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미술ㅣ교회건축

성당 건축 이야기29-30: 하기아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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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7-25 ㅣ No.983

[김광현 교수의 성당 건축 이야기] (29) 하기아 소피아 (상)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그 자체가 기적인 비잔티움 건축물

 

 

하기아 소피아 내부. 출처=Piotr Redlinski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물 중 하나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는 튀르키예어로는 아야 소피아(Ayasofya), 라틴어로는 상크타 소피아 또는 상크타 사피엔자(Sancta Sophia, Sancta Sapientia)다. 그리스어로 하기아 소피아라 부르는 것은 325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새 수도를 옮기고 라틴어가 아닌 고전 그리스어로 불렀기 때문이다. ‘거룩한 지혜’라는 뜻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1코린 1,25)

 

하기아 소피아는 이스탄불에 있는 중요한 비잔티움 건축물일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의 하나다. 이것은 6세기(532~537) 유스티아누스 1세 때 콘스탄티노플(현재 이스탄불)에 건설된 그리스도교 성당으로 지어졌다. 보스포러스 해협을 내려다보는 높은 곳에 선 아름다운 성당의 둥근 지붕은 도시 경관의 중심이었다.

 

360년경에서 1204년까지는 정교회 대성당이었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에 의해 약탈당했다. 많은 비잔틴 모자이크가 베니스로 옮겨졌고 1261년까지 로마 가톨릭 성당이 되었다. 다시 1261년에서 1453까지는 정교회 대성당이었다. 그러다가 1453년에서 1934년까지는 모스크로, 1935년에서 2020년까지는 박물관으로 쓰였으나, 2020년부터는 다시 모스크가 되었다. 이렇게 하기아 소피아는 수 세기에 걸친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종교적 변화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하기아 소피아가 있는 땅에는 본래 이교도 사원의 기초가 있었다. 325년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에는 그 위에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을 건설하라고 명령했다. 그의 아들 콘스탄티우스 2세가 350년경에 짓기 시작하여 360년에 도시 최초의 대성당을 봉헌했다. 지붕을 목재로 짠 일반적인 바실리카식의 성당인 마그나 에클레시아(Magna Ecclesia, Great Church)였다. 그러나 이 성당은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였던 성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모스가 두 번째로 추방된 뒤, 잇따라 일어난 폭동 중에 발생한 화재로 404년에 손상을 입었다. 콘스탄스 1세는 이를 확대하여 두 번째 성당을 다시 지었고, 415년에 테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다시 봉헌되었다. 그러나 532년 1월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에 대해 시민이 일으킨 1주일간의 니카(Nika, 그리스어로 ‘정복’) 반란으로 황제 궁전 일부, 하기아 이레네 성당과 함께 하기아 소피아 성당은 다시 불타버렸다.

 

하기아 소피아 외관. 출처=Burak Kara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종교적 변화 겪어

 

폭동을 진압한 지 불과 39일 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도시를 재건되기 시작하면서 제국의 위신을 되찾기 위해 완전히 새롭고 이전의 두 성당을 훨씬 능가하는 대규모의 장려(壯麗)한 세 번째 성당을 짓고자 했다. 이번에는 화재에 잘 견디도록 불연화한 석조나 벽돌로 만들게 했다. 지금처럼 중랑(中廊)의 스팬이 33m나 되는 거대한 성당에서는 목조의 트러스로는 불가능했으므로, 조적조의 아치나 볼트, 돔의 기술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소아시아에서 온 안테미우스(Anthemius)와 이시도루스(Isidorus)에게 계획과 공사를 맡겼다. 이들은 이교도였다. 더구나 그들은 건축가가 아니라 기술자로 기록되어 있다. 그때까지 본 적도 없는 대담한 구조물을 실현하려면 건축가보다 기술가가 더 어울렸기 때문이다. 이것은 수정궁을 설계한 조셉 팩스톤, 에펠탑을 설계한 귀스타브 에펠과 같은 엔지니어가 근대 건축을 본격적으로 연 것과 비슷하다.

 

이때 건설노동자 1만여 명과 현장 감독 100명이 일했으며, 감독 한 명이 100명을 맡아 현장 지휘하게 했다. 또 이들을 반으로 나눠 각각 건물의 오른쪽과 왼쪽에서 맡아 경쟁적으로 일하게 했다. 이렇게 하여 저 거대한 성당은 불과 5년 11개월에 완공되었다.

