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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성사] 세계 성체대회의 기원과 발전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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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0 ㅣ No.41

세계 성체 대회 기원과 발전 과정

 

 

1. 머리글

 

18세기를 우리는 '산업 혁명의 시대'라고 부름으로써 그 시대의 역사적인 특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200`-300년 후 23-24세기 사람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를 어떻게 부를까? 기술 산업에 초점을 맞춘다면, '전자 기술 혁명의 시대' 또는 '전자 정보화 시대'로, 경제적인 특성에 초점을 맞춘다면 '탈 자본주의 시대' 또는 '사회주의적인 자본주의 시대로의 전환기'로, 그리고 국제 정치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춘다면 '신패권주의 재편(新覇權主義 再編) 시대' 등 관점에 따라서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23-24세기 그리스도인들은 21세기 그리스도교의 모습을 어떻게 평가하고 부를까?

 

현대의 기술 개발은 시간을 다투면서 빠르게 진행되어 일상 생활에서 시간 또 공간을 점점 좁혀 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어 안타깝게 생각한다. 시공의 간격이 좁혀지고 있는 것이 지구촌 마을의 공동체성을 더해 가는 긍정적인 면도 있겠지만, 이것을 악용하여 어느 한 세력이 전세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지배하려는 신패권주의의 시작이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이러한 차원에서 최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세계화' 현상에 대하여 경고하지 않았나 한다.

 

인류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고도로 발전되고 있는 물질 문명의 현대 사회에서, 정신적인 가치의 중요성을 가르치며 하느님만이 인류를 결정적으로 구원하실 수 있다고 설파하며, 성체성사를 교회의 힘의 원천으로 삼고 있는 교회의 사명과 역할은 무엇일까?

 

 

2. 성체 대회 창설의 시대적 배경


1) 정치 사회적 배경

 

19세기 중엽은 유럽 여러 나라에서 혁명의 시기로서 민족주의적 민주주의 의식이 점증하여 민족 자결주의가 일어나면서 통일 운동을 더욱 강력하게 추진하려고 각지에서 봉기하던 때였다. 교황 비오 9세(Pius IX, 1846-1878년)는 처음에 자유주의적이고 이탈리아 민족과 국가를 사랑하는 지도자로서 1848년 3월 14일 교황이 다스리는 지역에 헌법을 제정하여 백성들이 어느 정도 권한을 가지고 정치에 참여하게 하여 백성들은 교황을 열광적으로 환영하였다. 그러나 교황령(敎皇領)의 초대 수상인 펠레그리노 롯시(Pellegrino Rossi, 1787-1848년) 백작이 1848년 11월 민의원 의회 개회식에서 과격파 혁명가들에게 암살당하자 교황도 그들에게 포위되어 살해 위협까지 받았다. 그러자 그는 나폴리 황국의 가에따로 피신하였고 프랑스 군대의 도움으로 로마를 탈환하여 다시 예전처럼 전제 군주 체제로 다스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민족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그리고 보불전쟁(普佛戰爭, 1870-1871년)으로 프랑스군이 본국으로 철수하면서 피에몬테(Piemonte)인들의 간단한 포격으로 1870년 9월 20일 로마가 정복되어 1천여 년 존속되어 온 교황령이 종말을 고했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프랑스에서 국가와 교회의 관계는 참담한 상태였다. 반복된 혁명과 반란, 정당과 교파들 간의 투쟁, 그리고 계몽주의 사상의 확산 등으로 국민들 사이에 심한 정치적 사회적 반목과 분열이 초래되었다. 1830년 7월 혁명 이래로 가톨릭 교회가 극심한 박해를 받았고 이후 계속된 혁명의 소용돌이 가운데 박해의 표적이 되었다. 뜻 있는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정신을 국민들 생활 속에 재생하려고 많은 노력을 쏟았으나 오랫동안 지속된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적인 무질서와 교회에 대한 불신을 완전히 회복할 수는 없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 혁명 이래 독일 사회는 국가와 교파들 간의 이해 관계로 오랫동안 혼란에 빠져 있었으나, 혁명의 해인 1848년의 새로운 헌법으로 가톨릭 교회를 위해서도 신앙 활동의 자유와 자립의 폭이 더 넓어졌다. 곧 일반 신자들의 영성 생활을 심화하기 위한 묵상회와 신심 행사가 자주 열렸고 자취를 감추어 가는 듯했던 순례 행사가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철혈 정책(鐵血政策)으로 널리 알려진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1815-1898년)의 출현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국가 교회주의적인 사고 방식에서 성장한 그는 가톨릭 교회를 프로테스탄트의 영방(領邦) 교회처럼 국가 정책에 완전히 종속하는 일개 교파로서 취급하였다. 특히 1870년 그가 문화 투쟁(Kulturkamf)을 선언한 이후 국가와 교회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었다.

