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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현대사회와 고독: 현대인은 왜 고독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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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5-03 ㅣ No.1042

[경향 돋보기 - 현대사회와 고독] 현대인은 왜 고독한가?


우리는 언제 고독하다고 느낄까? 고독의 사전적인 의미는 고립에 대응하는 정신적 상태를 의미한다. 홀로 있으니 고독하다. 사회적 관계가 단절된 상황이다. 이때 사회적 관계의 단절은 행동의 의미에서 단절, 고립을 넘어선다.

그러나 사회적 관계는 단절되어 있지만 위기 상황에서 나를 도와줄 사람이 있다거나, 제도적으로 관계가 단절되어 있지 않다면, 오히려 고독 또는 사회적 고립을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

고독을 즐기는 것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규정하는 병리 또는 고통의 상황으로 문제가 되는 고독은 아닌 셈이다. 따라서 우리는 고독을 단순한 고립을 넘어서서 고립된 상황에서 느끼는 분노, 무력, 외로움 등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고독이 물리적인 공간 안에 누구와 같이 있지 못함으로써 생긴다면 이런 고독은 오히려 현대사회에서 많이 줄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과거에 비해 인구밀도가 늘어나서, 오히려 우리는 하루 종일 너무 많은 사람들과 같이 있기에, 고독해지고 있다는 연구도 나오고 있는 형편이다.


홀로 있으니 고독하다

문제는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같이 있음에도 고독감을 느끼는 경우이다. 함께 있는 이들이 나와 친밀한 사람, 곧 배우자, 가족, 친구들인데도 서로 소통할 수 없다고 생각될 때 고립과 고독감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따라서 공간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같은 공동체 속에 들어와서 대화를 나누고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하고, 서로 물질적 이익까지 나눌 수 있다면 하나의 공동체 감정을 가짐으로써 고독을 극복할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고독은 의외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숫자나 성격의 문제가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곧 주위에 사람들이 많이 있어도, 또는 연예인들처럼 어디를 가나 자신들을 알고 반기는 사람들이 많은 경우에도 고립감, 고독감, 또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나 무능력함에서 빚어지는 불안감이 나타날 수 있다.

친구가 많을지라도 자신과 상대방을 서로 이해하면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의미있는 친구가 없을 경우에 우리는 고독감을 느낀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일 수 있다. 어떤 남자가 남자답지 못하고 수줍어하며 나약한 모습을 지녔다고 하자. 그런데 여자 친구는 그가 자기를 보호해주는 든든한 남자라고 여기고 남자의 역할을 요구할 때, 둘의 관계가 친하더라도, 서로 낯설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면

나이가 많다면, 이에 맞는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여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처지가 사회적 지위나 부를 갖지 못해, 나이 많은 사람으로서 상대가 기대하는 바를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여기면 고립감을 느끼게 된다.

사회적 실존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곧 아버지는 아버지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때, 집안에서 아버지로서 대접을 받고, 공동체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이 역할은 전통사회의 경우에는 아버지만이 감당하여야 했고, 다른 사람들에게 떠넘길 수 없었다.

만일 사회가 아버지의 직업을 빼앗고, 아버지를 무시한다면, 그는 집안에서 아버지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이러한 아버지가 많아진다면 아버지의 고립감과 고독감은 커질 수밖에 없다.

문제는 현대인들의 경우, 가족이 점차 소수화하고, 가족 간의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가족이 공동체의 역할을 담당하기 어려워졌다는 데에 있다. 이웃들의 관계도 점차 약화되고 있다. 현대인들의 사회관계는 이제 가족과 이웃과 같은 혈연, 지연 공동체가 약화되고, 학연이나 직장, 동호회와 같은 관계로 맺어지는 공동체로 나아가고 있다.

이는 과거의 일차적인 연고적 공동체의 약화, 그리고 계약적 공동체의 강화로 나아간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럴 경우에 새로운 사회관계가 나타나고 이를 유지하고자 하는 개인들의 행동전략도 새롭게 등장할 수밖에 없다.

가족이 해체되어 혼자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어린아이들도 가족이 아닌 조직이나 단체에서 전문적으로 길러진다면, 사회적으로 이 어린아이들이 속해야 할 공동체는 새로이 형성되는 셈이다. 이럴 경우 파편화된 개인들이 가족을 떠나 홀로 다양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사회는 매우 불안정하며, 개인들로서는 불안한 삶을 이어가야 한다.

