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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국민이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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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4-20 ㅣ No.1308

[경향 돋보기 - 다시 총선에] 국민이 주인이다

 

 

춘사불래춘(春似不來春), ‘봄은 와있다고 하나 봄은 아직 멀었다.’는 구절이 문득 떠오른다. 20대 국회의원을 선출해야 할 4?13 총선이 눈앞에 다가왔건만 선거의 주인인 유권자는 아직도 변방에 서있고 정치권만 부산하다.

 

남쪽에서 꽃소식이 들려와 봄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듯, 국민은 야권의 분열을 보면서 선거철이 가까웠다는 걸 알아차렸고, 선거구 획정 과정을 지켜보면서 기득권을 지키려는 국회의원들의 속내를 보았다. 과거의 선거와 다르지 않다. 각 당의 후보 공천 과정은 극심한 당내 갈등과 이기심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불청객인 4월의 황사가 우리를 괴롭히듯 2016년의 봄도 그리 쾌청해 보이지 않는다.

 

우리의 민주화 역정 또한 그러하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결과 얻어낸 민주화 이행 이후 2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국민(民)이 주인(主)인 민주(民主)정치의 본령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선거를 통해 여섯 번의 정권교체를 이루어낸 구체적 성과에도 우리의 정치 수준은 봄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정치풍토의 개선은 유권자의 몫

 

19대 국회와 4·13 총선을 앞두고 펼쳐진 정치권의 파행은 우리 사회를 다시 추운 겨울로 되돌리고 있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다. 야권 분열로 불로소득을 얻게 된 새누리당은 그 소득을 서로 자파에 유리하게 챙기려고 내분이 극심하다. 야권은 큰 그림은 생각하지도 못한 채 의석 챙기려는 욕심만 보여준다. 그들의 안중에 국민은 없다.

 

이러한 정치 풍토와 선거 과정이 언제까지 민주의 봄을 차단하도록 내버려둘 것인가? 정치권에 기대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결국, 유권자의 몫이다. 국민의 힘이 꽃바람과 화사한 봄을 재촉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좌절감의 극복과 자신감의 회복이다. 노력하고 또 힘썼지만 결국 정치권은 변하지 않기에 이제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다. 이러한 선거제도와 선거 구도에서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야 그 결과는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며, 다음 국회 또한 국민의 뜻과 동떨어져 그들만의 정치를 해나갈 것이라는 자조의 목소리가 높다.

 

그렇다. 소선거구제의 단점을 보완하고자 논의했던 비례대표제의 확대는 결국 현역 국회의원들의 이해관계로 일찌감치 무산되었다. 오히려 선거구 획정 과정에서 비례대표 의석수가 줄어버렸다. 헌법재판소가 인구 편차를 최대 1대 2로 선거구 획정을 다시 하라는 결정도 시한을 훌쩍 넘겨 의결되는 바람에 공천도 덩달아 늦어지고 따라서 유권자가 후보를 검토할 시간도 촉박해졌다. 이 모든 사안이 유권자를 도외시한 결과임에 틀림없다.

 

필자는 강의를 듣는 학생과 청년들에게 선거의 중요성과 투표 참여의 귀중한 권리를 줄곧 피력했고, 4·13 총선에서 20-30대가 70-80%의 투표 참여율을 보여주면 앞으로 정치권이 청년 일자리, 대학 등록금, 영유아 보육 등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최근 정치권이 보여준 파행을 보면, 이러한 권유가 설득력을 잃게 된다.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허공을 헤매는 메아리 같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민주정치를 원한다면 힘들지만, 국민이 주인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 화사하고 따뜻한 봄을 맞으려면 4·13 총선에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 우리는 권위주의 정치를 극복한 귀중한 유산이 있지 않은가?

 

 

지역주의 투표 성향을 극복해야

 

유권자들은 정치권이 보여준 허점이 무엇인지 성찰해야 한다. 우리 모두 알고 있다시피 지역주의 투표 성향을 극복해야 한다. 지역주의 투표는 결국 지역주의 정치 구도를 만들어 정치권에 손쉬운 정치, 곧 유권자를 도외시하고 무시하는 정치를 가능하게 만들어 준다. 영남은 새누리당 절대 우세, 호남지역은 야당 절대 우세의 구도가 존속되어서는 곤란하다.

