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 (목)
(백)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인] 일본 26성인 시성 150주년 역사와 의의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5-26 ㅣ No.1030

[특별기고] 일본 26성인 시성 150주년 역사 · 의의 (상) 모진 박해 기꺼이 받아들이며 하느님께 감사 기도


한국과 일본은 거리만큼이나 천주교회 역사 또한 닮은 점이 많다. 박해의 칼날 속에서도 오직 하느님만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았던 신앙선조들의 순교 역사가 특히 그러하다.

1597년 2월 5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박해로 26명의 그리스도인이 순교했다. 나가사키 니시자카에서 흘린 순교자들의 피는 예수회와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선교사들을 통해 전 세계에 전해졌으며, 1862년 비오 9세 교황에 의해 시성되면서 일본 신자뿐 아니라 전 세계 그리스도인의 가슴에 뜨거운 신앙의 모범을 새겼다.

일본 26성인의 시성이 올해로 150주년을 맞았다. 일본교회는 이를 기념해 오는 6월 10일 니시자카 순교지에서 ‘일본 가톨릭 나가사키 순례지 지정 제막식’을 연다.

본지는 26성인 시성 150주년의 역사·의의에 대해 나가사키 순례 안내 소임을 맡고 있는 이건숙 수녀(율리에타·예수성심시녀회)의 특별기고문을 두 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우세민 기자]


한국과 일본의 가톨릭 역사 안에 다른 나라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아주 특이한 역사를 꼽는다면, 한국은 학문의 연구라는 구도(求道)의 길에서 하느님을 찾았다는 것이다.

그와 달리 일본은 선교사가 뿌린 복음의 씨앗에서 배양된 가톨릭 문화의 꽃을 어느 한 시기 아주 화려하게 피웠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명령에 의해 1597년 2월 5일 26성인의 순교로부터 시작된 박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가문의 막부로 정권이 바뀐 뒤에도 더욱 심해졌고, 수백 년 동안 긴 박해의 무서운 탄압 속에서 단 한 명의 사제도 없이 250년간을 신자의 손으로 교회를 지켜온 숨은 역사가 일본 가톨릭의 특이한 점이다.

그 모질고 험한 박해를 견디게 한 나가사키 니시자카 순교 역사의 시작이 바로 26성인의 순교다. 26성인 순교 이후 수백 년간 니시자카 순교자의 무대에서는 하느님을 증거하는 이들이 줄을 이어 세계는 경악을 금치 못했고, 일본은 순교자의 나라로 알려지게 됐다.

1862년 6월 8일, 일본은 아직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아직 박해 기간 중이었다. 신자가 남아 있었는지도 알 수 없을 당시에 로마 교황청에서 비오 9세 교황에 의해 ‘일본 26성인’을 전 세계에 선포하였다. 그리고 5년 뒤 205위의 복자를 선언하여 일본교회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1. 프란치스코회의 활동

1590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가 주변국가에 대한 야심을 갖게 되자 1593년 필리핀의 총독은 마닐라에서 도요토미에게 사절단의 명목으로 프란치스코회 수도자 4명을 파견했다. 1594년 시죠 호리카와(四條堀川)의 묘만지(妙滿寺)에 정주했고, 도요토미가 정주를 허락한 것은 종교적 허가로 받아들인다는 낙관적 의미로 생각하게 됐다.

이들은 성당을 건립, 10월 4일 프란치스코 성인 축일에 ‘천사의 모후이신 성모님’을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축성식을 갖고 본격적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2층 구조로 지하 2층에 회랑을 넣고 좌우에는 부제석, 성가대 자리까지 구비한 스페인식의 꽤 큰 성당을 지었다. 1595년에는 가난한 사람들과 한센병 환자를 위하여 안나병원과 요셉병원을 개설하였다. 환자는 점점 많아지고 병원에서 일하는 신자들은 병원 가까이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면서 이 주위는 자연히 그리스도 신자들의 마을이 되었는데 이곳을 ‘다이우스(데우스) 마을’ 이라 하였다.

