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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진단, 한국사회: 키워드로 살펴보는 한국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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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3-17 ㅣ No.1297

[경향 돋보기 - 진단, 한국사회] 키워드로 살펴보는 한국사회

 

 

“우리 집은 흙수저인가요?”

 

지난 설 연휴, 중학교 1학년 아들이 문득 던진 질문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 ‘흙수저 빙고 게임’이라는 판별법이 게재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세뱃돈이 10만 원 단위를 못 넘어 봄.’이라는 항목이 있단다. 자신이 받은 세뱃돈이 모두 10만 원이 되지 않았으니 우리 집이 흙수저일 것이라는 항변이다. 웃자고 하는 말이겠지만 말 속에 뼈가 있다.

 

수저 계급론은 “은수저(silverspoon)를 입에 물고 태어났다.”는 영어 표현의 응용이다. 보통 은수저보다 금수저란 말을 쓰는데 ‘재벌가, 국회의원, 대기업 임원급 이상의 자제’를 지칭한다. 흙수저는 더 세분해서 나누기도 한다. 흙수저 아래의 빈곤층은 똥수저, 아예 수저가 없는 무(無)수저도 있다는 설명까지 개발되고 있다. 수저 계급론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자신의 계급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자조적 인식이 바탕에 깔려있다.

 

 

‘노오력’으로 탈출할 수 없는 ‘헬조선’

 

수저 계급론과 한 짝으로 거론되는 단어인 ‘헬조선’은 지옥을 뜻하는 헬(Hell)과 우리나라를 의미하는 조선의 합성어다. ‘지옥불반도(지옥불 + 한반도)’라는 표현도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지난해 시사 주간지 대부분이 선정한 ‘올해의 단어, 키워드’가 흙수저와 헬조선이다. 헬조선은 3-4년 전 ‘디시인사이드’라는 커뮤니티 포털사이트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처음에 그 의미는 정치경제, 사회문화 모든 영역에서 대한민국의 미개함을 냉소적으로 지적하는 용어였다.

 

그런데도 ‘꼰대’들은 비현실적인 ‘노오력’을 강요한다는 것이 수저 계급론의 시각이다. ‘노오력’은 흙수저와 함께 지난해 주목받은 신조어로 노력만으로는 될 수 없다는 뜻으로 노력을 비꼬는 말이다. “정말 간절하게 원하면 전 우주가 나서서 다같이 도와준다. 그리고 꿈이 이뤄진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지난해 어린이날 발언이나, 김난도 서울대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같은 자기계발서가 ‘노오력’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경구로 취급되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 유행한 “금수저로 태어나고자 하는 노오력이 부족했다.”와 같은 말은 ‘노오력’으로 신분상승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빗댄 냉소였다.

 

사실 이런 인식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88만 원 세대’에서 ‘삼포’(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청년 세대), ‘오포’(삼포에 취업과 내 집 마련까지 포기), ‘N포 세대’(주거, 취업, 결혼, 인간관계 등 인생의 많은 부분을 포기)로 이어지는 세대 불균형론이 있다. 수저 계급론이나 헬조선 담론, 그리고 종전의 세대론 모두 비관적인 세태인식을 담고 있지만 차이는 있다. 이전의 청년 세대론은 세대 외부에서 주어진 규정이다. 하지만 수저 계급론과 헬조선은 세대 내에서 스스로 만들어낸 담론이다.

 

우석훈과 박권일이 쓴 「88만 원 세대」에서 두 저자는 이들 세대가 그 운명에서 벗어나려면 현실에 맞서 ‘짱돌’을 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짱돌은 일종의 은유적 표현이다. 세대연대를 통해 다른 삶을 만들어내라는 메시지였다. 사실 「88만 원 세대」가 처음 세상에 선보인 것은 2007년이었다. 지금으로부터 9년 전이다. 두 저자가 ‘짱돌을 들라!’고 했던 당시 20대 대부분은 지금 30대가 되었다. 한국의 현실은 전혀 나아지지 않은 것일까? 헬조선 등 지난해 한국에서 유행한 단어들을 보면 오히려 악화된 것 같다.

 

헬조선과 수저 계급론은 ‘탈출’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만난다(데이터 기반 전략 자문 업체 아르스프락시아의 의미망 분석 참조). 헬조선을 탈출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이민’이나 ‘죽창’이다. 20대 여성의 이민 분투기를 다루는 장강명 작가의 소설 「한국이 싫어서」가 지난해 상반기 국내소설 부문에서 인기도서가 된 것은 이런 시류를 반영한 것이다. 헬조선이 싫어 이민을 꿈꾸지만, 이민에 성공하는 것은 99%를 차지하는 흙수저가 아니라 1% 미만인 ‘금수저’들이다.

