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미술ㅣ교회건축

공소31: 원주교구 청일본당 추동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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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8-22 ㅣ No.990

[공소(公所)] (31) 원주교구 청일본당 추동공소


박해 피해 숨어들어 화전 일구며 신앙생활

 

 

강원도 횡성 지역 교우들은 자연재해와 호랑이의 피습 등 열악한 환경에서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단한 삶을 극복하며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다. 1950년 설립된 추동공소 전경.

 

 

원주교구 청일본당 추동공소는 강원도 횡성군 갑천면 외갑천로 257번길 20에 자리하고 있다.

 

공소가 자리한 추동마을은 가래나무가 많아 ‘가래울’, ‘가래곡’이라 불렸다. 이를 한자음으로 표기하면 ‘가래 추’(楸), ‘골 동’(洞), ‘추동’이 된다. 그런데 횡성읍에 이미 ‘추동리’(楸洞里)가 있어 ‘가래 추’ 대신 ‘가을 추’(秋)자를 사용해 ‘추동’(秋洞)으로 표기했다고 한다. 가래나무가 많은 동네가 가을 동네가 됐다.

 

깊은 산골 동네인 추동마을 역시 갑천면 일대 교우촌들과 마찬가지로 박해를 피해 많은 교우가 숨어 살던 지역이었다. 특히 최근 자연 캠프장으로 주목받고 있는 추동 인근의 병지방 선바위에 많은 교우가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와 화전을 일구며 신앙생활을 했다. 안타깝게도 화전 정리 사업으로 교우들이 읍내와 도시로 이주함에 따라 1970년대 폐쇄되었지만 병지방공소는 어답산 일대 교우촌의 명맥을 이어오던 신앙 공동체였다.

 

추동공소는 단층 한옥 구조로 내부는 일자형 강당 형태로 꾸며져 있고 제단은 단순한 내부 구성에 비해 화사하게 장식돼 있다.

 

 

호랑이에게 잡혀먹히는 일도 적지 않아

 

추동공소 소개에 앞서 병인박해 이후부터 해방 전까지 강원도 횡성 지역 교우촌에 살던 교우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강원도 지역 첫 본당인 풍수원본당에서 47년간 사목한 정규하 신부의 편지를 통해 살펴보자.

 

횡성의 교우들은 오랜 세월 박해를 피해 산속에 살았기에 착하고 순박하지만 외교인들과 어울리는 데는 어려움을 겪었다. 무엇보다 산골이어서 자연재해가 잦았다. “영동 지역에는 산사태로 많은 사람이 죽었고, 홍수가 범람해서 밭들 또한 많이 유실되었습니다.”(1905년 9월 19일 자 정규하 신부 편지에서) “횡성 초당리(횡성군 공근면 학담리)에서는 젊은이 두 사람이 산사태로 죽었고, 또 두 사람은 거의 초주검이 되었습니다. 지평 밤골에서는 12세 된 소녀가 죽었고, 집 네 채가 물에 잠겼습니다. 저 역시 침수로 꽤 큰 손해를 입었습니다.”(1912년 7월 30일자 정규하 신부 편지에서)

 

또 깊은 산골이라 호랑이에게 잡혀먹히는 일도 적지 않았다. “한 여 교우가 호랑이에게 잡혀간 후 거의 몸통만 발견되었는데 복부부터 하반신이 먹혀 머리와 가슴과 손만 남았습니다. 여인의 체격이 장대했고 본명이 아가타라 했습니다. 올해에도 이 산간 지역에는 이런 흉사가 잦은데 호랑이에게 잡혀먹혔다는 외교인들 사건만도 8건이나 됩니다.”(1897년 2월 7일 자 정규하 신부 편지에서)

 