 

하기아 소피아는 양쪽의 측랑을 열주랑으로 분리한 3랑식 바실리카인데, 건물의 가로 세로는 73mx82m이다. 중랑 위 중앙에는 지름 약 31m, 높이 56m인 거대한 돔을 얹었다. 336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는 당시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돔이다. 그래서 이 돔은 하느님께서 한 천사를 시켜 지어지도록 이끄셨다고 한다. 이런 거대한 중랑 위 중앙에 돔을 얹고, 돔의 동서 방향으로는 반(半) 돔을 얹어 중랑(中廊)을 확장했다. 이로써 중심형이면서 동서의 축이 강조된 장축형이기도 한 비잔티움의 걸작이 되었다.

 

판테온은 원형 평면에 원형 돔이 올라가지만, 하기아 소피아는 정사각형 평면에 원형의 돔이 얹혀 있다. 사각형의 네 변은 아치가 받치게 되는데, 그러면 아치의 원호와 돔 평면의 원호 사이에는 정사각형 평면에 외접하듯이 올라가는 삼각 곡면이 생긴다. 이것이 펜덴티브(pendentive)다. ‘매달려 있다’는 말에서 나온 용어다.

 

전설에 의하면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537년 이 성당을 봉헌하며 약 1500년 전에 지은 첫 번째 예루살렘 성전을 언급하면서 “오, 솔로몬이여! 내가 당신을 능가했습니다”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얼마나 큰지 그 장려한 돔 아래에서 전례에 봉사하는 이들은 성가대를 포함하여 525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그의 자랑은 불과 몇십 년밖에 가지 않았다.

 

- 하기아 소피아 평면. 출처=Wikimedia Commons

 

 

아름답고 장대하며 과감한 성당 건축물

 

553년에 지진으로 동쪽 아치의 머리가 약해졌다. 4년 뒤 557년 지진이 있었으나 부서진 곳을 수리하는 데 실패했다. 이듬해인 558년에 동쪽 대(大) 아치와 반 돔이 무너졌고, 중앙 돔은 절반쯤이 내려앉았다. 곧바로 재건 공사를 시작했으나 남아 있던 돔의 서쪽 부분도 주저앉았다. 이 무렵 안테미우스와 이시도루스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이시도루스의 조카인 같은 이름의 이시드루스라는 건축가(?)가 돔 전체를 다시 만들면서, 돔의 추력을 줄이기 위해 높이를 6.4m로 높이고, 40개의 리브를 추가하며 반원에 가까운 돔을 만들었다. 돔은 단단한 돌이나 콘크리트보다 더 가볍고 가소성이 강한 벽돌 골재로 건설했다.

 

4년 후인 562년에 복원되었다. 돔 베이스에는 40개의 창문을 뚫었다. 모자이크로 가득 찬 돔은 이 창을 통해 들어온 빛으로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건물 전체를 6년에 지었던 것이 비하면 새로운 돔을 정말 신중하게 얹었다. 다만 돔의 추력에 견디도록 육중한 석조 버팀벽이 추가되어, 외관은 산을 마주 대하듯이 대단히 무겁다. 이 돔은 10세기에 발생한 두 번의 지진으로 다시 손상을 입었는데, 아르메니아 건축가 트르다트(Trdat, 940~1020)가 이를 고쳤다.

 

하기아 소피아는 아름답고 장대하며 과감한 성당이다. 그러나 바로 그 과감함 때문에 구조 설계에 무리가 있었고, 황제가 준공 시기를 서둘러서 공사를 강행한 탓에 무리를 거듭하며 지어졌다. 그러니 하기아 소피아가 오늘날에 남아 있는 것은 그 자체가 기적이다.

 

그런 하기아 소피아가 1453년 이슬람 모스크가 되었고 같은 해에 도시는 이스탄불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때 하기아 소피아에서 전례에 참석한 마지막 회중의 탄식은 어떠했을까? 그러다가 2020년 7월 24일 금요일 85년 만에 도시 새벽을 깨우는 무슬림의 기도 소리가 다시 퍼지기 시작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7월 23일, 김광현 안드레아(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

 

 

[김광현 교수의 성당 건축 이야기] (30) 하기아 소피아 (하)


하늘에 매달려 있는 듯 ‘빛의 링’ 위에 떠 있는 거대한 돔

 

 

하기아 소피아의 돔. 출처=the byzantine legacy

 

 

축과 중심을 한 공간 안에서 완벽하게 통합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은 537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완성되었다. 이 성당은 돔을 씌운 공간에 대한 엄청난 실험이었다. 평면으로 보면 전형적인 축성(軸性)을 가진 바실리카식 성당이다. 그러나 실제로 안을 걸어보면 거대한 돔이 강력한 공간의 중심성이 전체를 압도한다. 이처럼 하기아 소피아는 축과 중심이라는 서로 대치되는 성질을 한 공간 안에서 완벽하게 통합한 대단한 성당이었다.