 

그래서 그 대안은 ‘죽창’이다. “조선시대부터 죽창은 서민 아이템이었다. 갑옷과 칼이 무기인 금수저에 비하면 흙수저가 간편하게 선택할 수 있는 무기는 죽창이다”(디시위키 참조). ‘너도 한 방 나도 한 방 죽창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과 같은 말이 블랙코미디처럼 사용된다. 흙수저가 어차피 헬조선에서 탈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이승에서의 기대는 모두 포기하고 ‘죽음 앞에서 평등’을 역설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수저 계급론이나 헬조선과 같은 단어가 20대 중심으로 운영되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극우 또는 반사회적 커뮤니티로 인식되는 일간 베스트 저장소‘(일베’)와 같은 사이트도 예외는 아니다. “헬조선은 역시 미개해.” 또는 “헬조선 탈출”과 같은 말은 트위터와 일베에서 공통으로 사용되었다(경향신문, 2015년 9월 4일자, ‘헬조선에 태어나 노오오오오력이 필요해’ 기사 참조).

 

우석훈 박사 등이 애초 청년세대를 ‘88만 원 세대’로 규정한 것은 국제통화기금(IMF) 환란 이후 한국사회의 구조변화를 언급한 것이다. 사회 안전망이 제거된 승자독식 사회로 한국사회가 바뀌었고, 그 첫 희생이 당시 20대가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당시 10대, 현재의 20대에게 닥칠 운명은 어떤 것일까? 삼포 세대라는 규정이 나온 것은 2011년 경향신문의 ‘복지국가를 말한다’라는 기획보도였다. 여기서 오포, 칠포 세대라는 개념이 나왔다. ‘달관 세대’란 말도 있다.

 

 

세대론의 함정

 

사회과학자들은 ‘세대론’은 엄밀히 말하면 일종의 수사이지 사회과학적으로 증명된 주장이 아니라고 말한다. 전상진 교수(서강대 사회학과)는 “이른바 승자와 패자 세대를 가름으로써 다수에 속하는 피해자의 도덕적 분노를 불러일으킬 수는 있지만, 정책적 해법은 제시할 수 없는 ”비학술적인 개념이라고 비판한다.

 

그러기 때문에 세대론은 그 편리성 때문에 누구든 호출할 수 있다. 박근혜 정부가 내세우는 노동개혁 담론이 대표적이다. 박근혜 정부가 주장하는 노동개혁의 키워드는 일자리 부족인데, 그 때문에 연애나 결혼도, 출산도 꺼리는 청년들이 다수 양산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세대론은 정부가 고임금 · 정규직 기성세대의 ‘기득권’을 공격하는 무기가 된다. 지난해 봄,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이 국민연금 고갈을 주장하면서 이른바 ‘세대 간 도둑질’을 거론한 것이 단적인 사례다.

 

수저 계급론이나 헬조선 담론도 마찬가지다. 탈출구가 없는 절망을 묘사하는 수사는 될 수 있지만, 대다수를 차지하는 흙수저에게 유일한 ‘해법’은 역시 비유적 표현인 ‘죽창’일 뿐이다.

 

여전히 답을 얻어야 하는 질문은 남아있다. 10년 간의 진보정부 이후, 민주주의 역진을 경험한 보수정부 시대에 세대론에 이어 수저 계급론과 헬조선 담론은 왜 특히 젊은층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공감대를 얻는 것일까? 사회 안전망의 붕괴, 승자독식 사회론의 맹점 가운데 하나는 지난날에는 사회 안전망이 제대로 갖춰져 있거나 승자독식 사회가 아니었다는 ‘착시효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지난겨울 한국사회를 강타한 ‘응답하라 1988’ 열풍이 “1988년의 한국사회가 지금보다 더 좋았다.”는 낭만적 미화로 연결된다면 그것 또한 착시다. 한국사회의 문제가 더 심각한 것은 거기에 있다. 복지제도도, 계급 타협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채 정글과 같은 세계적 인자본주의, 각자도생 사회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진정 헬조선의 상황에 놓인 것은 청년층뿐만이 아니라 한국의 전체 세대인 것이다.

 

사실 한국사회의 구조변화를 살펴보는 데서 그동안 간과해 왔던 핵심적인 요인이 있다. 바로 인구구조의 변화다. 한국의 인구구조는 1980년대 초반까지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비록 비리와 특혜를 바탕으로 권력과 유착한 재벌 중심의 성장이었지만 경제도 그동안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20세기 이후의 전 세계 각국의 인구구조를 살펴보면 지난날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특징적 변화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출생률이 급상승할 때 태어난 이른바 ‘베이비붐 세대’의 등장이다.

