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9일 (일)
(홍) 성령 강림 대축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강론자료

연중 19 주일-가해-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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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2-08-10 ㅣ No.364

연중 19 주일 (가해)

          1열왕기 19,9ㄱ.11-13ㄱ     로마 9,1-5    마태 14,22-33

       2002. 8. 11.

주제 : 우리가 아는 하느님의 모습

 

 여러분은 한 주간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스스로 위대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에 알맞게 옛날에는 엄두도 내지 못하던 일에 도전하고 그 중에서 많은 것들을 인간의 힘으로 해결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단축시켰던 난치병들을 정복해서 평균수명을 훨씬 더 늘렸고, 신앙에서는 하느님의 영역이라고 구별하는 생명의 창조와 그 조작에도 사람들은 힘을 행사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놀라운 일들을 해왔고 앞으로도 새로운 차원의 놀라운 일들에 도전하는 것이 사람이기는 하겠지만, 지난 한 주간 동안 우리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의 힘 앞에서 꼼짝 못하고 하늘이 언제 개일 것인지 하늘만 쳐다본 약한 인간의 모습도 보았습니다. 과학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고 모든 것의 인과관계를 파악해서 그 앞뒤사정을 다 안다고 하던 사람들이 하는 일이란 참으로 보잘것없는 일이란 것을 깨닫게 했던 한 주간이었습니다.

 

오늘은 연중 19주일입니다. 자연의 엄청난 힘 앞에서 초라할 수밖에 없었던 시간을 보내고 우리는 또 새로운 주간을 맞이했습니다. 이 새로운 한 주간의 첫날의 하느님의 말씀은 자연의 힘 앞에 과연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옳은 일인지를 돌아보게 하는 내용입니다.

 

지난 주일에서 들은 이야기였던, 5천명이상의 사람들이 음식을 거뜬하게 먹고 난 다음에 이어진 상황이 오늘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을 가까운데서 지켜본 제자들은 4km의 갈릴리 호수를 배로 건너가면서 역풍(逆風)에 시달리면서 밤 시간을 보냈습니다. 5천명 이상의 사람들이 배불리 먹는 순간을 지켜보았던 제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을 보고서도 그들은 마음을 하느님께 봉헌하지 않았습니다. 그 제자들을 건너편 마을로 보내신 예수님은 산에 들어가 기도의 시간을 갖습니다. 그러다가 새벽녘이 되어 풍랑 때문에 고생하던 제자들에게로 다가갑니다. 그 제자들 가운데 으뜸이었던 베드로는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서 자신도 물위를 걸어보고 싶은 욕망을 느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부탁하여 실제로 물위를 걷게 되었을 때에는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물속에 빠지는 것입니다. 우리도 세상살이에서 높거나 낮은 수많은 파도를 만납니다. 우리가 만나는 파도가 때로는 작은 것이어서 쉽사리 이길 수 있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 힘만으로 이길 수 있는 몇 가지 일을 겪다보면 사람의 마음은 자만과 오만에 빠지게 되고 현실의 모든 일을 내 힘으로 내 생각대로 다 할 수 있을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바로 그것이 함정인데도 사람은 깨닫지 못합니다.

 

세상을 힘겹게 사는 사람들은 하느님께 기도하느라 봉헌하는 시간이 많습니다. 자신들이 가졌다고 생각하는 힘이 약하다고 인정하기에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만만하게 보는 사람들, 눈앞에 드러나는 것만 받아들이고 그것만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은 좀처럼 하느님을 향하여 마음을 열지도 않고 머리를 하느님께로 돌리지도 않습니다. 그러다가 극복하기 힘든 커다란 재난을 만나면 하느님을 향하여 남보다 더 큰 소리를 칩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곤경이 내게 닥치느냐”고 묻습니다. 이런 자만감이 사람이 가진 한계라는 것을 아시는 하느님은 사람들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서 당장 심판하시지 않고 끈기 있게 기다립니다. 사람처럼 판단이 느려서 그런 것도 아닐 텐데 그 하느님이 갖는 자세는 참으로 온화합니다. 베드로를 향하여 하시는 말씀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온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고 묻는 부드러운 말씀뿐입니다. 예수님의 이 부드러운 말씀은 자신만 알고 세상에서 함부로 헛된 힘을 쓰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을 대하시는 하느님의 태도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태도를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겠습니까?

 

아합이라는 북이스라엘의 임금을 상대로 하여 ‘마음을 돌려 하느님께 돌아와야 한다’고 외치다가 힘에 벅차서 도망친 엘리야가 하느님을 만나는 모습이 오늘 첫째 독서의 내용입니다. 이 과정을 우리가 잘 받아들이면 하느님께서 언제 어느 때 우리에게 말씀하고 행동하시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한 엘리야 예언자였지만 그는 아합에게서 도망쳐 어느 동굴에 숨게 됩니다. 거기에서 하느님께 탄원을 거듭한 끝에 예언자는 하느님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하느님을 대하는 모습을 여러분들은 어떻게 보십니까? 간절히 하느님을 만나기를 바랐던 그는 자기의 겉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하느님의 소리가 들리는 동굴 밖에 나와 섭니다. 그렇게 간절히 원하고 바라던 엘리야 예언자였지만 그에게는 자신의 눈으로 하느님을 쳐다보고야 말겠다는 오만한 마음이 없던 것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엘리야 예언자가 베드로 사도보다 부족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고 2002년을 지내는 우리보다도 훨씬 못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언자의 그러한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알아들어야 할 것은 하느님을 대면하겠다고 생각하거나 하느님을 뵙고 싶다면 같은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베드로 사도가 겪는 어려움을 기억하면 알아듣기 쉽습니다.  내가 지금 얼마나 겸손한 자세를 갖고 있는지 그것은 나 자신과 하느님만이 아는 일입니다. 내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 앞에 나설 사람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노력하는 자세뿐입니다.

 

하느님을 우리 안에 모시는 일, 하느님을 느끼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작게 본다면 합당한 자세를 갖춘 사람만이 가능한 일이고, 좀 더 크게 본다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셔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이 자리에 와 있으면서도 하느님이 불러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그 합당한 자세의 반 정도는 준비한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한 자세를 갖추고 싶은 사람이라면 우리를 찾아오시려고 애쓰고 우리와 더불어 살려고 애쓰는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에게 훨씬 가까이 계신 분이고 우리와 일치하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잠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지 느낄 수 있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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