이즈음 1596년 10월 19일 산 페리호 사건이 발생한다. 스페인 무역선이 마닐라를 출발해 멕시코를 향하던 중 태풍으로 심하게 파손되어 토사(土佐)에 표류하였다. 배에는 일본이 목적지가 아니었던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아우구스티노회 소속 신부와 수사 등이 타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도요토미는 적하물을 몰수하고 선교사를 포박하는 등 불법적인 행동을 감행했다. 설상가상으로 항해사의 말이 불씨가 되어 도요토미를 크게 자극하였다. “스페인은 처음에는 선교사를 보낸 후 주민들이 신자가 되면 군대를 보내고 그 나라를 식민지로 만든다”는 말에 분노를 일으킨 히데요시는 12월 7일 교토 수도원 포위, 8일 프란치스코회원 체포, 9일 프란치스코회 관련자 체포, 1597년 1월 1일 오사카에서 4명의 관련 신자와 3명의 예수회원 등 24명을 교토로 호송했다.

당시 나가사키에 살던 예수회 루이스 프로이스 신부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그들을 태운 달구지가 옥문 앞에 다다르자 그들은 내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예수회 바오로 미키 수사는 자신들은 하느님께 큰 은혜를 받은 자로서 경건한 성 프란치스코회 신부에게 겸손한 태도로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포옹하며 “오늘 하느님의 자비로 처음으로 행복한 운명 받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신부님들의 덕택이라 생각하며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라고 정중하게 인사하였다. 감시인과 마부들은 이 광경을 보고 놀라 “이렇게(새가 날개 춤을 추는 듯한 마음의 격동을 일으키는 모양의 표현) 아름다운 사람을 보다니.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모욕을 받고도 기뻐할까. 이런 사람이 세상에 다시 있을까?” 라고 서로 말을 주고 받았다. 그날 밤 몇 시간 후 바오로 수사는 그들을 위로하고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은혜로움에 대해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옥 안에는 네다섯 명의 비신자 죄인들도 같이 있었는데 바오로 미키의 말을 들고 눈물을 흘렸다. 1597年 2月 5日(慶長元年 12月 19日)(ARSI, Jap.Sin, 53, f.71)>

프로이스 신부는 1597년 3월 25일 기록을 마쳤다. 프로이스 신부의 서명이 있는 원문은 로마 예수회의 고문서관에 보관돼 있다.

- 일본교회 첫 순교자 26인이 처형된 니시자카 형터에는 오늘날 순교기념관과 성필립보성당이 들어서 있다. 사진은 니시자카 순교기념관에 있는 26성인을 표현한 부조.


2. 26성인과 나가사키의 길

도요토미는 체포된 24명의 귀와 코를 자르고, 교토의 대로에서 조리돌림을 시키며 모욕을 준 후, 나가사키로 데리고 가 책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24명은 1597년 1월 3일 이치죠 모도리바시(一條戾橋)에서 왼쪽 귀가 잘렸다. 그리고 죄인들에게 최대의 모욕과 수치를 주는 관습에 따라 소달구지에 태워 교토의 대로를 본보기로 조리돌림을 시켰다. 교토의 신자들은 순교자의 일행을 따라 옥에 되돌아 올 때까지 따라 다녔는데 그 중에는 자신들도 이 행렬에 넣어 달라고 간청하는 이들도 있었다.

1월 4일 교토를 출발해 나가사키까지 850km 순교의 아름다운 길이 시작되었다.

지나가는 길가와 창, 지붕 위에는 많은 구경꾼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고 천사 같은 얼굴, 손은 뒤로 묶여 있어도 기쁨이 넘치고 잘린 귀의 상처로 슬퍼하지도 않으며 피를 보고도 동요하지 않고 순수하고 편안한 모습으로 하느님을 찬미한다.