 

전 세계적으로 베이비붐 세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팽창한 소비자본주의의 주역세대였다. 미국에 베이비붐 세대가 있다면 일본에는 ‘단카이 세대’가 있다. 문제는 이들이 은퇴한 시점 이후의 사회변화다. 보통 15세에서 65세까지를 생산가능 인구로 규정하는데, 이들이 은퇴하면서 생산가능 인구는 급속하게 줄어든다. 생산인구의 감소는 경제위기나 장기불황으로 연결된다.

 

통계청의 인구 그래프를 보면 한국의 베이비붐 세대는 낙타 등의 혹처럼 두 개의 봉우리로 구성된다. 6·25전쟁 이후인 1955년생부터 1963년생까지가 1차고, 1968년생부터 1974년생까지가 2차 베이비붐 세대다.

 

베이비붐 세대가 성년이 되어 196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인 경제활동에 뛰어든 것은 한국의 경제발전에서 큰 원동력이 되었다. 이 시기에 급격한 도시이동으로 1인당 노동생산성이 늘어난 것도 커다란 변화다.

 

워낙 인구수가 많다 보니 이들이 집을 사면서부터는 한국 사람들의 거주유형도 바뀌게 되었다. 단독주택이 사라지게 되고 아파트와 ‘빌라’라는 이름의 연립주택이 표준적인 주거유형이 되었다. 수요가 많으니 집값도 폭등한다. 점점 벌어들이는 소득과 집값의 격차가 벌어지지만 빚을 내더라도 더 오르기 전에 부동산을 사는 것이 이익이다. 한국사회의 ‘부동산 불패신화’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베이비붐 세대에게 부동산은 ‘노후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박종훈, 「지상 최대의 사기극 세대전쟁」)였다.

 

‘부동산 불패신화’는 언제 진짜로 꺼지게 될까? 답은 부동산 시장을 뒷받침할 인구가 더는 없을 때다. 그리고 그때는 이미 시작되었다. 한국의 생산가능 인구는 이미 2012년에 정점(73.2%)에 도달한 뒤 하락하기 시작하였다. 1차 베이비붐 세대가 생산현장에서 은퇴하기 시작한 2020년(1955+65=2020)부터는 생산가능 인구가 급속히 줄어들게 된다.

 

 

부동산 불패신화가 꺼진 뒤 한국사회는

 

‘인구 절벽(Demographic Cliff)’이라는 개념이 있다. 미국의 재정 · 경제 예측 전문가인 해리덴트가 내놓은 개념으로 ‘소비 · 노동 · 투자하는 사람들이 사라진 세상’을 말한다. 그가 지난 2014년에 내놓은 책 「2018 인구 절벽이 온다」에는 한국의 사례가 수없이 인용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한국은 정확히 22년 일본을 후행(後行)한다. 일본은 인위적인 경기부양책과 공공사업으로 부동산 거품을 유지했지만, 마침내  1990년대 중반 거품 붕괴를 경험한 뒤 현재까지 장기불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해리덴트의 예측에 따르면 한국은 2010년 소비의 정점에 도달하고 2018년까지 정점에서 정체(디플레이션)한 뒤 급격히 나락으로 떨어진다.

 

인구 절벽에 선행해 가장 먼저 타격을 받는 것이 부동산이다. 이때가 되면 앞서 언급한 ‘전체 세대의 헬조선, 흙수저화’가 완성된다. 이미 디플레이션과 부동산 위기는 만성화되어 있다. 핵심 키워드는 ‘불안’이다. 베이비붐 세대에게 평생의 투자자산이자 계층이동의 상징이었던 집

값의 붕괴는 지금까지 지켜온 모든 것을 잃는 것에 해당한다.

 

벗어날 길은 정말 없을까? 필자는 이와 관련한 여러 차례의 기획기사를 쓴 바 있다. 글을 쓰면서 접촉한 전문가들이 내놓은 해법들이 공통으로 ‘정치의 변화’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저출산으로 말미암은 인구구조의 변화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승자독식 · 각자도생의 길로 가속화되고 있는 사회구조의 변화는 유권자들의 투표로 ‘제도’를 바꾸면 완화 또는 방향전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어느 정당, 어떤 지도자를 뽑는 것이 한국사회의 앞날에 그나마 ‘희망’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 각자 판단해야 하지만 말이다.

 

* 정용인 - 경향신문 주간경향부에서 사회문화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연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을 수료한 뒤, 1998년부터 19년차 현업기자다.

 

[경향잡지, 2016년 3월호, 정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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