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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병인박해 역사신문 제2호 1866년 1월: 천주교 허용 기대감 고조,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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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2-07 ㅣ No.738

[병인박해 150주년 - 역사신문] 제2호 1866년 1월


‘천주교 허용’ 기대감 고조··· 그러나



남종삼이 흥선대원군을 만나 ‘서양 주교의 힘으로 러시아 남하를 막자’는 방아책을 전달하고 있다. 그림=탁희성


조선에 천주교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리란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최근 승지 남종삼(南鍾三, 요한, 49)이 ‘러시아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조선에 있는 서양 주교를 이용하자’는 방아책을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46)에게 전달하자 대원군이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사실이 알려졌다.

다블뤼 주교는 한양에 거주 중인 한 신자가 “이 사실이 신자들 사이 급속도로 퍼져 종교 자유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며 “한양에 어울리는 큰 성당을 지을 이야기를 할 정도로 신자들이 기뻐하고 있다”고 밝혔다.

경흥부사 윤협은 지난해(1865) 9월 ‘서양인 수십 명이 강을 건너와 감영에 가서 러시아의 공문을 전달하겠다고 하였으나, 국경을 넘을 수 없다는 뜻으로 타일러 보냈다’고 보고한 바 있다. 같은 해 11월에도 러시아인들이 두만강을 건너와 통상을 요구한 사실이 있다고 함경 감사 김유연이 조정에 알렸다.

이러한 일련의 러시아 통상 요구가 대원군이 남종삼의 방아책을 받아들이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게 정계의 일반적 견해다.

남종삼은 기자에게 “대원군이 내게 ‘주교가 러시아의 조선 점령을 막을 수 있느냐’고 물어 ‘그렇다’고 하자 ‘그럼 주교와의 직접 만남을 주선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대원군 지시에 따라 좌의정 김병학(金炳學, 45)에게 방아책 내용을 알렸고, 김병학도 그 내용을 유심히 읽고 숙고한 후 “좋소”라는 짧은 대답만 남겼다고 말했다.

이번 일에는 대원군의 부인 민씨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확인됐다. 고종 임금의 유모 박 마르가리타씨는 “부대부인 민씨께서 ‘남편에게 편지(방아책)를 보낸다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의 전갈을 베르뇌 주교의 복사인 홍봉주(洪鳳周, 토마스)에게 비밀리에 전달했다”고 밝혔다. 남종삼은 홍봉주로부터 부대부인 민씨의 뜻을 확인한 후 방아책을 작성해 대원군에게 전달한 것으로 확인됐다.

남종삼은 대원군과의 만남 후 이 사실을 신자들에게 전했다. 이에 따라 김계호(토마스)가 황해도 일원을 사목 방문 중인 베르뇌 주교에게, 이유일(안토니오)이 내포 지방 당진 신리에 거처하고 있던 다블뤼 주교를 찾아가 남종삼의 방아책 제안과 대원군의 면담 요청 사실을 알렸다.

다블뤼 주교는 1월 25일에, 베르뇌 주교는 1월 29일에 각각 한성부에 도착해 현재 모처에서 대원군과의 면담을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타임머신 2016> 남종삼은 누구인가

남종삼(1817~1866, 요한)은 남인계 학자 남탄교의 아들로 1817년 태어나 백부인 상교(아우구스티노)의 양자로 입적했다. 22세 때인 헌종 4년(1838년) 문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 교리와 승지를 거쳐 고종 때에는 왕실 교육을 담당했다.

그는 또 1861년 조선에 입국한 리델 신부의 우리말 선생이었고, 베르뇌ㆍ다블뤼 주교와 교류하면서 교회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홍봉주(토마스), 이유일(안토니오), 김면호(토마스) 등이 1865년 말 ‘이이제이 방아책’을 흥선대원군에게 여러 차례 건의했으나 거절당하자 직접 상소문을 작성해 대원군에게 올리는 한편, 프랑스 주교와의 회동도 건의했다.

때마침 청나라에서 천주교 박해가 확산되자 대원군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고려해 방아책을 접고, 천주교 신자에 대한 체포령을 내린다. 이것이 ‘병인박해’의 시작이다.

남종삼은 1866년 3월 경기 고양에서 체포된 후 3월 7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홍봉주와 함께 순교했다. 유해는 절두산 순교 성지에 안치돼 있으며 1984년 5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으로부터 시성됐다.


교회 지도자들, “흥선대원군 믿을 수 없다”

신앙의 자유가 허용될 것이란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조선 교회를 사목하고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선교 사제들은 대체로 대원군에 대해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부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천주교 신앙의 자유가 쉽게 오지 않으리라” 전망했다.

조선대목구장 승계권을 가진 부주교 다블뤼 주교는 “대원군은 지금까지 우리 신자들에게 관여하고 있지 않은데 이런 상황이 얼마나 지속될지 모른다”면서 “대원군의 성격이 격하고 잔인하며 사람 목숨을 가볍게 여겨 만약 천주교를 공격하는 날이면 무섭게 박해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문경새재 연풍 산막골에서 영남권역을 사목하고 있는 페롱 신부는 “대원군이 포악함과 탐욕, 생명 경시로 많은 사람의 마음을 잃고 있다”며 “옛 대궐을 짓는 데 수만 명의 백성을 인부로 동원하고 국고를 낭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배론 신학교장 푸르티에 신부도 “현재 조선의 운명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사람, 즉 임금의 아버지(대원군)가 모든 사람 중에서도 가장 믿지 못할 사람”이라면서 “맹렬한 박해를 우리에게 가해 신자와 선교사가 세상에서 없어지게 할지도 모르는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공주에선 신자 두 명이 고문받다 순교

1월 26일 공주 지방 옥사에서 전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와 이 요한이 교살형으로 순교했다.

내포 출신인 전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와 이 요한은 경상도 문경 지방에서 공공의 안녕을 교란한 죄로 체포됐다가 천주교 신자임이 밝혀져 고문을 받다 사형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관장은 이들에게 배교하면 석방을 약속했지만 두 사람은 이를 거부하고 고문을 택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 문초를 받으면서도 △ 천주의 기본 진리 △ 천주의 존재 △ 천주의 계명 등을 설명했다고 관아의 한 관계자가 증언했다.

또 이 요한은 관장에게 “당신들이 우리 사지를 나뭇가지에 매서 잡아 빼고 우리 몸을 갈기갈기 찢고 우리 뼈를 가루가 되도록 부숴 놓는다 해도 우리는 배교하지 않겠다”며 한사코 배교를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은 모두 중인 계급의 천주교 집안 사람들이다. 전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는 아버지에게 회장직을 이어받아 열성적으로 봉사해 모든 사람의 애정과 존경을 한몸에 받는 인물이다.

이 요한도 3대째 신앙을 이어오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가족 가운데 3명이 순교자로 알려졌다.

 

[평화신문, 2016년 2월 7일, 백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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