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9일 (일)
(홍) 성령 강림 대축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신앙과 정치: 그리스도인과 정치인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6-16 ㅣ No.1320

[신앙과 정치] 그리스도인과 정치인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공천 파동, 도심에 요란하던 스피커 소리를 뒤에 묻고 20대 총선이 끝났다. 많은 이가 새누리당의 의석 독점을 예상했다. 하지만 결과는 딴판이었다.

 

새누리당은 근래에 보기 힘든 최악의 참패를 당했고, 더불어민주당은 제1당이 되었지만, 호남의 참패로 찜찜하다. 제3당 자리에 선 국민의당은 캐스팅보트를 확실히 쥐었다.

 

승자가 없는 선거였다.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은 괜한 말이 아니었다. 이번 선거를 보면서, ‘하느님의 작품’, ‘하느님의 개입’이 아니고서는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없다고 말하는 이를 여럿 보았다. 그만큼 이번 선거가 절묘했다는 말이겠다.

 

선거가 끝나자 교회 언론은 가톨릭 신자 국회의원을 정리했다(가톨릭신문, 2016년 4월 24일자). 전체 국회의원 300명 가운데 25.7%인 77명이 가톨릭 신자라고 한다(개신교 93명, 불교 52명). 한국교회 복음화율(2015년 12월 31일 기준 10.7%)을 두 배 이상 웃돈다고 했다.

 

천주교와 개신교 모두 합친다면 170명의 그리스도인이 20대 국회에 입성했다. 그리스도교 국가도 아닌 한국에서 반수 이상의 국회의원이 그리스도인이라니, 놀라운 일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한국 정치사에서 그리스도교의 정신을 맛볼 수 있을까?

 

참고로 ‘역대 최악의 식물국회’라고 평가하는 지난 19대 국회에서 개신교 국회의원의 숫자는 120명이 넘었다고 한다(천주교 신자는 73명).

 

 

트럼프와 프란치스코 - 벽을 쌓는 그리스도인과 다리를 놓는 정치인

 

언론은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와 프란치스코 교황을 마주치게 했다. 트럼프는 “멕시코인은 성폭행범이며 마약과 범죄를 가져오는 주범”이라고 비하하며, 국경에 장벽을 설치하겠다고 했다. 그의 막말에 사람들은 아연실색했다.

 

올해 2월 멕시코 사목 방문을 마치고 바티칸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기자들이 교황에게 트럼프에 관해 물었다. 좀 길지만, 전문을 적는다.

 

“교황님은 이민 문제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국경의 다른 쪽인 미국에서는 이에 대한 강한 캠페인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공화당 후보 중 한 명인 도널드 트럼프는 한 인터뷰에서 교황님을 ‘정치적 인물’로 표현하면서 이민정책에서는 멕시코 정부의 볼모라고까지 하였습니다.

 

트럼프는 2,500km의 벽을 만들 것이고, 천백만 명의 불법 이민자들을 추방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며, 미국의 가톨릭 신자들은 어떻게 투표를 해야 할까요?”

 

프란치스코 교황의 답변이다. “저를 정치적인 인물이라고 해주신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정치적인 동물’이라고 정의했는데, 덕분에 제가 인간은 된다고 보입니다. 제가 볼모라고요? 여러분이나 사람들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벽을 쌓는 것만 생각하고 다리를 놓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복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에게 투표를 할 것이냐 말 것이냐? 만일 그분이 그렇게 말했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장로교 신자인 트럼프는 즉각 “종교 지도자가 한 개인의 믿음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반발하며, “나는 그리스도인인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가톨릭의 수장이 다른 사람의 종교와 믿음에 간섭하거나 충고할 권리는 없다는 말이겠다.

 

트럼프의 오만함은 계속되었지만, 여론은 싸늘해졌다. 그러자 그는 미국의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사실 교황과 싸우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며 꼬리를 내렸다. 언론보도와 달리 교황은 “훨씬 부드러운 톤으로 말했을 것”이고, “당시 교황이 아마 멕시코 정부 측에 따른 한쪽의 입장만 들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는 바로 그날 다른 장소에서 “나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아주 많이 존경한다. 그는 개성이 많고 활력이 넘친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종교 지도자로서도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역시 셈에 능한 정치인이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막말의 극우 정치인은 그리스도인 프란치스코 교황을 두고 ‘정치인’이라 하고, 교황은 이른바 ‘갈라진 형제’인 개신교 정치인이 한 말을 듣고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한다. 그 내막은 위에서 본 바와 같다.

