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 (목)
(백)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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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5: 부평살이와 서울 후동 모방 신부 은신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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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8-08 ㅣ No.1566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 (5) 부평살이와 서울 후동 모방 신부 은신처


최경환 성인과 같은 신심 깊은 아버지가 있었기에

 

 

- 수리산 성지에 있는 최경환 성인 흉상.

 

 

최양업 신부의 삶에 있어 부평 시절은 참으로 중요한 시기였다. 철이 들 무렵인 10대 초반을 그는 부평에서 보냈다. 이 시절 최양업에게 아버지 최경환은 ‘모든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를 본받으며 성장했다. 양업은 아버지의 두터운 신심과 헌신적인 선교 정신, 가난한 이웃에 대한 사랑 등을 그대로 흡수해 훗날 길 위의 사목자, 땀의 순교자가 된다. 

 

15세에 신학생으로 선발된 최양업은 서울 후동(현 주교동)의 모방 신부 은신처에서 1836년 2월 6일부터 그해 12월 3일까지 10개월을 살다가 유학길에 오른다. 최양업 신부와 모방 신부의 서한에 자세한 내용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양업이 모방 신부의 은신처로 왔을 당시 가족과의 이별이 아버지 최경환과 어머니 이성례(마리아)와의 마지막 작별이었을 듯싶다. 

 

훗날 최양업 신부가 쓴 아버지 최경환의 순교록을 보면 부정(父情)에 대한 그리움이 글자 한 자 한 자에 배어 있다. 최경환 성인의 인품과 영성을 증언하는 유일한 글이다. 그 내용 일부를 그대로 옮긴다.

 

“밭에서 일할 때나 집에서 일할 때나, 길에서 누구와 담화를 할 때나, 항상 천주교 교리와 신심 사정에 대한 이야기만 하였습니다. 그가 얼마나 꾸밈없이 순박하게 그리고 몸짓을 해가면서 힘차게 말하는지 듣는 사람은 누구나 탄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육신을 가꾸는 일이나, 세속적인 평판이나, 세속적 관심이나, 현세적인 사정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아니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장을 보러 갈 때에는 물건 중에서 제일 나쁜 것이나 흠 있는 것을 골라서 사옵니다. 왜 그런 짓을 하느냐고 나무라는 사람들에게는 ‘제일 나쁜 물건을 사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지 않겠소? 그런 사람이 없으면 이 불쌍한 장사꾼들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소?’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해 추수할 무렵, 농작물에 굉장한 폭우가 쏟아져서 곡식을 다 잃게 되었습니다. 모든 이가 그러한 재난을 당하여 눈물로 탄식하며 실망하고 있을 때, 프란치스코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평온한 얼굴을 보여 주었고, 오히려 평소보다 더 명랑하여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습니다.

 

- 신학생으로 선발된 최양업이 서울로 떠나면서 가족들과 이별하는 장면을 묘사한 배티성지 성당 스테인드 글라스 작품.

 

 

이상하게 여기는 교우들에게 프란치스코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절망에 빠져 있고 이처럼 비탄에 잠겨 있습니까? 모든 일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까? 세상일이 다 하느님의 안배대로 되는 것임을 왜 믿지 아니합니까? 우리의 탓과 게으름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면 모르거니와 하느님의 섭리로 추수를 망친 것인데 슬퍼할 까닭이 무엇입니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흉년이 되면 프란치스코는 주변에 사는 가난한 이들을 백방으로 도와주었습니다. 과일을 추수할 때가 되면 가장 좋은 것을 골라 이웃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남들이 탄복할 만큼 형제들과 화목하게 살았고, 어머니에 대해서는 가장 다정한 효도로 섬겼으며, 아랫사람들에 대해서도 자상하게 보살펴 주었습니다. 매일 규칙 생활을 하면서 아무리 바쁜 날이라도 신심 독서를 중단하지 아니하였고, 아침ㆍ저녁 기도를 가족 모두와 함께 공동으로 하였습니다.”

 

(1851년 10월 15일 자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청주교구 배티성지 양업교회사연구소 편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 104~105쪽 인용)

 

-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선발돼 10개월 남짓 머문 서울 후동의 모방 신부 거처는 지금의 서울 중구 주교동 일대를 말한다. 사진은 주교동 입구인 청계천 배오개다리 주변 모습.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약 10개월간 살았던 서울 후동의 모방 신부 은신처는 지금의 서울 중구 산림동과 주교동에 걸쳐 있는 마을로 ‘뒷골’이라고 불렸다. 이 집은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가 왕 요셉을 통해 북경에 온 조선 밀사 유진길(아우구스티노)ㆍ조신철(가롤로)ㆍ김프란치스코에게 주교관을 마련하고 자신의 조선 입국 경비로 사용하라고 준 자금으로 장만한 집이다. 

 

이 집은 1834년 입국한 여항덕(유방제, 파치피코) 신부를 비롯한 모방ㆍ샤스탕 신부, 앵베르 주교의 은신처로 사용됐다. “이 집의 출입문이 주변 집들의 어떤 대문에서도 보이지 않아 신자들이 왕래하기 좋았다”고 앵베르 주교는 회고했다(앵베르 주교, 「1839년 조선의 서울 박해 보고서」에서). 

 

특히 1837년 12월 18일 조선에 입국한 앵베르 주교는 모방 신부처럼, 1838년 이 집에서 정하상을 비롯한 4명의 신학생을 선발해 라틴말과 신학을 가르쳤다. 따라서 서울 후동의 이 집은 조선 교회 첫 교구청이자 주교관이요, 서양 선교사의 첫 사제관이며, 조선인 신학생들의 첫 교육장이라 하겠다. 

 

이 집에서 거처하며 앵베르 주교를 보필했던 정하상(바오로)은 배교자 김여상의 밀고로 어머니 유체칠리아와 여동생 정정혜(엘리사벳)와 함께 1839년 7월 16일 (「기해일기」에는 7월 11일)에 체포돼 순교한다. 

 

최양업 신부 연구 권위자인 양업교회사연구소장 차기진 박사는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세 신학생은 후동 모방 신부 은신처에서 라틴어와 전례 예법, 서양 관습 및 예절에 대해 배웠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세 신학생은 1836년 12월 2일 이 집에서 모방 신부에게 순명과 복종을 서약하고 다음날 정하상과 조신철의 안내로 마카오 유학길에 올랐다.

 

[평화신문, 2016년 8월 7일, 글·사진=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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