 

2) 문화적 배경

 

교황 비오 9세의 시대는 혁명의 물결이 교회 내외를 막론하고 깊숙이 흘러 들어와 혼란과 무질서로 가득했다. 제도의 변혁이나 교회 영토의 축소뿐만 아니라 사상적인 면에서도 매우 혁신적이라 할 주장들이 선동적으로 보급되었다. 예를 들면 인간의 자연적인 성정(性情)을 중하게 여겨 일체의 인위적 전통적 관습이나 제도를 거부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초자연성을 부정하고 자연의 힘으로 인간을 구원하려는 절대적 자연주의(Naturalismus)가 등장하였다. 또 이성은 인간 사고 판단과 정의(定義)의 최고 원리라고 하여, 이성을 신앙의 권위에서 무한히 자유롭게 하라고 요구하며 신자 대중을 계시 종교에서 해방하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혼란 상태에서 교황 비오 9세는 유설표(謬設表, Syllabus)를 발표하여 교회의 가르침을 명확하게 밝혔고,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열어 교회 내외적인 문제에 대하여 통일된 교리를 정의하고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황의 무류지권(無謬之權, Infallibilitas)을 선언하였다.

 

3) 교회의 상황

 

교황 레오 13세(1878년 2월 20일-1903년 7월 20일)는 교회 내외적으로 격동의 시대에 교황 직책을 훌륭히 수행하였다. 그는 특히 사회 문제, 성서 연구, 교회 재일치 문제, 새로운 포교지의 지원 등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가톨릭 교회의 근대화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가 결코 적대적이지 않고 서로 일치할 때 '완전한 사회'가 된다고 강조하였다. 그의 회칙 여러 곳에서 국가의 자립과 품위가 강조되었다. 프랑스에서 정부와 교회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교황은 서로 협력하도록 당부하였다. 그는 신자들도 사회 조직의 일원이요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신앙 정신에 합당한 정책 개선에 힘쓰라고 당부하였다.

 

19세기 중엽 이후부터 특히 알프스 산 너머 북쪽 지방을 중심으로 신심 생활의 새로운 경향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얀세니즘의 영향을 받아 특수 계층에 한정되었던 지난 세대의 엄격하고 내성적이며 냉혹하기까지 했던 신심 생활에서 탈피하여 어느 정도 감정적인 요소를 인정하는 신앙 생활로 바뀌었다. 곧 외적 신심의 다양화로 일반 신자들이 성사 생활에 쉽게 참여하여 영성체를 자주 하도록 권장되었고, 규모가 큰 외적 행사의 신심 활동이 시도되었다. 이때부터 엄격한 심판자로서 하느님보다는 인간 각자를 사랑하시며 당신 사랑을 배신하는 인간의 범죄로 고통 당하시는 예수님의 마음과 '감실 속에서 사랑의 포로'가 되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는 신심을 부각시켰다.

 

18세기에 그 중요성이 많이 상실된 순례 운동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또 신학적인 지식과 깊은 신심으로 민중 신심을 유도하고 지도했던 영적 지도자들의 공헌도 컸다. 예를 들면 영국 오라토리오(Oratorio) 회원인 파버(Faber)나 많은 인기를 모았던 신심 서적을 쓴 드 세귀르(de Segur) 같은 로마에서 교육받은 사제들이 그러했다. 또 하느님 자비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심과 동정 성모, 그리고 성체성사에 대한 마음에서 우러나는 신심을 권장한 알퐁소 성인(Alphonsus) 같은 사람도 있었다. 특히 얀세니스트의 영적 지도 방식과 신학의 부당한 내용을 지적하며 반박한 예수회 회원들이 교회의 정통 교리를 가르치며 예수 성심 신심을 널리 보급했고 또 이냐시오 영성 수련 방법에 따라 재속 사제와 수도회 사제들을 위한 봉쇄 피정과 침묵 기도를 자주 지도한 공헌도 있다. 그리고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에서 그리스도인 가정에 감정적인 신심을 보급하는 데 프랑스 수녀들도 이바지하였다.

