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5일 (토)
(녹) 연중 제7주간 토요일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강론자료

연중 05 주일-나해-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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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0-02-06 ㅣ No.186

연중 5 주일 (나해)

 

          욥 7,1-4.6-7 1고린 9,16-19.22-23 마르코 1,29-39  

     2000. 2. 6.

주제 : 세상을 살아가는 힘

설(2/5) 잘 지내셨습니까?

어제 미사에 오셔서 가정의 평화와 행복을 기도하신 분들도 있고, 어르신들을 찾아뵈며 덕담을 듣거나 주방 한켠에서 쉬는 시간 없이 종종거리고 음식을 준비하신 분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해마다 다가오는 축제를 반쯤은 바쁘게, 반쯤은 정신없게 지내고 우리는 다시 하느님을 찬미하는 제단 앞에 모였습니다. 사람의 생활에서는 그렇게 바쁘고 정신없이 지낸 짧은 시간이었다고 해도 이 자리에 모인 지금의 마음자세가 그 계속이라면 어떠하겠습니까?

 

힘들고 바빴던 여러 가지 사정을 접어두고 한 주간을 새롭게 시작하는 오늘 제사를 봉헌하며 하느님께서 평화를 주시도록 우리 삶에 사랑이 함께 하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전례의 말씀에서 우리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인생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여러분에게 가끔씩 ’세상에 대해서 말하고 우리는 세상을 만들어간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제가 드린 질문에 여러분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말씀하시는가에 따라 우리가 만드는 삶의 모습은 달라집니다.  ’인생은 고해(苦海)’라고 불가(佛家)에서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삶에서 겪는 곤경이 내 힘으로 해결되지 않을 만큼 크면 우리는 무시무시한 생각을 하게됩니다. 그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것이 오늘 첫 번째 독서에 나오는 욥의 탄식이요, 푸념입니다.

 

욥은 의인이었다고 성서는 기록합니다. 그런 그에게 ’사탄’이 시기심을 갖고 도전장을 냈고, 그 믿음이 올바른 것임을 아는 하느님은 사탄에게 일정한 범위에서 시험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내립니다. 성실하게 살았다고 생각했던 욥에게 닥쳐온 것은 고통 그것뿐이었습니다. 자녀도 죽고, 모든 재물도 사라지고 기쁨의 요소라고는 하나 남지 않고 몸에는 종기가 생기고, 부인마저도 하느님을 욕하며 죽으라는 말을 남기고, 멀리서 찾아온 친구들마저도 위로의 말은 고사하고 ’숨겨놓은 잘못’을 사실대로 고백하라고 다그칩니다.  이러한 욥의 모습을 보면서 ’세상은 정말 이래도 괜찮은가?’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욥기의 끝을 보면, 우리가 만족할 만큼은 아니더라도 그 고통은 해결된 것으로 나옵니다. 이런 엄청난 과정을 겪는 ’욥’의 고통을 ’의인의 고통’이라고 합니다.  그 말은 억울하게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라면, 하느님이 모른 체 하지 않으실 거라는 믿음이 있기에 그 믿음을 갖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현실에서 이러한 고통을 겪고 있다면, 과연 어느 정도인지, 나는 그 고통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지 정확히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안타깝고 어려운 것은 변함이 없겠지만, 현실을 정확하게 볼 줄 알아야만 바꿀 수 있는 부분도 빨리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고통과 실망의 연속이라면 살아갈 힘을 발견하기는 참으로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일에 고통으로 시작해서 고통으로 끝맺는 일은 없습니다. 혹시 고통의 연속이라고 바라보는 것은 사람이 급하게 판단할 때 생기는 일입니다.  쉽사리 변하는 세상일에 적절하게 대응하라는 격언 ’인간만사(人間萬事) 새옹지마(塞翁之馬)’의 이야기를 기억해도 알 것입니다.  거기에 나오는 노인은 자기 일에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인생은 살아보고 난 다음 그 경험을 이야기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어떤 모습이 옳은 것인지 아무도 자신 있게 말해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살아온 방법을 말할 수는 있습니다.

 

두 번째 독서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과정을 이야기하는 바울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인생은 내가 택한 것도 아니고 하느님이 그렇게 살도록 직무로 맡겨주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이 말을 올바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이 말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삶에서 겪는 고통도 기쁨도 모든 하느님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흥분한다고 해서 바뀔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할 일은 때에 맞춰 열심히 움직여야 하는 것뿐입니다. 혹시 여기에 앉아 계신 어떤 분이 제가하는 이야기를 듣고 ’사람은 하느님의 꼭두각시인가?’ 묻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도 인간의 생각일 뿐입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시고 ’참 좋았다’라고 감탄하신 하느님께 무엇 때문에 ’당신 앞에서 재롱을 피우는 꼭두각시’가 필요하겠습니까?

 

우리 신앙인이 움직이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실천하자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세상의 모든 것을 주재하시고 이끄시는 분이지만, 우리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신다고 아우구스티노는 그의 고백록에 적고 있습니다.  ’나 없이 나를 내신 하느님, 나 없이 나를 구원하지 않으신다’라는 말씀대로 사는 것이 참된 신앙인이 가야 할 길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복음 말씀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을 잘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밤<Night>’은 악령이 맘껏 설치고 다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시간이 되자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악령을 쫓아내십니다.  악의 힘에 도전하는 것이 신앙인이 할 일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사를 마치고 나면서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또는 ’가서 복음을 실천합시다’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이 말은 단순히 입으로만 외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상하게도 병자들을 고쳐 주시면서도 그들의 입을 통해서 전해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업적을 전하는 것은 행동 없이 말로만 이루어질 때 의미없다는 소리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바를 올바른 행동으로 전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자세 한가지를 예수님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복잡한 일상을 떠나 ’기도하는 일’입니다. 기도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기도가 밥 먹여 주냐? 기도가 옷 입혀 주냐?’는 못된 소리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거기에서 받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인에게 기도는 활동을 위한 기초이고, 활동은 기도의 연장(延長)이기 때문입니다. 기도와 활동 둘 사이는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가끔씩은 어려운 세상에서 지치지 않고 살게 해 주는 힘은 바로 기도입니다. 여러분은 기도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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