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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한국 천주교 창설 선구자 이벽의 삶으로 보는 133위 시복 추진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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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9-05 ㅣ No.1574

한국 천주교 창설 선구자 이벽의 삶으로 보는 133위 시복 추진 의미


하느님 존재·영혼불멸 논하며 서학을 종교적 신앙으로 발전시켜

 

 

- 이벽 요한 세례자.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위원장 안명옥 주교)는 올해 5월부터 이벽(李蘗)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시복 예비심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들 133위 시복 추진은 신앙 선조들의 믿음을 기리고 한국교회 내적 쇄신과 발전을 이루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지난 2014년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가 복자로 선포되기도 했지만 초기 순교자들이 여전히 시복되지 않은 상황이어서 이번 133위 시복은 더욱 간절하게 요구되고 있다. 이벽은 18세기 조선 서학(西學)사상과 초기 천주교를 논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문물에 능통했던 그는 서학의 배경에 천주교가 있음을 알았다. 이승훈에게서 세례를 받은 그는 조선에서는 처음으로 세례로 결속된 천주교 신앙공동체를 이뤄냈다. 순교자성월을 맞아 조선 천주교 선구자였던 이벽의 삶을 돌아보고 시복 추진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이벽(李蘗, 요한 세례자·1754~1785)은 경주 이씨 부만의 둘째 아들로 경기도 포천 화현리에서 출생했다. 호는 광암(曠菴).

 

이벽의 집안은 당대 무반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벽은 어려서부터 신체가 건강하고 무술에 능했으며 언변도 좋았다고 한다. 아버지 부만은 그가 무관으로 출세하기를 바랐지만 그는 완강하게 거부했다. 어린 시절부터 사서오경 등 경학과 학문 연구에 열중한 그는 원로 선비들과 학자들 앞에서 학문을 논하는 등 천부적인 자질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1779년 이벽은 권철신(權哲身), 정약전(丁若銓) 등과 함께 경기도 광주 퇴촌면 천진암(天眞庵) 강학회(講學會)에 참가한다. 여기서 열흘 동안 하늘, 세상, 인성(人性)에 대해 토론했다. 옛 성현들의 윤리서를 함께 검토했고 서양 선교사들이 지은 철학, 수학, 종교 서적 등을 공부했다. 

 

이 때부터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시작한 그는 천주교 교리 연구에 전념한다. 정약전·약종 형제들과 함께 하느님의 존재와 유일성, 천지창조, 상선벌악 등 종교적 논제를 논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써 학문적 지식을 종교적 신앙으로 발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한다.

 

- 천진암성지 이벽 묘.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천주교 지식을 쌓고는 있었지만 이벽은 좀 더 높은 진리에 목말라 했다. 1783년 이승훈(李承薰, 베드로·1756~1801)이 아버지를 따라 중국 베이징으로 들어가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천주교를 소개한다. 

 

이벽은 이승훈에게 서양 선교사들을 중국에서 만나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아 돌아올 것을 부탁했다. 문헌에 따르면, 이벽은 다음과 같이 이승훈에게 말했다고 한다. 

 

“자네가 중국에 가는 것은 참된 교리를 위해 하늘이 주신 훌륭한 기회일세. 만물 창조주이신 천주를 공경하는 참다운 방식은 서양인들에게서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르렀네.

 

그 도리가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자기 마음과 자기 성격을 바로잡지 못하네. 그것이 아니면 임금들과 백성들의 서로 다른 본분을 어떻게 알겠는가.”

 

천진암강학당지 기념 표석.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이승훈은 이벽의 부탁대로 베이징에서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은 뒤 1784년 돌아왔다. 이승훈으로부터 천주실의, 기하원본과 같은 서학 서적과 망원경 등을 넘겨받은 이벽은 외딴 집을 세내고는 천주교 교리연구와 묵상에 몰두한다.

 

천주교 진리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얻게 된 그는 1784년 서울 청계천 수표교(水標橋)에 있던 자신의 집에서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복음 전파에 나선다. 이는 조선 최초의 세례식이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최창현(崔昌顯), 최인길(崔仁吉), 김종교(金宗敎) 등 중인계급은 물론 정약전 · 약종 · 약용 형제 등 양반계층에도 복음을 전파하며 커다란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이 소식은 유림(儒林)의 귀에 들어가 거센 반발을 사게 된다. 천주교 교리가 당시 국가 지도이념인 성리학적 윤리체제를 송두리째 파괴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유림들은 이벽을 토론으로 설득해 천주교 전파를 그만둘 것을 종용하려 했지만 이벽의 논리 앞에 아무 말도 못하고 물러섰다고 전해진다.

 

- 천진암성지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 기념비.

 

 

하지만 곧 시련이 다가왔다. 1785년 김범우(金範禹, 토마스)가 형조에 잡혀가 배교를 강요당하고 혹독한 형벌을 받다 단양(丹陽)으로 귀양가는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발생한 것이다. 평소 천주교에 대해 못 마땅해 하던 유림들은 천주교 신자들을 맹렬하게 공격하는 통문을 돌리면서 “천주교인들과 완전히 절교하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당시 이벽의 부모는 이벽을 배교시키기 위해 처절하게 나섰다. 심지어 아버지는 목을 매 자살하려고까지 했다. 3개월에 걸쳐 문중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당시 사회상을 생각해보자면 당연했던 일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결국 이벽은 가족에 의해 자택 감금돼 외부와 모든 연락을 끊고 살 수밖에 없었다. 부모가 격노했다면 자식들은 며칠씩이나 식사를 하지 못하는 것이 당시 흔히 있는 일이었다. 스스로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에 열중하며 명상하던 그는 1785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벽의 말년 신앙에 대해 파리외방전교회 달레(Dallet)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배교로 단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부모에 대한 ‘효’를 절대적인 이념으로 하던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단순히 배교라고 결론 내릴 수는 없다는 견해도 있다.

 

아쉬운 점은 남달리 짧았던 생애와 박해였기 때문에 유작(遺作)이 부족해 그의 사상적인 가치를 평가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것은 이승훈의 유고집 「만천유고」(蔓川遺稿)에 수록된 ‘천주공경가’(天主恭敬歌), ‘성교요지’(聖敎要旨) 등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벽은 서학을 접하면서 신의 존재, 원죄, 영혼불멸, 사후세계 등 사상 폭을 넓힘으로써 유교와 천주교 사상을 접목시켜 한국 천주교가 꽃필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특히 이벽의 사상체계와 지식은 18세기 조선 실학 사상을 집대성한 한국 최대의 실학자이자 개혁가인 정약용에게 전달되고 수용되기에 이른다.

 

이벽은 조선 천주교 창설 선구자였다. 이벽 이전에도 천주교를 접한 사람은 많았지만 주자학에 대해 심한 반발을 느낀 학자들이 서학을 유용한 학문으로 받아들여 연구했을 뿐이었다. 이러한 학자들은 종교를 이단시했다. 이벽이 세례를 받고 조선인 신자 공동체를 이룩한 1784년을 한국교회가 한국 천주교 창설 원년으로 삼아 기념하고 있음을 생각해볼 때 이벽의 선구자적 역할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셈이다.

 

[가톨릭신문, 2016년 9월 4일, 방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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