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강론자료

대림 3 주일-나해-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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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1999-12-10 ㅣ No.167

대림 3 주일 (나해)

          이사 61,1-2a.10-11       1테살 5,16-24      요한 1,6-8.19-28

     1999. 12. 12.

주제 : 신앙인으로서 할 일

 

한 주간 잘 지내셨습니까?

벌써 대림 세 번째 주일을 맞았습니다. 대림 세 번째 주일은 교회에서 자선주일로 정하고, 이웃을 향해서 우리가 얼마나 자선의 손길을 펼치고 있는지 그 자세를 돌아보게 합니다.  신문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소식의 한가지는 다른 사람들보다 적게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자비의 손길을 더 널리 편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습니다.  지난해에는 아이엠에프의 한파 때문에 이웃을 향한 손길도 많이 움츠러들었는데, 지난해보다 조금 더 나아졌다고 올해에는 대기업들조차 그 손길에 몹시 인색하다는 글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사회의 모습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어떤 자세로 지내고 있는지 돌아보는 것도 의미는 있을 듯 합니다.

 

대림 세 번째 주일에 우리가 듣는 하느님의 말씀은 신앙인으로서 할 일을 말씀하십니다.

과학이 발전하면 상대적으로 신앙은 그가 설 수 있는 자리를 잃거나 그 자리가 축소된다고 말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신앙에 대한 것까지도 모두 과학으로 해석하려고 합니다.  

 

지난주간에 텔레비전에서 주간 드라마 허준을 보았습니다. 이야기의 한 대목에 ’구침지의’라는 부분을 보았습니다. 살아있는 닭에 침을 아홉 개 찔러도 아무렇지도 않게 닭이 살아서 움직이는 시합은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텔레비전에서야 카메라의 기법 때문에 적당한 조작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실생활에서 병을 얻은 상당수의 사람들은 먼저 서양의 방법에 따른 진료를 하다가 지치면, 한의학에 따른 방법으로 돌아서기도 합니다.  찢고 째고 분석하는 것에는 서양의 학문이 더 나을지는 몰라도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에는 동양이 앞서 나갈 거라는 생각을 하게 한 부분이었습니다.

 

가톨릭의 신앙도 ’있는 그대로의 사람을 하느님이 구원하시려는 의미를 강조해서 본다면, 서양식이라고 하기보다는 동양식의 전통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만 서양이 먼저 받아들이고 체계화 시켰다고 해서 서양의 종교라고 밀어 부치는 것보다는 달리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게 하느님과 사람의 관계를 친밀하게 바라보는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하느님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말씀하십니다.  이웃을 향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자세를 돌이켜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억눌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찢긴 마음을 싸매 주고, 포로들에게 해방을 알리고, 옥에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가져다주는 삶을 우리가 유지하는지 돌이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대희년의 시작도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올해 성탄전야가 되면 대희년이 선포될 것이고, 그 기간은 1년 열흘정도 지속될 것입니다.  단순히 희년(禧年)이 선포된다고 하는 것만으로 우리의 삶이 기쁨으로 가득 차는 것은 아닙니다. 정치분야에서는 새로운 밀레니엄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축제를 말하고, 커다란 특혜를 베푸는 것처럼 사면(赦免)과 복권(復權)을 이야기합니다.  그에 비슷하게 신앙인의 입장에서 희년의 기쁨을 말하거나 느낄 수 있게 하는 방법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사람들은 자신에게 닥쳐오는 일들에 대해서 커다란 관심을 갖습니다.  특히 그것들이 내가 삶에서 얻거나 잃을 수 있는 이익이나 재산이나 명예에 관련된 것일 때 훨씬 더 민감해집니다.  오늘 복음에도 세례자 요한을 향하여 질문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유다인이 보냈다고도 기록하고, 동시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보냈다고 기록한 질문자들은 아마도 커다란 위협을 느꼈던가 봅니다.  그래서 요한에게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권리를 묻고 자기들이 세운 기준에 합당하지 않자 따집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두고 그분의 뜻을 선포하려고 작정했던 요한에게 그 소리는 신경 쓸 이유가 없는 말이었습니다.

 

우리는 삶에서 얼마나 자연스럽게 우리의 신앙을 표현하고 삽니다.

한국의 인구가운데 천주교신자 비율은 약 5%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렇게 적지 않은 비율의 신자들이 과연 여러 환경과 생활에서 신앙을 얼마나 드러내고 사는지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쉽게 들 수 있는 본보기로 음식점에서 성호를 긋고 음식을 먹는 일이 신앙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지만,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을 자신감 있게 드러내고 행동하는지 바로 우리자신을 돌이켜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겪는 그런 어려움은 세례자 요한이 겪었던 어려움과 비교한다면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겪었던 상황이 어렵다거나 혹은 우리가 겪는 상황이 어렵다거나 하는 판단을 강조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우리가 평소에 표현하고 드러냈던 모습대로 우리에게 다가올 축복의 크기도 달라진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면 우리가 보이는 삶의 본보기가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 삶의 한 구석에 유다인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보여주었던 모습이 있는지, 그런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면 효과적으로 어떻게 해야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우리의 노력이 더 필요할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에 쉽게 참여할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눈에 볼 수 없는 하느님을 믿는 것과도 비슷할 것입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의 눈에 당장은 보이지 않더라도, 비록 내가 없다고 큰소리로 항변하고 싶다고 하더라도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은 따로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현실이 어려울 때, ’하느님이 계시는가?  하느님이 만일 계신다면 내가 이런 고통과 어려움을 당하도록 왜 내버려두신다는 말인가?’하며 질문하고 응답을 얻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왜곡된 심성으로 질문한다면 하느님의 음성은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두 번째 독서에서 알려주는 삶의 방식을 따라서 살고자 할 때에 우리는 어려운 현실에서도 하느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테살로니카 사람들에게 바울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은 하느님의 소리를 알아듣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미사에 정성을 모아 함께 하면서 그 조건에 일치할 수 있는 도움을 함께 간청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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