가족은 구성원들을 번식시키는 것을 넘어 소득과 소비를 공유하고, 정서적인 어려움과 기쁨을 같이한다는 측면에서 가장 원초적인 공동체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시장관계, 계약관계, 근대국가체제의 등장은 공동체의 와해와 개인들의 원자화, 파편화를 촉진시켰다. 원자화란 개인들이 계약의 주체가 되고, 시장관계의 주체가 되며, 국가 구성원의 주체가 되는 상황을 의미한다. 곧 산업화는 가족의 해체, 공동체의 해체, 사회의 해체를 촉진시키면서 개인의 원자화를 촉진시켰다.

이를 극복하는 방식으로서 직장 공동체 또는 직업 공동체가 등장하였으나, 한국의 현실에서 하나의 직업으로 평생을 먹고살 수 있고, 그것도 배타적으로 공동체 속에서 보호받으면서 유지될 수 있는 직업은 점차 사라지고 있는 형편이다. 오히려 노동시장의 상황은 직업을 자주 바꾸고, 직장 내 동료들이 서로 경쟁관계에서 업적 경쟁에 내몰리는 상황으로 가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생기는 고독감은 더욱 커지게 마련이다. 선진국의 직장인들이 알코올이나 마약 중독에 빠지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공동체적 의미를 찾지 못해서다.


자연이나 기계와의 관계에서 느끼는 고독감

최근에 나타난 더 근본적인 인간의 실존적 상황은, 인간이 자연, 그리고 기계화되고 제도화된 사회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이를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겪는 무력감 때문에 고독감을 느끼게 한다.

2011년 3월 일본 동북부 지역에서 발생한 지진, 쓰나미, 핵발전소 붕괴는 약 2만 명을 죽음으로 몰았다. 이렇게 핵물질 오염처럼 인간의 미래를 빼앗아가는 상황에서는, 한 번 피폭을 당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이를 회복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핵 오염이라는 상황은 인간에게 절대적인 절망을 안겨주고, 개인에게는 자식을 낳을 수도 없는 절멸의 상황을 만든다.

이에 더하여 최근 미국에서 논의된 드론(무인 폭격기)에 따른 민간인 학살의 문제는 사람을 죽이는 주체가 로봇 기계가 됨으로써 과거에는 인간에게 책임을 묻고, 법적인 형벌을 적용했으나, 드론이라는 무인 조종 폭격기는 죽은 사람은 있으나, 가해자는 기계가 되는 그래서, 법률적으로 처벌할 수 없는 상황이 나타나게 된다.

무인 자동차의 등장도 마찬가지다. 무인 자동차가 사고를 내거나 신호를 위반하였을 때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자연의 생물들에게 또는 인간의 후손들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무책임의 윤리적 문제가 제기된다. 인간이 자연을 훼손했을 때, 자연이 인간을 상대로 법적인 책임을 물을 수 있느냐의 문제다. 이미 도롱뇽 소송에서 나타났듯이, 도롱뇽이 소송의 주체가 될 수 있느냐의 문제 말이다.

도롱뇽은 피해자가 되어도 가해자인 인간은 아무런 법률적인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가? 도롱뇽이 사라지면 인간에게 피해가 없을 것이라는 가정은 자명한 명제인가? 최근 선진국의 법률적인 판례에서는 도롱뇽을 대신하여 단체나 조직, 또는 개인이 소송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때의 논리는 물론 자연물도 인간과 같은 생존의 권리를 가졌다는 친자연적인 사상에 근거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자연이 살기 어려운 상황은 자연의 한 구성 분자로서 인간이 차지한 위치와 생태학적인 연결고리에서 위험한 상황을 맞을 수도 있음을 간파하고, 미리 대응적인 차원에서 이를 사전 예방적으로 대응한 결과이다.

인간은 인간공동체만이 아니라 자연과도, 생태적인 관계도 한 공동체의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 만일 이를 무시한다면, 인간은 자연이나 기계와의 관계에서도 고독감을 느끼게 되는 상황이 발생할 것이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자연과 기계가 등장하는 순간, 우리의 무력감, 고립감, 고독감은 더욱 커질 것이다.