 

트럼프의 정치적 노림수는 차치하더라도, 여기서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그리스도인은 무엇하는 사람인가?’라는 근본적 물음을 다시 새기게 한다.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다. 이 두 사람의 비교가 결코 개신교에 대한 가톨릭의 우위성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리스도인은 누구냐?’라는 물음에 답하려는 의도이다.

 

두 사람은 모두 이민자의 아들이다. 트럼프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독일계 미국인이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탈리아계 아르헨티나인이다.

 

한 사람은 반이민 정책과 반이슬람 정책을 옹호하지만, 다른 한 사람은 난민에게 적극적으로 문호를 열라 하고, 종교 간의 화해와 평화를 말한다. 한 사람은 ‘나부터 살고 보자.’며 장벽을 높이라 하고, 다른 한 사람은 ‘같이 살자.’며 장벽을 허물라 한다. 배타와 관용, 그 어디가 예수 그리스도에 가까운가?

 

바오로 사도는 참된 그리스도인에 대해 “하느님의 말씀으로 장사하는 다른 많은 사람과 같지 않고, 성실한 사람으로, 하느님의 파견을 받아 하느님 앞에서 또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는” 사람(2코린 2,17 참조)이라고 분명하게 밝힌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마태 16,16)와 연결된 사람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지상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을 살아가는 데서 그대로 드러난다. 중심의 부자가 아닌 주변부의 가난한 이들을 향했던 예수님의 길을 과연 어떻게 따르는 지에 따라, 내가 믿는 하느님이 ‘지금 여기에’ 존재하신다.

 

믿음이란 본디 존재의 확신이 아니었다. 신앙의 언어는 이성의 언어와 달랐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존재를 제자들에게 묻지도, 논증하지도 않으셨다. 신앙은 초월적 하느님에 대한 동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대로, 곧 세상을 변화시키는 공감과 자비의 행동에서 하느님의 형상이 비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credo)은 심장(cor)을 던지는(dare), 곧 ‘헌신’과 연관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던지는 헌신의 모범이셨고, 공감과 자비는 하느님 정의의 바탕임을 보여주셨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나라를 수호한다

 

요한 묵시록과 공산당 선언을 유토피아적 예언서로 간주했던 희망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는 「유토피아 정신」(1918년)에서 이렇게 말했다.

 

“불의한 자만이 신을 통해 존재한다. 정의로운 자들은, 신이 그들을 통해 존재한다.” 다시 말해 하느님께서 세상에 존재하시는 방식은 정의로운 사람들의 행위를 통해서이다. 하지만 불의한 자들은 하느님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려 한다.

 

세상에는 정의로운 이들과 불의한 이들이 모두 존재한다. 교회 안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드러내는 사람이다.

 

블로흐의 유토피아론과 희망의 철학은 개신교 신학자인 유르겐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과 가톨릭 신학자인 요한 밥티스트 메츠의 ‘정치신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블로흐의 주저 「희망의 원리」는 ‘아직 아닌(noch nicht)’ 것이 확인되는 순간에 희망이 시작된다고 일러준다. 그리스도인의 하느님 나라도 ‘이미 와 있지만, 아직 아닌’ 그것으로 남아있지 않은가?

 

하느님 나라는 한 번의 선거로 뒤바뀔 정부가 아니다. ‘이미’와 ‘아직’이라는 긴장과 희망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수호해야 할 것은 하느님 나라이다. 비통한 현실을 목격하면서 ‘모욕적 무관심’이나 ‘파괴적 냉소주의’에 빠진다면, 하느님 나라는 영원히 오지 않는다.

 

트럼프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은 “고문당한 이들, 상처입은 이들, 채찍질당한 이들, 굶주리는 이들과 난민들의 몸에서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몸”을 알아보고 정성껏 돌보자고 한다(「자비의 얼굴」, 15항 참조).

 

그리스도인이 삶을 변화시킬 때나 마음을 움직일 때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와 있다. 지금이 그때라고 교황은 일러준다. 「희망의 원리」의 본디 제목은 ‘더 나은 삶을 위한 꿈’이다. 지금이 바로 그 꿈을 꿀 때다!

 

* 오민환 바오로 - 가톨릭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뮌스터대학교에서 기초신학을 공부하였다. 현재 기쁨과희망 사목연구원 연구실장으로 있으며, 신앙의 희망을 이성적으로 설명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사회적 책무에 대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6년 6월호, 오민환 바오로]



2,688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