 

위에 소개된 영적 지도자들이 규칙적으로 고해성사를 받고 자주 영성체 하도록 장려함으로써 본질적으로 가톨릭 신앙 생활의 성사적인 특성에 다시 한 번 관심을 기울이게 하였다. 드 세귀르 몬시뇰은 La tres sainte communion(지극히 거룩한 영성체, 1860년)라는 책에서 가능하다면 매일 또는 이틀에 한 번, 그리고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영성체 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러한 그의 권고가 아직도 얀세니즘적인 신앙 생활을 하고 있던 연로한 사제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지만, 그의 책은 프랑스에서 180,000여 권이나 인쇄되어 팔렸고 세계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교황 비오 9세도 1860년 그의 교서에서 언급하여 호평할 정도였다. 이탈리아에서도 이러한 경향에 동조하여 프라시네티는 I1 convito del Divino Amore(하느님 사랑의 잔치)라는 책에서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성찬 예식을 설명하면서 영성체를 자주 하도록 권고하였고 돈 보스코 성인도 어린아이의 잦은 영성체에 찬성한다고 밝혔다. 1866년 안토넬리(Antonelli) 추기경은 첫영성체를 늦추는 관습을 단죄한다는 내용을 프랑스 주교들에게 보냈다.

 

 

3. 세계 성체 대회의 배경과 기원

 

성체 대회란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들이 함께 모여 성체께 대한 이해와 사랑을 증진시키고 성체 신심(信心)을 앙양(昻揚)하며 지극히 거룩한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 고백을 통하여 성대하게 하느님께 영광을 드림을 그 목적으로 한다. 보통 특별한 주제를 선정하여 대회가 준비되는데, 이 주제에 맞추어 성체에 관한 강의, 세미나, 토의를 하며 현대 생활과 연관시키는 학술 연구 모임과 그리스도교 정신과 신앙 생활에 더욱 전적으로 투신하도록 인도하는 전례와 외부 행사 등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성체 대회의 규모에 따라 세계 성체 대회, 국가 성체 대회, 지역 성체 대회, 교구 연합 성체 대회, 교구 성체 대회, 지구 성체 대회, 구역 성체 대회, 본당 성체 대회 등으로 명명된다.

 

성체 조배에서는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은 예수 그리스도의 상처와 능욕에 대한 보상을 강조하여 왔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새로운 신심 생활의 정신을 부각시켰는데 이는 단순히 한 죄인의 범죄에 대한 보속뿐만 아니라, 정부 당국의 세속화 정책에 따른 구조 악에 대한 보속도 강조하였다. 이것이 1875년 즈음에 프랑스에서 세계 성체 대회가 태동하게 된 사상적 배경이다. 이 세계 성체 대회는 웅장한 대회의 극적 효과로 성체 신심을 활성화하고 무관심하고 냉담한 신자들이 더욱 친근감 있게 그리스도의 현존을 체험하여 열심한 신앙 생활로 돌아오고 동시에 반(反)성직주의에 젖어 있는 가톨릭 신자들을 각성시켜 그들의 힘과 연대성의 가치를 사회의 복음화에 공헌하도록 하였다.

 

세계 성체 대회는 당시 대부분의 신심 활동을 주도하던 드 세귀르 몬시뇰과 스위스 프리부르그의 메르밀로(Mermillod) 몬시뇰, 벨기에 리에즈의 두트를루(Doutrloux) 주교의 격려를 받고 시작한 타미지에(E. Tamisier) 여사의 노력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는 복자 베드로 굴리엘모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이때 성체성사를 통하여 사회 구원을 위하여 모든 힘을 다 쏟을 것을 약속했다고 한다. 원래는 성체 기적과 관계 있는 중요한 성지를 순례함으로써 성체 기적과 관계 있는 성지 순례에 대한 일반 신자들의 관심을 되살리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성체 기적이 기념되던 아비뇽, 아르스, 두애(Douae), 파리, 파레르모니알(Paray-le-Monial)을 순례하기로 계획을 세워 추진하였다. 1873년 파레르모니알에서 그는 그리스도께서 말가리다 마리아 알라콕 성녀에게 당신의 뜻을 계시하신 성당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던 60여 명의 의회 의원들을 만났다. 그들은 프랑스 정부의 세속주의적인 정치에 대항하여 그리스도교 정신을 반영하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성체성사를 통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증거할 폭넓은 가능성을 보게 한 순간이었다.