대체물들보다 인간과의 관계를

인간들끼리 사회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고독감을 느끼게 되자, 최근에는 인형이나 대중매체의 사회관계 지향적 프로그램들, 모바일 디지털 매체를 통한 사회관계의 탐닉, 반려동물을 통한 고립감 해소가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스스로 인형에 인격을 부여하고 사람에게 대하듯이 말을 걸고 스스로 응답하는 것이다.

대중매체에 나타나는 가족관계, 이성 간의 사랑과 연애, 직장동료간의 동료애에 스스로를 대입하여 대리만족을 느끼게 되고, 오히려 현실의 사회공간에 존재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소원해지고, 연대감을 느끼지 못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공동체적 연대감을 느끼지 못하지만, 멀리 떨어진 소수의 사람들과 매우 감정적으로 스마트폰을 통해 끊임없이 안부나 대화를 주고받는 일은 이제 보편적인 현상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애완견이나 고양이 같은 동물, 심지어는 식물을 무척 사랑하여 헌신적으로 보살피지만, 이웃의 인간들에게는 매몰차게 대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사람들을 만나 말을 걸고, 같이 식사하고, 수다도 떨면서 같이 고민을 토로하고 해결을 모색하는 그런 사회적 상황이 없어지면서 개인들은 이제 사람들을 무서워하고, 경쟁상대로 여기고, 적대적으로 대하고, 그 대체물을 찾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대체물들도 이제 인간 사회의 한 구성원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사람과 기계, 동물이 모여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사람들 간의 공동체는 파괴되는 현상을 맞게 되었다. 기계와 동식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공동체를 파괴하는 이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인간을 적대시하고, 그 대체물로 만족하는 사회는 공동체적 연대감은 적고, 반면에 사회적 고독감의 총량은 늘어난다는 것이다.


다양한 견해와 행동을 허용하라

사회적으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함께하지 못하거나, 스스로 생의 의미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자신의 판단과 행동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남의 눈치를 보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가는 현상을 보인다. 이는 자신의 판단에 자신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외톨이가 되는 상황을 회피해 보고자 하는 몸부림으로 볼 수 있다.

구성원들이 모두 원자화된 상태는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가 순종하고, 일치단결하여 한 모습으로 움직이는 듯이 보여도, 이러한 겉모습의 연계고리가 무너지는 순간, 원자화된 인간들의 행동과 태도는 또 다른 획일화된 모습을 향하여 나아가기 마련이다. 현대인의 이런 한쪽 쏠림 현상, 또는 지나치게 남을 따라가는 현상은 주체성이 없다는 것을 표현한다.

인간 세상에서 고독이나 고립을 완전히 해결하는 방법은 사실 없다. 다만 병리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정도의 고독감을 느끼는 그런 사회적인 상황을 방지하는 제도적인 장치나 사회적인 장치는 고안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곧 어느 정도의 고독과 어느 정도의 공동체적 연대감을 허용하고 감내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광범위한 차이와 다양성을 허용하자. 금지 항목을 줄일수록 사회는 역동적이고, 연대성이 강화된다. 반면에 행동은 물론이고, 태도나 표현까지도 획일성을 강조한다면, 사회적 연대성을 깊게 강화할 수 있는 방안은 줄어들고, 고립감과 고독감을 느끼는 사람들의 비율은 많아질 수밖에 없다.

사회적으로 획일성이 갖는 위험성은 개인들의 고립감이나 고독감을 높인다는 의미를 넘어서서 사회의 환경적응력, 역동성의 손실을 가져온다. 곧 미래의 불확실성이 높아질수록, 미래에 대한 대처능력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다양한 대안을 보유하고 있어야 다양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사회문화적 다양성은 개인적 다양성이 허용되지 않으면 촉진될 수 없다. 개인들의 사고나 행동이 인정받는다면 각 개인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가늠해 보고, 그 능력을 발달시키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사회가 획일적으로 기준을 정해버린다면, 각 개인들은 스스로의 능력을 가늠할 필요도 없고 개발할 필요도 없어진다. 이런 사회에서 개인은 사회가 제시한 기준에 맞추려고 자신의 능력과 가능성을 희생하며 상당한 스트레스를 감수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이 오래 지속될수록 개인들은 절망감과 무력감, 고독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 이은진 마태오 - 미국 UCLA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지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3년 4월호, 이은진 마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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