하루 평균 30km를 걸으며 서로를 위하는 우애. 오직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기도의 길에 취해 수치와 모욕, 침음과 돌팔매질, 추위와 허기…. 견디기 힘든 인간적인 고통은 이미 천국을 사모하는 정화의 길로 바뀌어 갔다. 6명의 외국인을 비롯해 12살 루도비코, 13살 안토니오, 16살의 토마스는 감동적이었다. 당시 순교자의 대표자 밥티스타 신부는 일본어가 아직 서툴러 표현은 제대로 못하였으나 신학교 출신의 바오로 미키 수사는 지켜보는 이들을 위하여 날마다 강론했다. 나가사키의 길을 걸어 온 선교의 길이었다.

일행이 미하라죠(三原城·현재의 히로시마)에 와서 잠시의 휴식을 할 때 16살의 고자키 토마스(아버지 고자키 미카엘과 함께 순교)는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를 아래와 같이 적는다.

<우리들 24명, 신부님과 저희들은 나가사키에서 처형되기 위하여 가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저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마십시오. 곧 천국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신부님들이 안 계신다 하여 걱정하지 마시고 임종 때 범한 죄에 대하여 깊이 통회하고 또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은총에 대하여 감사드리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현세는 허무한 것이기에 천국의 영원한 행복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십시오. 사람들로부터 오는 어떤 것이든 잘 인내하고 큰 애덕을 실천하십시오. 내 동생들 만쇼와 필립보를 비신자들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해주십시오. 나는 어머님을 위해 주님께 기도합니다. (1597년 1월 19일)> [가톨릭신문, 2012년 5월 27일, 이건숙 율리에타 수녀(예수성심시녀회 나가사키분원)]


[특별기고] 일본 26성인 시성 150주년 역사 · 의의 (하) 전 세계에 희망 · 치유 · 용서의 정신 널리 전파


박해를 받고 끌려가는 24명의 그리스도인을 돕기 위해 행렬을 따라오던 두 사람이 있었다. 감시인들은 그들에게 신자의 여부를 묻자 자신들도 신자라고 대답했고, 이들도 체포하여 순교자들의 행렬에 넣었다. 이리하여 26명이 된다. 둘은 체포된 것을 애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부터 지복의 운명에 선택되기를 내심 바랐던 일로 환호하며 감사할 뿐이었다.

2월 4일 늦은 저녁, 오무라의 소노기(彼杵) 해변에 닿았다. 눈썹 같은 달은 공중에 걸려 있고 3척의 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저기 어촌의 불빛이 밤의 장막을 마주한 가운데 순교자들의 마지막 기도의 밤이었다. 마치 예수님이 겟세마니에서 성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피땀을 흘리고 기도하시던 밤과 같은, 사탄이 유혹하는 밤을 보냈다. 기다리던 십자가를 끌어안기 위하여 최후의 힘을 모으던 영혼은 새벽을 맞이하였다. 몸은 비록 밧줄에 묶여 있으나 영혼의 날개는 깃털처럼 가볍게 천국의 문 앞에 서 있었다.

이제 물길을 가르고 수 시간 후에는 그리스도인의 도시 나가사키에 닿게 된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니시자카 갈바리아 언덕에는 4000명의 군중이 웅성거리고 형리들은 오히려 군중들이 무슨 일을 벌일까 긴장하고 있는데 순교자들은 개선장군처럼 구경꾼들을 위로하며 니시자카로 올랐다. 이미 현장에는 이름이 적혀 있는 26개의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다. 나가사키가 출생지인 안토니오는 7개월 전 교토로 가 프란치스코회의 동숙자로 있었는데, 이제 부모가 보는 앞에서 순교의 금의환향의 옷을 입기 위해 돌아왔다.

