. 교회의 사명 : 하느님 자비에 대한 봉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주제는 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기 위한 중요한 주제가 된다. 이미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교황은 {인간의 구원자}에서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인간의 소명에 대한 커다란 관심과 염려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성부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한 삶을 사셨던 그리스도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며, 더 근본적으로는 "이 사랑의 계시가 자비이며, 인간의 역사에서 이 사랑과 자비의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체적인 형상과 이름을 취했다"고 강조한다. 

 

교회는 인간과 통교하는 하느님 자비의 살아있는 계시이며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떠나지 못한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부를 보며(요한 12,45; 14,9 참조)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만나게 된다. 성부 또한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비로우신 사랑으로서의 당신 자신을 알려 주시기 때문에 교회는 "세상의 구원자로서 인간을 인간에게 완전히 드러내 보여주시는 그리스도께 마음을 여는 이 개방의 완전한 성취를 위해 항상 보다 성숙하게 성부와 그분의 사랑에 결속되어야만 한다." 결국 교회의 사명이 인간을 중심으로 삼으면 삼을수록 그 사명은 하느님 본위로 강화되고 구현될 것이며, 따라서 신본사상과 인본사상은 분리되고 대립될 수가 없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서 이 두 가지 사상을 인간 역사 안에다 유기적으로 융합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교회는 하느님의 자비를 선포하며, 이는 곧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과 모든 인간을 위한 임무이다. 교회의 이러한 임무를 통하여 인간은 하느님의 자비를 위해 봉사하는 존재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이 하느님 자비의 선포는 교회의 사명이 지니는 여러 영역 중에서 다른 것들과는 현저히 구분되는 일종의 인호이며, 기본 표지가 되는 것이다. 

 

2.1. 인간의 회개와 교회의 사명 

 

교회는 하느님 자비 선포와 인간을 회개에로 이끄는 사명 안에서 자신의 고유한 실존과 생동감을 체험하며, 동시에 끊임없이 그리스도로부터 도움을 받는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과 소명을 구체화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여하한 이유가 있더라도 자기 자신 속으로 폐쇄되어 들어가서는 안되며... 교회의 존재 명분은 하느님을 계시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교회는 이 사랑을 구체적으로 생활함으로써 하느님을 죄가 존재하는 이 세상에 드러내며, 따라서 사랑이신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자비로 드러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그 사랑의 가장 깊은 진리뿐만 아니라 인간의 현세적 고향인 세계의 내면적 진리와도 통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비의 하느님, 자애로우신 사랑의 하느님께 관한 올바른 지식은 항구하고 무진장한 회개의 원천이 된다. 회개가 순간적인 내적 행위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인 자세가 되고 정신 상태가 되게 하는 원천"이 된다. 

 

회개를 통해서 인간은 은총의 선물을 받게 되고, "새로운 피조물"(갈라 6,15; 2고린 5,17 참조)이 됨으로써 내적 변화를 체험한다. 회개란 단순히 죄만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은총의 선물을 가져다주고,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당신의 지체들과 이루는 친교인 신적 생활 안에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를 통해서 드러난다. 그리스도의 몸은 교회의 핵심적 신비이며,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의 계시이며 실현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자비로우신 하느님}에서 이렇게 언급한다: "제 아무리 그 시선이 깊고 동정에 가득찬 것이라 할지라도 윤리적, 물리적 또는 물질적 악을 기만하는 데에 자비의 참 뜻이 있지는 않다. 세계와 인간에게 존재하는 온갖 형태의 악으로부터 자비가 선을 이끌어내고 선을 촉진하고 회복시켜줄 때에, 자비는 그 진면모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자비야말로 그리스도의 신비를 통해서 인간의 존엄성을 드러내주고 고양시켜 주는 그리스도 사명의 본질적 능력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신의 사명에 있어서 하느님의 자비를 증언해야 할 필요를 각별히 깊이 의식하지 않으면 안된다. 교회는 성부 오른편에 영광스럽게 자리하시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과의 일치를 통해서 그분의 사명 전체에서 계시된 하느님의 자비를 증언하지 않으면 안된다. 곧 교회는 자비를 고백하고 선포할 적에 본연의 삶을 사는 것이다. 자비가 창조주와 구세주의 가장 놀라운 속성이기 때문이다. 

 

교황은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를 통해 설명하면서 참된 회개란 창조주이시요 아버지만이 보여주실 수 있는 사랑을 발견하는 데서부터 가능하다고 말한다. 마음과 정신을 변화시키는 회개는 참된 변형이며, 바로 그리스도의 삶에 참여하기 위한 준비이며, 동시에 하느님 자비라는 선물을 통해 죄를 용서받기 위한 조건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위해 자신이 먼저 회개해야 하며 그럼으로써 하느님 자비를 고백하고 선포해야 한다. 이렇게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나라에 참여하기를 부르시는 인간에게 열려있는 존재가 될 것이며, 그것이 자신의 사명에 충실히 머무르는 것이다. 