 

평면은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 직사각형이다. 그 중앙에는 네 개의 육중한 피어(pier)가 정사각형을 그리며 서 있다. 북쪽과 남쪽으로는 피어 사이에 아치가 5개인 아케이드 열주랑이 서 있다. 제대와 열주랑, 출입문과 열주랑 사이에는 반원형으로 물러서 있으면서 그 위는 반 돔이 덮고 있는 공간이 있다. 이를 ‘엑세드라(exedra)’라 한다. 이 엑세드라에는 각각 아치가 3개인 아케이드가 붙어 있다. 동쪽의 두 엑세드라 사이에는 초점이 되는 반원 제단이 놓여 있어 곡면은 계속 이어져 있다. 이렇게 하여 제단을 향해 걸어가면 시각적으로 피어와 열주랑은 뒤로 물러나고, 대신 반원 제단은 앞에서 다가온다. 이때 엑세드라는 좌우로 퍼지는 듯이 보인다. 평면은 전형적인 바실리카식인데도 움직임에 따라 공간은 파동하는 듯한 효과를 보여준다.

 

그러나 성당 안에 들어서는 순간, 눈은 곧바로 위로 이끌린다. 결국 이 성당을 지배하는 것은 위를 덮고 있는 거대한 돔이다. 이런 수직성은 건축적으로 네 단계를 거친다. 우선 바닥에서는 열주랑이 보인다. 그 위의 2층에는 난간이 있는 갤러리가 있다. 다시 그 위로 측면에서는 커다란 아치가, 제단 쪽에서는 반 돔이 이어진다. 이 커다란 아치와 반 돔 사이에는 펜덴티브(pendentive)가 있다. 모두 돔의 추력(推力)에 대항하기 위함이다. 최종적으로 원형 돔이 위를 덮고 있다.

 

그런데 하기아 소피아를 에워싸는 벽으로는 빛이 여기저기에서 새어 들어와 공간 전체는 가볍게 느껴진다. 외벽의 창으로 빛이 비치면 열주랑, 2층의 갤러리, 또 그 위의 커다란 아치로 에워싸인 벽의 창문으로 환한 빛이 비춰들어 온다. 반원 제단 벽과 엑세드라의 반 돔에서도 많은 창으로 빛이 흘러들어온다.

 

- 하기아 소피아의 천장. 출처=Wikimedia Commons

 

 

돔의 드럼에 뚫린 40개 창이 ‘빛의 링’ 이뤄

 

이 건물에서 가장 주목할 존재는 중심의 돔이다. 돔의 드럼에는 40개의 창이 아주 가깝게 뚫려 있다. 이 창은 ‘빛의 링’을 이룬다. 이 빛의 링 때문에 얇지만 커다란 돔은 지상에서 높이 떨어져 허공을 맴도는 듯이 보인다. 이런 돔은 그야말로 이전에는 전혀 없던 새로운 모습의 돔이었다. 바닥에서는 여러 구조가 복잡하게 보였다. 그러나 눈을 올려 돔을 향하면 점점 더 읽기 쉬운 공간으로 바뀐다. 결국 돔에 이르러 눈은 평화를 찾는다.

 

돔은 황금 모자이크로 덮여 있었다. ‘빛의 링’에서 받은 빛은 돔의 표면 위에서 어슴푸레 빛났는데, 이 빛은 내부 공간 전체에 반사되어 성당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반 돔과 볼트도 황금 모자이크로 덮여 있었다. 또 피어와 벽의 콘크리트에는 이집트, 이탈리아, 프랑스 등지에서 수입한 대리석 판으로 덮여 있었다. 내부의 빛을 반사하는 모든 재료는 최종적으로 돔이 마치 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도와주었다.