요한 고토의 부모가 장한 아들을 지켜보기 위해 바다를 건너 왔고 아들은 아버지에게 묵주를 전해드렸다. 겨우 10달 전 세례를 받은 12살의 루도비코는 형장에 들어서자 차랑차랑한 목소리로 “내 십자가는 어디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루도비코의 질문에 형리들이 놀라고 아빌라 출신인 밥티스타 신부는 창이 아닌 못 박을 것을 청하며 두 손을 내밀었다.

바오로 미키 수사는 십자가에 묶여 자신을 바라보는 4000명의 군중 앞에서 마지막으로 입을 열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필리핀 사람도 아니고 일본인 예수회 수사입니다. 그리고 어떤 죄도 범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했기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을 이용해서 내 앞에 있는 당신들을 속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구원은 그리스도를 통한 길뿐임을 단언하고 주저치 않음을 말씀드립니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원수, 자기에게 해를 끼친 사람을 용서하라고 가르칩니다. 나는 국왕(도요토미 히데요시)과 나를 사형에 처하도록 책임진 모든 이들을 용서합니다. 국왕에 대한 미움은 없고, 오히려 그를 포함한 모든 일본인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프로이스, 1597년 「순교기록」 145항 발췌)>

가문 좋은 무사 출신의 바오로 미키는 “용서한다”고 말했다. 용서는 윗사람이 수하를 두고 하는 말로 죽음을 앞둔 죄인이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으며, 더욱이 당시 무사의 사회에서 통용될 수 없는 말로 언어의 새로운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순교지 니시지카

1597년 2월 5일 정오. 니시자카에서 일본인 20명과 6명의 외국인은 귀한 생명을 다하여 하느님께 최후의 증언을 하였다.

교토에서 나가사키의 850km 순교의 길은 세계 역사 안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아름다운 길이다. 26성인의 순교 후 처형 때 사용했던 십자가는 1597년 여름까지 형장에 그대로 걸어 두었다.

나가사키 신자들은 순교자들을 지극히 공경하여 감시자의 눈을 피해 일부의 유해를 가져가기도 했다. 순교자들의 유해를 치우고 십자가가 서 있던 곳에 나가사키 신자들은 1년 내내 푸른 잎을 가지고 꽃을 피우는 동백나무를 심어 순교자를 기억하였다.

해마다 들어오는 포르투갈 선박은 나가사키에 입항할 때마다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니시자카를 향하여 예포(禮砲)를 쏘아 경의를 표하고 있다.

어느 사이엔가 나가사키의 신자들은 니시자카를 ‘마르치레스(순교자)’라 부르고 신자들 사이에서는 자주 “자 마르치레스에”란 말을 하게 되었다. 어떤 이는 맨발로 언덕을 오르기도 하고 금요일과 토요일에 순교지를 찾는 이들도 많았다.

그들은 순교자와 만나 좌절에서 희망을, 상처에서 치유를, 미움에서 용서를 찾아갔다. 


4. 세계 속의 26성인

바오로 미키 성인상.


순교의 소문은 바다를 건너 프란치스코회와 예수회 선교사의 손을 통해 일찍이 전 세계로 알려졌다. 성인 출신지 나라뿐 아니라 타국에서도 일본 순교자의 공경이 급속히 전해졌다.

이미 시복식 이전에 26순교자에 대한 책자가 발행 됐고, 목격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린 성화, 포르투갈과 멕시코의 대 성전 벽화, 이탈리아 판화의 다수는 유명하다.

그림을 통하여 유럽과 다른 나라에서 일본의 순교자들을 공경하기 시작하였으며 일본과 관계없는 볼리비아의 수도원 성가대 자리에는 성인들을 조각하여 공경하기도 했다.

순교자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시복되었다. 당시의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에 의한 심한 박해 중에 있었으나, 바티칸은 일본 신자들에게 큰 용기를 주기 위하여 1627년 우르바노 8세 교황에 의하여 프린치스코 관련자 23명이 1차 시복되고, 2년 후 1629년 예수회 3명도 시복되었다.