 

근현대 사회에서 투표에 작용하는 계급과 계층, 교육과 소득 등 여러 변수가 전근대적인 ‘지역’이라는 변수에 따라 밀려나고, 지역성이 투표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어 ‘과잉’ 지역주의 분할 구도가 지속한다면 우리의 삶에 직결된 중요 쟁점은 사장될 수밖에 없다.

 

봉건적 지역주의는 한국 사회와 문화 속에서 오랫동안 이어왔으며, 군부 권위주의 정권은 장기집권을 하려고 지역감정을 이용하여 정치권력을 연장하고 공고히 해왔다. 또한 현재의 지역주의 정치 구도는 군부 권위주의 정권 시대의 ‘민주 대 반민주’ 구도의 해체과정에서 왜곡되었다. 민주 이행의 과도기에 군부 권위주의 세력의 지배전략과 1987년 민주정치 세력의 분열로 말미암아 나타난 것이다.

 

안타깝게도 1987년 대선을 전후하여 지역주의는 ‘강요된 지역주의’에서 ‘자발적 지역주의’로 변화하였다. 점차 지역주의 구도에 일정한 완화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도 있으나,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정치권이 상정하는 지역 구도를 넘어서려면 우리를 둘러싼 총선 쟁점을 신중하게 점검하고, 벽보에 붙은 후보자의 면모를 냉철하게 살펴야 한다. 권위주의 정치에서 민주정치로 넘어서는 단계에서는 유권자들의 뜻을 모으기가 상대적으로 쉬웠다. 권위주의 정권의 억압은 거셌지만, 그에 대항하는 세력의 규합은 쉬웠다.

 

‘독재타도 호헌철폐’의 구호로 한마음 한뜻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민주 이행의 길에 들어서 민주정치 공고화로 넘어서려면 여러 사회 쟁점에 대한 충분한 논의와 숙고, 지혜의 덕목이 필요하다.

 

 

쟁점과 전문성을 갖춘 국회의원을

 

우리의 삶을 에워싼 문제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최근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불거진 우리 정부의 대응은 국가 안보문제와 외교의 중심문제로 부상하고, 영유아 보육 예산과 청년실업, 노인복지 문제 등은 경제 재정, 복지정책의 우선순위로 뜨거운 쟁점이다. 지속하는 노동문제는 물론, 교육정책과 환경의 문제도 우리를 압박하고 있다.

 

각 사회적 쟁점은 유권자 각자의 가늠자로 분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그 가늠자의 공통분모는 역시 ‘공동선’이 되어야 한다. 나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을 탓할 수 없으나, 동시에 함께 삶을 풍요롭게 영위할 수 있는 ‘공동선’의 정책을 선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북한 정권 지도층의 잘못된 판단을 미리 차단하는 것은 타당하다. 그러나 동시에 북한 주민은 결국 우리와 함께할 형제자매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경제 활성화를 유도하는 정책을 지속하되 소외된 사회집단의 열악한 복지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민주사회의 근간이 되는 중산층의 복원이 필요하며, 부의 대물림으로 소득의 불평등이 커지고, 교육 기회의 불균형으로 희망의 끈을 놓아버리는 젊은이들이 없도록 과감한 정책전환도 필요하다.

 

신자유주의의 극심한 무한경쟁 속에서 인간성이 상실되고, 효율 우선의 논리로 생태와 환경파괴가 지속하는 상황을 좌시할 수 없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공동선’의 가치가 국회의 중심에 서야 한다. 종교와 지역, 성별, 학벌, 나이, 출신 등의 선입견을 버리고 ‘공동선’의 가치에 투신할 수 있는 후보를 선출하고, 그런 정당을 지지해야 한다.