 

하기아 소피아의 공간을 가장 정확하게 말한 사람은 현대인이 아닌 유스티아누스 대제의 궁정 역사가 프로코피우스(Procopius)였다. 그는 544년 하기아 소피아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했다. 그가 쓴 원문의 일부를 세 부분으로 끊어서 천천히 읽어보자. 그는 거대한 돔이 ‘빛의 링’ 위에 떠 있음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제 아치 위로 하루의 햇살이 처음으로 비춰 들어오는 곡면 형태의 원형 건물이 솟아 있다. 내가 상상하기에 이 건물은 온 나라 위에 높이 솟아 있다. 그런 건물에 일부러 남겨둔 작은 개구부를 통해 빛이 들어온다. 여태까지 아무리 상상해 보아도 나는 그렇게 하기 쉬운 어떤 말로도 이 건물을 그려낼 수 없다.”

 

이어서 저 옛날 1500년 전 사람이 돔을 받쳐주는 구조의 모습을 이렇게 적었다. “정사각형에는 아치가 배열되어 있어서 아치와 아치 사이에는 석조물로 삼각형을 이룬다. 아치가 만나는 삼각형 아래쪽은 압축되어 가늘지만, 그 위는 올라가면서 넓어진다. 그러다가 아치는 그 위에 놓인 원에서 멈추고 그 지점에서 삼각형의 나머지 각도가 정해진다. 이 원 위에 놓인 구형의 돔은 정말 아름답다.”

 

그런데 그 돔은 얹혀있는 게 아니다. 하늘에 매달려 있는 것이라고 계속 이렇게 말한다. “건물이 가볍게 보여, 단단한 기초 위에 놓인 듯이 보이지 않고, 마치 전설상의 황금 사슬로 하늘에 매달려 그 아래를 덮고 있는 듯이 보인다. 놀랍게도 모든 부분은 허공에서 서로 연결되어 서로에게 매달려 있고 옆에 있는 것에만 의존하며 하나의 훌륭하게 조화로운 전체를 형성한다. 그렇다고 보는 사람은 전체 덩어리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각각의 부분 자체가 시선을 끌기 때문이다.” “황금 사슬로 하늘에 매달려 그 아래를 덮고 있는 돔.” 이 얼마나 대담한 묘사인가? 빛 위에 떠 있는 돔은 실제로 높이 떠 있는 하늘의 장막이었다.

 

- 하기아 소피아 열주랑과 2층 갤러리. 출처= expedia.com

 

 

성당 건축은 하늘과 땅이 함께 만나는 장소

 

그러한 돔의 성당은 믿는 이에게 무엇을 전해주었는가? 프로코피우스는 또 이렇게 기록했다. “하느님께 기도하려고 이 성당에 들어오는 이는 언제나 이 건물이 이렇게 훌륭하게 지어진 것은 사람의 힘이나 뛰어난 기술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의한 것임을 금방 깨닫는다. 이렇게 하느님께로 드높여지고 기쁨에 찬 그의 마음은 하느님께서는 멀리 떨어져 계실 수가 없으셔서 당신 자신께서 선택하신 이 장소에서 즐겨 머물고 계심에 틀림이 없다고 느낀다.” 같은 시대의 궁중 시인인 파울루스(Paulus the Silentiary)도 이렇게 썼다. “이 거룩한 집에 발을 들여놓는 사람은 누구나 그곳에서 영원히 살 것이며 그의 눈은 기쁨의 눈물을 흘릴 것이다.”

 

프로코피우스는 이 돔에 비친 빛을 둘로 구분한다. “성당의 내부는 빛으로만 가득 차 있는데, 이 장소는 밖에서 들어오는 빛으로 비치는 것이 아니라, 성당 안에서 나오는 빛으로 빛나고 있어서, 무한한 빛이 성당 안 전체를 적시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밖에서 들어오는 빛과 안에서 나오는 빛.” 그가 말한 ‘안에서 나오는 빛’은 단지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었다. 비잔티움 성당의 빛을 가장 적확하게 말한 사람은 프로코피우스였다. 돔에는 빛의 근원이신 그리스도께서 내려다보며 당신의 백성에게 복을 내려주고 계시는 이미지가 그려졌었다. 그래서 모자이크로 빛나는 ‘하늘나라의 돔’은 돔으로 덮인 성당의 안에서 나오는 빛이다.

 

돔을 얹은 비잔티움 성당은 초기의 로마 바실리카보다 빛의 공간을 통해 개인이 영적으로 놀라운 신성을 받아들이는 것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 비잔티움 성당의 표상 예술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는 데 크게 공헌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렇게 될 때 성당 건축은 하늘과 땅이 함께 만나는 장소임이 분명히 강조되고, 거룩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집인 성당에 거주하심으로 우리에게 내재하시는 분이심을 드러내셨다.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8월 6일, 김광현 안드레아(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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