시복식은 두 차례 나뉘어 거행됐으나, 1862년 6월 8일 비오 9세 교황에 의해 시성될 때에는 정식명칭 ‘일본 26성인’으로 통합되었다. 또한 순교 당시의 대표자는 밥티스타 신부였으나 바오로 미키 수사로 바뀌었고, 순교일 2월 5일이 아가타 성녀 축일과 중복되므로 일본에서만 2월 5일에 축일을 지내고 그 이외 나라에서는 2월 6일로 지낸다. 당시 음력을 사용하던 일본력으로는 게이초(慶長·일본의 연호) 12월 18일이다.


5. 순교 400년 - 순례지 지정

제2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으로 나가사키 시민들의 마음은 원폭의 상처에서 일어서기 힘들었다.

1956년 4월 6일 나가사키시는 순교지 니시자카(西坂) 언덕을 사적지로 지정하고 1962년 시성 100주년 기념으로 기념관과 성필립보성당을 건립하고, 기념관 벽에 26성인의 부조물을 만들어 성인들을 기념하게 되었다. 이마이 겐지(今井兼次)가 시공, 설계한 기념관과 성필립보성당은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성가정성당을 모체로 한 건축가 가우디의 풍으로 지어 나가사키를 대표하는 건축물이 되었다.

26성인의 순교 장소인 니시자카 언덕에 세워진 성 필립보 기념성당.


26성인의 부조물은 후나코시 야스다케(船越保武)가 브론즈 1장씩을 조각하여 통합한 예술작품으로, 성인들과의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부조물로 유명하다.

나가사키대교구 제6대 교구장이었던 고(故) 시마모도 가나메(島本要) 대주교는 2002년 4월 니시자카 언덕과 성필립보성당을 ‘순례지(Sanctuarium)’로 지정하였다.

나가사키대교구는 매년 2월 5일 26성인과 400년 가까이 이곳에서 일본인과 함께 순교한 한국, 스페인, 포르투갈, 필리핀 등 각국의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세계적인 순교행사를 갖는다.

올해 6월 10일 시성 150주년을 맞아 니시자카의 순교 순례지는 일본 주교단이 인정하는 순례지인 ‘일본 가톨릭 나가사키 순례지’로 한 등급 높이 오른다.

6월 10일 니시자카 순교지에서는 요셉 체노토우 주일 교황대사를 모시고 지정순례지의 제막식과 더불어 26성인이 순교한 십자가를 제거하고 나가사키의 사람들이 심었던 26성인을 기리는 26개의 동백나무를 심는 기념식도 함께한다.

26성인 사건은 400년 전의 일이지만 성인들의 공덕을 기리는 마음은 여전하다. 생각해 보건대 26성인의 순교는 나가사키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큰 영향을 끼쳐 국적, 문화, 종교와 관습이 다른 순례자들의 발길이 니시자카에 끊이지 않는다.

26성인은 같은 일본어로 기도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서로를 아끼고 사랑했다.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서로 다른 점을 내우세기보다 한마음으로 사랑하는 자세로 살아가는 길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위에 서야 하고, 남을 위한 배려는 차차 퇴색되어 가고, 이웃을 용서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워지고 있는 오늘날, ‘26성인의 순교’를 통해 우리의 게슴츠레한 눈을 다시 뜨게 하는 곳이 바로 니시자카 순교지이다.

성인들이 나가사키의 길을 걸으면서 한마음으로 하느님을 찬미했던 “모든 백성들아 주님을 찬미하라(Lautate Dominum Omnes Gentes)”는 노랫소리는 오늘도 니시자카를 찾는 이들의 마음을 하느님께 모아 올리게 한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17) [가톨릭신문, 2012년 6월 3일, 이건숙 율리에타 수녀(예수성심시녀회 나가사키분원), 정리 우세민 기자]


4,055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