 

2.2. 인간의 존엄성과 교회의 사명 

 

요한 바오로 2세는 현대의 사고방식이 과거 인간들의 사고방식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는 점을 염려한다. 곧 현대인들은 구원과 자비의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과거보다는 훨씬 더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교황은 이렇게 말한다: "역사상 전대미문의 과학과, 기술의 거대한 발달을 맞아 땅의 주인이 되고 땅을 굴복시켜 다스리게 된 인간에게는 자비라는 말과 개념이 매우 거북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땅에 대한 이 지배를 흔히 피상적으로 알아들음으로써 거기에는 자비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교황은 현대 인간이 하느님과 상치되어 있음을 직시하고 있으며, 나아가 이러한 대립이 이 세상에서 매우 심각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염려하고 있는 것이다. 

 

인류는 자신의 역사에 있어서 사실상 스스로를 가장 중요한 주인공으로 생각하면서 국제적인 연대와 협력과 사회화로 특징지어지는 정치, 사회적 및 경제적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러한 노력은 인류 공동의 노력이었으며 인류 전체는 물론 각각의 개인의 권리와도 밀접히 관련되면서 인간 고유의 존엄성을 확립하고 계발하는데 기여해 왔다고도 볼 수 있다. 인류 모두가 관심을 갖는 이러한 인간의 존엄성은 사실상 세계적 지평에서 하느님의 의도에 상응하는(창세 1,28 참조) 하나의 인간적 공존을 요구한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는 인간들이 고통받는 심각한 불균형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인간의 존엄성 확립이란 아득히 먼 외침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말하듯이 현대 세계는 "강하면서도 약하고 최대의 선을 다할 수 있고 최대의 악을 저지를 수도 있으며, 자유와 예속, 진보와 퇴보, 사랑과 증오의 문이 동시에 열려있다." 이러한 현실은 실제로 인간과 인간 사이에,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 사이에 심각한 불균형으로 치닫게 되었으며, 실상 인간은 현대 세계의 실재 안에서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의 고유한 존엄성이 짓밟혀 왔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현대 세계의 실재 안에서 인간은 자유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노예로 남을 것인가의 선택에서 자신을 역사를 올바로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윤리적 능력으로써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요한 바오로 2세는 현대 세계의 인간과 하느님의 자비 사이의 관계를 깊이 성찰함으로써 각각의 인간들이 긴급한 호소에 귀를 기울인다. 교황은 현대 세계 안에서 보여지는 내적 인간 관계 안에서 우선적으로 진리의 위기를 느끼며, 인간과 인간 사이를 가능하게 하는 사고가 철저히 공리주의적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있으며, 참된 공동선의 의미가 점점 퇴색되어 가고 있음을 감지한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인간 존엄성에 대한 존중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대 세계에서의 인간 위기에 대해 요한 바오로 2세는 역설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인간에게 닥치고 있는 현대의 위협들로 미루어 볼 때에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자비의 하느님', 하느님의 신비야말로 교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유일무이한 호소가 된다." 

 

현대 사회의 인간은 자신의 인격에 대한 존엄성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데에는 매우 민감한데 결국 이러한 존중을 위해서는 하느님의 자비가 요청될 수밖에 없다. 굳이 하느님의 자비라고 말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가까이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사랑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며, 특별히 물리적이든 윤리적이든 자신의 연약함이라든가 한계성이라는 역사적 조건들을 체험할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사목헌장은 이러한 현대의 인간을 다음과 같이 잘 분석하고 있다: "인간은 한편으로는 피조물로서 여러 가지 제한성을 체험하면서도 다른 편으로는 제 욕망에 있어서 제한을 받지 않을뿐더러 보다 고차적인 생명에로 불리웠음을 느낀다. 인간은 또한 여러 가지 유혹 속에서 언제나 취사선택을 강요당한다. 더구나 인간은 약하고 또 죄인이므로 원치 않는 일을 행하고 원하는 일을 행치 않는 수도 드물지 않다. 요컨대 인간은 자신 안에서 이미 분열을 겪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사회의 많은 불화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렇듯이 연약하고 제한된 인간 조건 때문에 하느님의 자비가 요청되는 것이며, 곧 하느님의 자비는 인간 존엄성을 위한 신뢰와 존중을 밝혀 드러내준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로부터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하느님의 자비를 선포하는 일에 결코 미온적일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교회는 함께 있어야 하며 인간을 향한 교회의 길은 계속되어야 한다. 어떤 민족 어떤 문화에서라도 교회의 이러한 사명은 즉각적으로 실천되어야 한다. 어느 누구도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들을 보호하고 방어하는 일에 이방인일 수 없으며, 인간의 충만한 인격성 고양과 인간 자체의 가치를 보호하고 방어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사실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노력에서 교회와 경쟁할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2.3. 정의와 교회의 사명 

 

요한 바오로 2세는 자비와 정의 사이의 관계에 대해 매우 훌륭한 가르침을 준다. 이 문제는 복음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교회가 사회 생활에 관해 가르치는 사회교리의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곧 자비는 정의를 구체화하는 것이며, 정의에다 보다 완전한 내면적 내용을 제공해 준다. 