“원 베드로라는 사람이 호랑이에게 넓적다리를 물어 뜯겨 하루 만에 죽었습니다. 그는 호랑이를 잡으러 갔었는데, 그 동물을 너무 열정적으로 뒤쫓다가 호랑이와 가까이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뒤따르던 다른 포수가 즉시 총을 쏘았고 이어 세 번째 포수도 총을 쏘자 거대한 호랑이가 쓰러져 땅에 구르면서 미처 피하지 못한 원 베드로를 발견하고는 넓적다리를 물었는데, 한입에 물어뜯어 넓적다리가 완전히 떨어져 나갔고, 그는 다음 날로 죽었습니다.”(1902년 12월 29일 자 정규하 신부 편지에서)

 

화전으로 연명하던 횡성의 교우들은 늘 가난하고 굶주렸다. “많은 신자가 일용할 양식을 구하러 이리저리 옮겨 다니고 칡뿌리로 연명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한 동네에 적어도 두세 가족은 떠나갑니다.”(1924년 4월 13일 자 정규하 신부 편지에서)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두 대단히 곤궁하여 먹거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간도로 많이 이주했으며, 남아있는 사람은 돈이 없어서 큰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1926~1927년 풍수원본당 연례 보고서에서)

 

 

의병과 일본군 양쪽 폭력에 비참한 생활

 

하지만 횡성의 교우들은 자연재해와 굶주림,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존재로부터 죽음의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바로 의병과 일본군들 양쪽으로부터 받은 포악한 폭력이었다. “이곳의 여러 지역에서는 아직도 의병이랄까 떼강도들이 성행합니다. 그래서 전 주민이 공포와 비참 속에 지내는데, 의병과 일본군 양쪽으로부터 말과 글로 다할 수 없는 비참함을 겪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많은 여인이 겁탈당하고 폭행 속에 죽어 가는지, 얼마나 많은 양민이 일본군 혹은 헌병들로부터 구타를 당해 불구가 되는지, 또 얼마나 많은 무고한 이들이 포악한 방법으로 죽어가는지, 그 참상이란 한국인으로서는 상상해 낼 수 없을 정도입니다.”(1908년 12월 28일 자 정규하 신부 편지에서)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본군들은 의병을 가려낸다고 무고한 양민들을 무자비하게 체포해 갖은 고문을 하고, 군도로 사지를 토막 내는 극형에 처하는 등 공포 정치를 폈다. 일본군의 이런 폭압에도 횡성의 교우들은 정규하 신부의 지도로 민족 정신을 배웠고, 횡성 독립 만세 운동에도 참여했다.

 

원주교구장 조규만 주교와 추동공소 교우들 모습.

 

 

6ㆍ25 전쟁 이전부터 신앙 공동체 이뤄

 

해방 후 횡성군 갑천면 일대에는 동정녀 김계훈(요안나)의 전교 활동으로 많은 이들이 세례를 받았다. 추동마을에서도 6ㆍ25 전쟁 이전 김계훈 자매의 전교로 최정순(마리아)씨가 처음으로 세례를 받고, 이후 그의 딸 유양선(필로메나)과 마을 주민 몇몇이 영세함으로써 신앙 공동체를 이뤘다. 그래서 추동공소 설립연도를 1950년으로 본다. 처음에는 교우 집에서 공소 예절을 하다 점차 교우 수가 늘어남에 따라 1961년 지금의 공소를 지었다. 2017년 공소 건물 전체를 수리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추동공소는 추동마을 입구에 자리하고 있다. 공소 앞마당에 성모상이 자리하고 있고 도로 건너편에 소박한 종탑이 서 있다. 단층 한옥 형태의 추동공소는 외벽을 붉은 벽돌로 장식해 놓았다. 또 내부는 기둥 없이 일자형 강당 형태로 꾸며져 있다. 건물 네 면 모두에 창을 내어 내부 공간을 밝고 따뜻하게 했다. 제단은 장방형 평면의 단순한 내부 구성과 비교하면 제대 뒤 벽면에 십자가를 중심으로 양측에 창을 내 화사하게 꾸며놓았다.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8월 20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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