 

성체 대회에 대한 타미지에 여사의 생각은 덕망 있는 평신도와 성직자들에게 찬성을 받았다. 성직자들 사이에 여러 가지 의견이 개진된 후, 드 세귀르 몬시뇰의 지도로 국제 대회가 계획되어 조직 위원회까지 구성되었지만 첫 시도는 실패했다. 타미지에 여사의 첫 순례지는 아비뇽에 있는 참회자들의 성당이었는데 1874년에 실행에 옮겨졌다. 이 결과로 성체성사에 대한 내용을 다루는 '성체 대회'라고 일컫는 모임을 자주 가졌다.

 

1878년에 실질적인 관심을 보인 소규모 학회의 결과로 성체에 관한 더욱 폭 넓고 활발한 활동이 예고되었다. 이제 본격적인 성체 대회 개최가 확실히 보증되었다. 타미지에 여사는 국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국제적 평가를 받는 본격적인 대회가 되도록 학문적인 연구와 대중 집회를 결합시키라는 영감을 받았다.

 

1881년 1월 17일 드 세귀르 몬시뇰의 주재로 열린 모임에서 '국제 성체 대회 본부'가 조직되고 릴이 첫 대회지로 선정되었다. 조직 위원장은 프랑스 북부 지방의 가톨릭 활동 지도자이며 실업가인 브로(Ph. Vrau)였다. 그는 교황 레오 13세에게 승인을 받기 위해 로마에 갔다. 교황은 1881년 5월 16일 릴 세계 성체 대회를 격려하는 교서로 승인하고 릴 대회에 교황 축복을 보냈다.

 

이 첫 모임은 그런 대로 무리 없이 성황리에 치러졌다. 해를 거듭 할수록 참석자 수가 늘었고 로마 교황의 격려도 함께 했다. 성체의 교황이라고 일컫는 교황 비오 10세의 등극과 다국어를 자유 자재로 구사하며 대단히 활동적인 나뉘르(Nanur)의 엘랑(Heylen) 주교가 대회장으로 임명되면서 세계 성체 대회 역사에 새로운 장이 열렸다. 첫째로, 1914년에 열린 루르드 세계 성체 대회에는 고위 성직자 수만 헤아려도 10명의 추기경과 200여 명의 주교들이 참석하였다. 이는 1881년 제1차 대회 때 참석한 외국인 전체 수와 비슷하다. 둘째로, 국제적 운동의 성격이 부각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 2000년 대희년 세계 성체 대회를 열게 되었다.

 

 

4. 역대 성체 대회의 특징

 

프랑스에서 창설되어 개최된 제1차 세계 성체 대회는 이미 위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주제에 대한 의미만 간단히 언급하겠다. 주제는 "성체 전파와 사제직"으로서, 사제직의 기반을 성체성사에 두어 사제들의 영성 생활을 심화시키려 하였고, 성체 신심을 더욱 적극적으로 확산하여 개인 신심에서 머무르지 않고 성체성사의 가치와 의미를 사회적인 쇄신의 원천으로 삼았다. 이러한 내용의 주제는 파리에서 열린 제13차 세계 성체 대회(1901년 9월 4-9일)에서도 다시 한 번 강조되었다.

 

1) 제26차 세계 성체 대회(1922년 5월 24-29일)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이 황폐화된 이후 "성체 안에서의 주님의 평화 통치"라는 주제로 열렸다. 이 주제는 당시 군사적인 힘으로 패권을 쟁취하려는 열강 국가들에게 참 평화는 그리스도교적인 가치를 존중할 때 가능하다는 호소를 하여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의 일치와 화해를 촉구하였다.

 

2) 제30차 세계 성체 대회(1930년 5월 7-11일)

 

아우구스티노 성인 서거 1500주년을 맞이하여 처음으로 아프리카 튀니지의 카르타고에서 "아프리카가 증거하는 성체"라는 주제로 성체 대회를 개최하였다. 아직까지 식민주의 통치가 완전히 종식되지 않은 상황에서 성체 대회를 개최하여 전세계의 관심을 아프리카 교회에 집중시키도록 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비록 멸시받고 소외된 '검은 대륙'이지만 아프리카인들의 고통과 희생에 동참하려는 교회의 의지를 드러냈다.

 

3) 제32차 세계 성체 대회(1934년 10월 10-14일)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회적 다스림과 성체"라는 주제로 열렸다. 교황청 국무성 장관 페첼리(E. Pecelli) 추기경이 참석하여 주례하였는데, 이 성체 대회는 예기치 않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곧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돌아오고 개종하였으며 라틴 아메리카의 침체된 교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것이다. 식민주의 통치의 잔재로서 빈익빈, 부익부의 경제 사회적 불평등이 그대로인 상황에서 성체성사의 가르침에 따른 사회적 변혁을 촉구하였다.