 

특별히 현대 세계는 인간적 관계의 다양성 안에서 정의가 내포하는 깊은 의미를 깊이 인식해야만 하며, 이 의미에 대해서는 교회의 해석이 필요하다. 요한 바오로 2세가 말하는 바와 같이 "교회는 모든 면에서 정의로운 생활을 바라는 현대인의 이 깊고도 열렬한 소망을 함께 나누며, 인간과 사회의 생활에 요구되는 정의의 여러 측면을 진지하게 검토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지난 한 세기 동안에 커다란 발전을 본 가톨릭 사회교리 분야로 미루어 이를 알 수 있다. 이 가르침의 노선에 입각하여 정의의 정신에 의거한 인간 양심의 교육과 형성이 나오고, 같은 정신으로 전개되고 있는 개별 활동, 특히 평신도 사도직 영역의 활동이 나오는 중이다." 

 

정의에 관한 가톨릭 교회의 사회교리가 오늘날까지 계속 발전되었다는 교황의 언급은 매우 흥미롭다. 현대 사회로의 발전 과정에 있어서 정의에 관한 문제는 숱하게 많은 문제점을 지녀왔다는 교회의 성찰이기도 하다. 실상 지난 한 세기의 역사를 통해서 이 문제는 항상 새로운 문제점을 제기하였으며, 그때마다 교회는 사회 안에서의 그리스도교적 해석을 제공해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정의에 관한 가톨릭 사회교리는 최소한 역사, 문화 및 주변적 여건과 연결된 세계에 대해 체계적이고도 완전한 시각을 가지고 실천되었다기 보다는 시대에 따라서, 그리고 다양한 사회, 경제, 정치 및 문화적 조건에 따라서 그때 그때마다 구체적인 응답을 주는 교의적 지침이나 원리로서 실천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교회가 해석하는 정의는 무엇보다도 이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로부터 계시된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충실한 증거의 고양을 위한 교회의 특별한 임무라는 자리를 차지한다. 교회는 하느님의 자비가 "구원을 주는 신앙의 진리"임을 고백함으로써 이 임무를 수행하게 되며, 이는 "신자들의 생활에, 또 가능하다면 선의의 모든 인간들의 생활에 하느님의 자비를 이끌어들이고 육화시키고자 노력"하면서 하느님의 자비가 "신앙과 조화된 삶을 영위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것"임을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결국 교회는 "물리적 윤리적 악의 모든 출현 앞에서, 오늘날 인류생활의 지평선을 덮고 있는 온갖 위협 앞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부르짖어야 한다." 

 

바로 여기서부터 교회의 모든 사명의 전권을 부여하는 한 계획, 곧 교회의 법적 구조가 정의의 중요한 도구가 될 뿐만 아니라 정의와 평등, 나아가 애덕과 하느님 자비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근본적 요청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겠다. 특히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문제에 대해 "교회의 임무와 인류 역사를 통해 교회가 기여한 일이라고 말할 있는 것은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라도 인간의 기본적 권리들을 선포했고 보호했다는 것이다. 교회는 이 세상 안에서 정의의 거울이 될 의무를 지닌다. 교회는 바로 이 문제에 대해서 고유하고도 특별한 책임이 있다"고 강조한다. 

 

