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금)
(홍)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친교의 해와 사회교리: 세상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느님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4-14 ㅣ No.1927

[친교의 해와 사회교리] 세상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느님

 

 

혼자는 외롭다

 

혼자 사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고 있습니다. 국가 통계 포털을 살펴보면 대구의 1인 가구는 2015년 23만9천517가구에서 2020년 30만4천543가구, 2021년 32만6천566가구로 급격히 늘어나고 있습니다. 전체 가구 중에서 1인 가구의 비율은 대구 32.7%, 경북 36.0%에 이릅니다. 특히 대구 서구의 경우에는 무려 44%를 돌파했습니다.

 

1인 가구의 비율 자체만 따지면, 유럽 국가 중 독일,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가 40%를 넘은지 오래입니다. 영국, 스웨덴,오스트리아의 1인 가구 비율은 원래 높습니다. 혼자 사는 사람이 많아져서 외로움이 큰 문제가 된 영국은 지난 2018년 ‘외로움부’(Ministry of Loneliness)를 정부 부처로 신설하고 장관을 임명해 대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나라들에 비해 우리나라, 또 대구·경북의 문제가 더욱 심각한 것은 노령화와 1인 가구 증가 같은 사회 변화가 급격하게 일어나고 있어 대책을 세우기가 벅차다는 것이지요. 또한 1인 가구의 증가가 청년층의 자립과 주택 사정이 개선된 결과가 아니라 이혼 같은 아픈 사연 끝에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점도 우려할 만합니다.

 

대구는 2020년 기준 40세 이상 69세 미만 인구가 전체 1인 가구의 47.85%를 차지하는데, 그중에서도 상당수가 이혼 때문에 혼자 사는 경우였습니다. 70?80대에서는 성별간 평균 수명 차이 때문에 사별의 아픔을 겪고 혼자 사는 여성 들이 많지요.

 

사정이 이렇다 보니 어느 누구 돌보지 않는 가운데 홀로 죽음을 맞는 ‘고독사’가 늘고 있습니다. 보건복지부 조사에 따르면 2021년 대구에서 고독사로 숨진 사람은 124명이었고 2017년 85명, 2018년 117명, 2019년 105명, 2020년 125명으로 꾸준히 늘고 있습니다. 대구의 5년간 연평균 고독사 증가율은 9.9%로 전국 평균 8.8% 보다 높습니다. 고독사(孤獨死)는 고독생(孤獨生)의 결과이니, 혼자서 외롭게 사는 이들이 늘어나는 만큼 고독사도 늘어 가겠지요.

 

 

혼자는 외롭고 함께는 괴로운 사람들

 

혼자 살다가 외롭게 죽음을 맞게 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해서 과거처럼 대가족으로 돌아가기는 어렵습니다. 늘그막까지 시부모를 봉양하고 살던 며느리의 효행은 이제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고, 젊은 세대에게 효자 효부를 바라기에는 그들 각자가 지는 삶의 무게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어른 모시는 것은 고사하고 제 앞가림만이라도 잘 하고 살기를 바라는 게 대다수의 정서일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개인이나 가족의 힘으로 해결하기 힘든 문제에 대해서 사회적 관심과 대책을 세우는 것이 수순입니다. 공공의 힘,정책적 지원을 통해서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정치가 등장하고, 사회교리가 개입하게 됩니다.

 

미국의 정치학자 데이비드 이스턴은 정치를 ‘사회를 위한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사회적 자원을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인지 결정을 하는 것이 정치라는 것 입니다. 쉽게 말하면 세금을 어떻게 걷어서 어디에 쓸지 결정하는 것이 정치의 구체적인 예라 하겠습니다. 이 결정과 배분의 과정이 윤리적으로 이루어지도록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사회윤리입니다. 더 나아가 사회윤리 입장 가운데 교회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 사회교리입니다. 따라서 사회교리는 우리 사회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한 분이신 하느님 아래 모두가 형제자매로서 더불어 사는 삶이 무엇인지 성찰하고 실천하는데 목적을 둡니다.

 

그런데 지난 몇 년간 사회교리에 관련해서 활동했던 경험을 돌이켜 보면 공동의 일을 걱정하고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정치를 지향한다는 이들이 모였을 때도 갈등과 반목 끝에 뿔뿔이 흩어지는 일이 적지 않았습니다. 혼자는 외롭지만 함께는 더 괴로워서, 서로 상처를 주고받다가 공동체를 깨뜨리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사회교리를 배우고 실천하면서 ‘더불어 사는 삶’의 묘미를 깨닫기는커녕 격한 정치 논쟁 끝에 연을 끊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미사 때마다 평화의 인사를 나누던 이들끼리도 그랬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회교리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공동체를 흔드는 삐딱한 사람들, 늘 불평불만만 늘어놓는 완고한 사람들이라는 편견까지 세간에 생겨날 지경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념과 이상이 아니라 현실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느님

 

현 교황님께서 사회교리를 그토록 강조하고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사회정의의 실현이 지지부진하고, 교회 안에서도 성과를 거두기 어려운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터입니다. 그런데 영성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이런 난맥상은 그리스도인들, 특히 사회교리에 관심을 두고 실천하려는 이들이 성령께 귀를 기울이는 대신 개개인이 가지고 있던 이상과 이념에 맞춰서 자기만의 하느님 이미지를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하느님의 이미지가 절대적인 것인 양 강요한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자기 관점 밖을 잘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도 자기에게 익숙한 이미지를 씌우고, 자기가 믿고 싶은 하느님의 이미지를 만듭니다.

 

예컨대 가부장적 권위주의에 흠뻑 젖은 사람은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한울타리에 정렬시켜 놓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도록 명령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분들은 사회 교리를 두고도 권위적인 태도로 주위를 강압합니다. 하느님의 계명과 교회법과 권위를 내세우면서 자기가 내린 결론에 모두가 따르라고 떼를 씁니다. 그러다 뜻대로 안되면 자신만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의인인 것처럼 불의에 상처받은 고독한 예언자처럼 공동체를 떠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길은 자기가 만든 하느님의 이미지로부터 자유로워지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하느님, 내가 그려놓은 행복을 훨씬 뛰어넘는 길을 가도록 하느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노예살이를 벗어났을 때를 보십시오. 그들은 자유로운 삶으로 부르시는 하느님께 불평불만을 터뜨리며 익숙했던 노예생활로 돌아가기를 바랐습니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 줄까?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공짜로 먹던 생선이며,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생각나는구나. 이제 우리 기운은 떨어지는데, 보이는 것은 이 만나뿐, 아무것도 없구나.”(민수 11,4-5) 이런 관성과 타성을 벗어나서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광야를 함께 걷는 길이 신앙의 길인 것입니다.

 

우리는 친교의 해를 사는 가운데 각자의 이상과 이념에 끼워 맞춘 하느님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우리만의 하느님 이미지를 깨뜨리시는 하느님께 눈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친교와 친목이 왜 다른지, 친교를 실현하기 위해서 사회교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할 것인지 정말 궁금하다면, 먼저 새로운 현실 속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께 마음을 열어봅시다. 우리가 그분을 알지 못하면 친교를 알 수 없고, 친교를 모르면 사회교리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올 한 해 동안 연재하는 사회교리 이야기가 교우 여러분이 하느님을 만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월간빛, 2023년 4월호, 박용욱 미카엘 신부(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



127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