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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지] 발칸: 자그레브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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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10-21 ㅣ No.1517

[발칸의 빛과 그림자 속으로] 자그레브 단상


 

- 크로아티아와 자그레브의 상징을 모자이크로 장식한 지붕으로 유명한 성 마르코 대성당 안에는 이반 메슈트로비치의 조각 작품들이 있다.


태조 이성계가 한창 젊은 시절, 어느 날 사냥을 하다가 목이 말라 우물가 여인에게 물을 청하였다. 여인이 수줍은 손길로 바가지를 건네는데 물 위에 버들잎이 가득 뿌려져 있었다.

“물을 주려거든 그냥 줄 일이지 이게 무슨 짓인가?” 하고 화를 내자 여인이 답했다. “갈증 때문에 달려오신 것 같아 급히 마시고 체하실까봐 그리하였나이다.” 감탄한 이성계는 그제야 여인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이성계와 신덕왕후 강씨의 첫 만남이었다.

느닷없이 그들의 만남을 얘기하는 건 그저 ‘목마른 사람들’ 때문이다. 크로아티아의 수도인 ‘자그레브’는 이 지역을 통과하던 장군이 목마른 병사들을 위해 우물을 파라고 한데서 비롯된 이름이라고 한다. (물을) ‘푸다’, ‘뜨다’라는 뜻인 ‘zagrabiti’에서 ‘Zagreb’가 유래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한 것으로 전해진다. 누군가의 갈증을 풀어주는 얘기로부터 비롯된 도시라, 느낌이 참 좋은 이름이었다.


- 자그레브의 성문 가운데 하나였던 ‘돌의 문’에는 1731년 큰불에도 타지 않은 성모자화가 있어서 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기도 한다.

 

 

구시가인 그라데츠 지역에서 66미터짜리 케이블카로 순간 상승하여 고르니 그라드에서 자그레브 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보고 오래된 골목들을 지나 성 마르코 성당 쪽으로 향했다. 너른 광장에 들어앉은 성 마르코 성당은 더 환하고 예뻤다. 문이 닫힌 성당 앞으로 영화 「신부의 아이들」의 그 젊은 신부가 황급히 뛰어가는 장면이 오버랩 되었다.

 

성 마르코 성당을 지나 골목을 따라 내려오다 ‘돌의 문’을 통과했다. 자그레브 성벽에는 다섯 개의 문이 있었는데 1731년 대화재 때 모두 소실되고 이곳만 남았다고 한다.

그 불길 속에서도 화를 입지 않은 성모자화가 이 문 안에 있어서 자그레브 사람들이 늘 찾아와 기도하는 곳이다.


- ‘성 스테파노 성당’이라고도 불리는 자그레브 대성당 광장의 황금빛 성모님.



크로아티아가 가톨릭 국가라서 가능한 일이지만 도심 한복판에 늘 열려있는 기도처가 있다는 건 부러운 일이었다. 막 문을 나서 말 위에 올라탄 제오르지오 상을 보며 내려가는데, 한 수녀님이 장미 한 송이를 들고 들어가 성모님께 봉헌했다.

자그레브 대성당 앞마당은 번잡한 세상 속에서 불쑥 기도할 수 있는 곳, 영원을 향하는 길목으로 들어선 듯한 넓이와 여유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황금빛의 성모님은 그 높이에서도 세상을 향해 두 팔을 펼치고 계셨다.

 

1093년에 헝가리 왕 라디슬라스(Ladislas)가 건설을 시작했으니 얼추 천 년이 다 되어가는 성당이다. 그동안의 신산한 질곡을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완공도 되기 전부터 몽골족의 방화로 완전히 파괴되어 그라데츠 구역을 중심으로 외벽을 쌓고 성당을 재건했다. 하지만 1880년에도 대지진으로 또 다시 수난을 겪어야 했다.


- 성당 뒤쪽 벽에는 글라골 문자가 새겨져 있다.


성당에는 정말 많은 사람이 기도하고 바라보며 오갔다. 그들은 글라골 문자가 새겨진 벽 아래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께 꽃을 바치고, 그 옆으로 이어지는 성모자상 앞에서 촛불을 켜고 기도했다.

 

자그레브 대주교였던 스테피나츠 복자는 붉은 옷에 황금관을 쓰고 제대 뒤에 안치되어 있었다.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그를 무척 존경하는 분위기였다. 젊은이들도 할머니들도 그의 관 앞에서 오래 기도하며 머물렀다.

1998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시복했는데, 그의 시복은 나치 지지 전력 때문에 논란을 빚었다. 그는 나치의 괴뢰정권인 우스타샤의 안테 파벨리치가 수용소를 짓고 유다인과 세르비아인 39만 명을 학살할 때 암묵적인 지지를 보냈다는 혐의를 받았다. 당시 야세노바츠 수용소는 ‘크로아티아의 아우슈비츠’로 불릴 만큼 유다인에게 악명이 높았다. 우스타샤는 나치가 한 그대로 유다인을 절멸시키려 했고, 여기에 세르비아 정교도까지 포함시켜 박해했다.

인류의 역사에는 반성하고 참회해야 할 일이 많다. 우스타샤 또한 그 악행의 정도에서 결코 빠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크로아티아에서는 해마다 안테 파벨리치를 위한 미사가 거행된다고 한다. 유다인 단체가 성명을 내고 반대시위도 하지만 별로 달라지는 건 없는 모양이다. 2013년 월드컵 예선 경기에서는 결선에 진출한 크로아티아 대표팀 주장이 홈구장을 메운 관중에게 구호를 선창했다. “조국을 위해!” 이에 관중이 화답했다. “준비됐다!” 이 일로 국제 축구 연맹(FIFA)은 크로아티아 주장의 월드컵 본선 출전기회를 박탈했다. 그들이 외친 것은 우스타샤의 구호였다고 한다. 대수롭지 않게, 불행한 역사를 희화화하는 것은 어디서든 너무나 위험한 일이다.

 

스테피나츠 복자에게 발칸의 아픔이 치유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 주십사고 청했다. 우스타샤에 희생된 세르비아 사람들만이 아니라 악행을 저지른 크로아티아 가톨릭 신자들 또한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왜 그들은 세르비아 정교도를 적으로 간주했을까. 무엇보다도 발칸의 정치 문화적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 대성당 제대 뒤쪽에 안치되어 있는 스테피나츠 복자의 관앞에서 자그레브 사람들은 오랫동안 머물며 기도했다.



그런데 가톨릭교회는 책임이 없을까? 교회에서는 그들이 하느님 안에 한 형제임을 분명히 가르쳤어야 하지 않을까. 신자들이 악의 소용돌이에서 헤맬 때 교회는 분명한 잣대로 그들을 이끌었어야 했다. 그런데 오히려 우스타샤의 인종청소에 동의하고 심지어 적극적으로 함께했다는 오명까지 뒤집어쓰고 있다. 참담한 노릇이다.

교회가, 성직자들이, 특히 고위 성직자들이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선 예수님의 심정을 헤아려, 개인적으로든 공동체의 목소리로든 어떤 상황에서도 폭력의 도구가 되지 않도록 양들을 제대로 이끌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의 무덤을 떠나왔다.

* 이선미 로사 - 가톨릭교리신학원 성서영성학과를 수료했다. 여러 차례 해외성지를 순례하다보니 가까운 성지와 우리 전통에도 눈이 뜨여 조금씩 관심을 기울이는 중이다.

[경향잡지, 2015년 10월호, 글 · 사진 이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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