 

사회적 쟁점을 제대로 파악해 정책 쟁점으로 전환하고, 법률의 제정과 개정으로 마무리하려면 전문성을 갖춘 국회의원이 필요하다. 입법 기능은 물론 예산 심의와 국정감사, 국정조사의 행정부 견제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국회의원들이 고도의 전문지식을 가져야 한다. 지난날 권위주의 통치 아래에서는 민주화를 위한 투지와 구호가 중요한 덕목이었지만 정치과정이 안정화되고 제도화될수록 입법부와 행정부를 견제하려면 구체적 정책 쟁점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후기 산업시대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경제, 사회, 문화, 교육, 환경보존, 소비자 보호 등의 문제가 급속히 정책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국회의원들의 입법 활동을 보좌하는 비서관, 각 상임위원회의 전문위원, 입법조사처와 예산정책처 기능의 확대는 물론이고 국회의원도 전문적 지식과 식견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헌법 정신에 걸맞은 국회의 위상을

 

4·13 총선을 통해 우리나라 헌법 정신에 걸맞은 국회의 위상을 정립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들어야 한다. 국회와 대통령이 대등한 권력관계의 상호견제와 균형 아래에 국정을 논의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필요하다. 수개월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와 박근혜 대통령의 갈등이 일방적인 청와대의 뜻으로 마무리되었고, 여당의 ‘친박’, ‘비박’, ‘진박’ 운운하는 행태가 계속되는 가운데, 국회의 독립적 위상을 제대로 정립할 수 없다.

 

여야를 막론하고 지금의 권력구조 아래에서 국회의 기능을 똑바로 인식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대통령제의 철학적 기반은 ‘권력분립’과 ‘상호견제와 균형’에 있다. 국민이 정치권력을 창출해 정치주체들에 그 권력을 나누어 줌으로써, 정치주체들은 주어진 고유 임무를 다하면서, 동시에 다른 정치권력 주체의 권력 남용을 제어하여 힘의 균형을 이루도록 만들어진 정부형태다. 대통령이 중요한 구실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고, 국가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으나, 대통령에게 힘이 쏠려 정치권력의 중심이 되도록 하는 것은 본질에서 적절하지 않다.

 

정부수립 이후 대통령제의 이식으로 권력분립과 상호견제와 균형에 대한 경험적 요구와 철학적 사유가 부족한 상황에서, 우리의 현실정치는 대통령제의 본질과 괴리되어 왔다. 전쟁과 혁명, 쿠데타와 유신,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권력구조에 대한 점검이 어려웠고, 계속되는 위기와 긴장 속에서, 정치적 논쟁의 암흑기 속에서 대통령제의 철학과 국회의 위상을 논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 국회는 대통령제의 기본 철학을 기반으로 현실정치와의 틈새를 메워나가야 한다. 국회 권력의 확대를 통한 행정부 견제, 분점 정부 아래에서의 대통령과 국회의 일상적 대화, 매개체로서의 정당의 역할 제고에 더욱 힘써야 한다.

 

국회의 위상 정립에 따른 국회에 대한 사회적 요구는 ‘도덕성’ 회복과 ‘특권 내려놓기’의 시대정신과 연결된다. 최근 수년간 정치권은 국민의 뜻을 겸허하게 수용하고 봉사하는 자세에서 일탈하여, 여전히 국민에게 군림하는 모습을 보였다. 제19대 국회 초반에 논의되었던 국회의원 특권 내려놓기도 시늉에 그쳤다. 또한 정경 유착, 막말 파동, 부정선거 등 불법 행위와 비도덕적 행태로 정치 불신을 자초했다.

 

국내 한 연구기관의 신뢰 수준 조사에 따르면, 직장과 학교 동료, 교육기관, 언론, 대기업, 경찰, 이웃 사람, 처음 만난 사람 등 14개 대상 가운데 행정부가 12위, 정당이 13위, 국회가 14위를 차지하였다. 국회를 포함한 정치권이 불신 대상의 선두에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다. 그 꽃을 탐스럽게 피워내 화사하고 따뜻한 봄이 오게 해야 할 주체가 바로 유권자다. 황사가 계속될지 모르지만 오는 4월 13일 국민 모두 나서서 제20대 국회를 제대로 출범시키자. 이는 민주정치의 주인인 국민의 권리이자 막중한 의무이다.

 

* 이정희 베드로 - 한국외국어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한국 평협 자문위원, 사회정의시민행동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한국정치학회 회장, 중앙선거방송토론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경향잡지, 2016년 4월호, 이정희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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