 

4) 제38차 세계 성체 대회(1964년 11월 28일-12월 6일)

 

"성체와 새 인간"이라는 주제로 인도의 뭄바이에서 개최되어 교황 바오로 6세가 직접 참석한 획기적인 성체 대회였다. 980여 명의 기자와 70여 명의 텔레비전 방송국 관계 인사들이 수행하여 인도 성체 대회를 전세계에 방영하였다. 1947년 영국의 식민 통치에서 인도 연방으로 독립하였지만 당시까지도 그 후유증이 나라 곳곳에 남아 있어 민족간, 종교간, 계층간의 갈등과 반목이 심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성체 대회가 열렸다. 그러나 교황 바오로 6세의 참석은 신자, 비신자를 불문하고 모두에게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인도의 제반 문제가 합리적으로 해결되도록 인도인들이 지혜와 힘을 모으는 데 하나의 계기가 됨으로써 '일치의 성사'를 구현하였다. 특히 인도 교회에 새로운 희망과 활력을 불어넣어 성체성사의 힘으로 그리스도를 더욱 적극적으로 증거하도록 하였다.

 

5) 제44차 세계 성체 대회(1989년 10월 5-8일)

 

서울에서 열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직접 참석한 대회로서 한국 교회 역사상 참으로 영광스럽고 뜻 깊은 대회였다.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선교 200주년 기념 행사 때와 제44차 세계 성체 대회를 통하여 한국 천주교회의 위상을 전세계에 알리고 국내적으로는 교회가 민족과 국가를 위해 봉사해야 할 방향을 더욱 뚜렷이 한 역사적인 대회였다.

 

진정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참된 평화를 보증할 수 있고 그리스도의 평화로써만 우리 모두가 화해하고 일치할 수 있다. 힘으로 상대방을 억누르고 군림하는 로마의 평화(Pax Romans)로는 일시적 긴장 상태의 외적 평온을 유지할 수는 있으나 항구한 평화를 더욱 불가능하게 한다. 또 파괴로 얻어진 힘은 결국 더욱 심각한 파괴를 일으키는 힘으로 악화되는 결과만을 낳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참으로 누리고자 하는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는 성체성사의 성사적 삶으로만 가능하다. 그리스도께서 사랑으로 당신을 주셨듯이 우리 자신을 사랑으로 내어 줄 때 우리는 하나가 되고 국민 모두의 안녕을 위해 봉사하고 민족의 화해와 일치, 통일을 위해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5. 맺는 말 : 현대 교회의 사명과 성체 대회

 

세상의 어떠한 것도 벨 수 있는 칼을 만드는 고도의 기술도 필요하겠지만 그 칼을 목적에 맞게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의 심성을 도야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같은 칼이라도 강도의 손에 있으면 일시에 흉기가 되지만, 요리사나 의사가 사용하면 인간의 생명을 보양하고 살리는 고마운 이기(利器)가 된다. 따라서 전자 기술이나 생명 공학 등 현대의 여러 가지 기술 개발이 인간의 존엄성을 외면한다면 인류의 자멸을 가져오는 흉기(凶器)로 변하지 않을까 대단히 염려스럽다. 만일 최첨단의 기술 문명이 이에 버금가는 정신적인 가치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인류의 장래는 어떻게 될까?

 

남을 누르고 죽임으로써 자신이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생존 경쟁의 악순환에서 자기를 희생하고 죽임으로써 남도 살리고 결국에는 모두가 사는 길이라는 것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자신의 삶으로 보여 주셨다. 주님의 이러한 가르침이 성체성사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고 본다. 인류를 살리고 세계를 구하여 명실상부하게 지구촌 마을의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이러한 가르침을 우리의 구체적인 삶으로 구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앞에서 세계 성체 대회가, 개인적 회개나 보상 차원의 개인적 성체 조배의 형태에서 탈피하여 구조 악을 낳게 하는 정치 사회 제도를 개선하고 쇄신하기 위한 공동체적 성체 신심에서 비롯되었음을 이미 보았다. 오늘날 우리 나라의 실정에서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방면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개개인의 회심과 의식화 과정을 통한 법과 제도의 개선을 위해서도, 국민으로서 신앙인으로서 각자의 처지에서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사목, 2000년 6월호, 김희중(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신부/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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