그렇지만 교회의 사명에 대해서 교회의 법적 구조가 작용하는 범위는 교회의 사명을 계획하고 실행하기 위한 활동 구조 안에서 그 정당성을 찾아볼 수밖에 없다.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자비로우신 하느님}에서도 정의를 위한 법적 구조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는다. 신자들과 전체 인류의 생활 안에 하느님의 자비를 끌어들이는 노력이 교회의 사명에 맡겨져 있는 것이며, 법적인 측면에서도 이러한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12항은 아주 짧지만 분명하게 법과 정의, 정의와 자비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지난 수세기 동안 서구적 사고를 통해 발전된 법과 정의의 주제들은 하느님의 자비가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에서만 다루어진 것이라기 보다는 더 나아가서 인간과 인간사이의 관계까지도 다루어져 왔으며, 또한 하느님의 자비-사랑은 하느님의 모상과 유사성에 따라 만들어진 인간에 대한 명확한 이해에서부터 출발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의 가르침을 정확히 직시할 때 정의에 관한 주제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완전성 안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에 대한 가르침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이는 '시대의 징표들'을 말해주고 '시대의 징표들'을 읽는 가운데 인간의 존엄성의 고양을 위한 정확한 인식을 촉구하는 요한 바오로 2세의 관심 그 자체를 그대로 드러내 보여준다. 인간은 갈등과 분열, 불의의 현실 앞에서 자신의 구원을 열망하고, 참된 해방을 위해 고뇌하지만 그러한 계획을 구체화하고 현실화시키는 데에는 무력한 존재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현대인간은 날로 더 익명화되고 지배적이 되며, 한편으로는 폭력적이 되어가는 현실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 바오로 2세가 이렇듯이 현대의 인간에 대해 커다란 관심을 보이는 바와 같이, 교회 역시 현대의 인간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선포하면서, 가장 탁월한 정의의 모범이 되어야 하며, 결과적으로는 사회의 다양한 분야 안에서, 특히 교회 공동체, 정치 공동체 안에서 자비와 평등, 정의를 위한 구체적인 도구가 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서 교회는 매일의 일상에서 하느님 자비를 구체화시키기 위해 그리스도인의 정신을 고양시키고 확장시킴으로써 이 사회에 그리스도적 삶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인간과 인간의 인간다운 삶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는 이 시대에 교회가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인간의 구원자}에서 우리 모두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인간과 사회에 대해 안고 있는 특별한 질문에 대해 응답하기 위하여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을 계승, 발전시키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충만하게 계시된 신적 조명으로써 인간에 관한 참된 진리에 관한 예리한 분석을 시도하였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이러한 관심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가 따라야 할 가장 중요한 길이며, 그분은 아버지의 집에 이르는 길이시며 각 사람에게 도달하는 길이시다." 교회는 모든 구성원이 그리스도의 모범을 스스로의 삶을 통하여 실현시키며, 그분을 진리와 생명의 길로 인식하기 때문이다.(요한 14,6참조)

 

요한 바오로 2세의 두 번째 회칙 {자비로우신 하느님}은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각각의 인간은 교회가 걸어가야만 하는 한 길이며, 이 길은 모든 인간에 대한 성부의 무한한 사랑과 성부 자신을 탁월한 방법으로 계시하시는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길이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인간에게로 향하는 이 길은 동시에 성부께로 인도하는 길이며, 성부의 신적 사랑의 경험을 그대로 행하도록 촉구하는 길이다. 결국 신본주의와 인본주의 사이의 구별은 더 이상 없게된다. 

 

결국 인간에 대한 온갖 위협이 상존하는 현대 세계 안에서 이 길은 온전히 하느님의 자비에 맡겨져 있으며, 따라서 인간에 대한 신비를 밝혀준 예수 안에서 그리고 예수로부터 계시된 하느님 자비와 사랑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의 대상이 된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느님 자비와 사랑의 원천들을 보호해야만 하는 일차적인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은 인간과 이 세상의 완전한 구원을 위한 유일한 길이시다. 그리고 각각의 인간은 온전한 자유와 정의, 견고한 연대로써 이 길을 걸어가도록 불리움을 받았다. 비록 이러한 길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리스도는 그와 함께 계신다. 그리스도가 완전한 구원을 실현하기 위하여 인간의 길이 된다는 것이 진실이라면 그리스도께 가까이 다가가고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교회는 인간에게 온전히 봉사하신 삶을 사신 그리스도의 길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는 것도 진실이다. 

 

마지막으로 요한 바오로 2세가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마지막 장에서 강조하는, 교회의 사명을 위해서 가장 기본이 된다고 할 수 있는 한 문장을 소개한다: "십자가에 달리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분의 메시아적 사명의 정신으로 인류 역사에 임하고 있는 우리는 소리를 높여 기도한다. 아버지 안에 계시는 사랑이 역사의 이 시점에 다시 한 번 계시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아들과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그 사랑이 우리가 사는 현대 세계에 현존함을 보여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그 사랑이 악보다 강함을 죄와 죽음보다 강함을 보여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은 대대로 자비를 베푸십니다'라는 말씀을 끊일 줄 모르시는 성모의 전구를 통해서,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 5,7)라는 산상 설교의 말씀을 그대로 이룬 분들의 전구를 통해서 이 기도를 올린다." 

 

[가톨릭 신학과 사상, 제17호(1996년 가을, 가톨릭대학교 출판부), 이동익(가톨릭대학교 교수, 신부, 윤리신학) / 이동익 신부님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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