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월)
(백)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성미술ㅣ교회건축

본당순례: 기쁨과 친교 가득한 의령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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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9-25 ㅣ No.1003

[본당순례] 기쁨과 친교 가득한 의령성당

 

 

방금 비가 멎은 성당 뜰에 들어설 때 마음이 평온해진다. 푸른 잔디는 푸근하고 정겹다. 사제관 앞 종려나무와 넓은 잎의 파초 주변에는 설핏 남국의 바람이 살랑거린다. 성전에는 주일학교 어린이의 목소리가 씩씩하다. 강론 중 퀴즈를 듣자마자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들어 정답을 말하자 신자들의 웃음꽃이 활짝 핀다. 최근 귀촌한 가정이 넷이나 있어 유아 수가 늘었다. 전 사목회장인 이인규 베드로의 말이다. 삼대가 함께 미사에 참례하는 모습도 보인다. 십여 명의 어린아이들로 인해 토요일 미사의 평균연령이 낮아졌다. 의령은 초고령화 사회로 노인 인구가 많다. 주일날 스타렉스 승합차 두 대를 모는 봉사자는 모두 열 명 정도. 칠곡공소를 비롯하여 화정, 가례, 용덕, 정곡의 노인들을 부지런히 실어 나른다. 그러는 몇 년 사이에 세상을 떠난 이들도 많다.

 

 

고령층이 많아도 활동적인 본당

 

정철현 바오로 주임 신부는 고령층이 많아도 본당은 활동적이고 열정이 넘친다고 한다. 성경공부반도 연령대별로 수요일과 토요일 두 번 열린다. 참가자는 사오십 명에 이른다. ‘여정 첫걸음’이란 이름으로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읽는다. 바오로 신부는 신자들 모두가 자기 자리에서 소임을 다하고 있어, 큰 어려움이나 힘든 부분은 없다고 한다. 그 말에서 사목 방침을 가늠할 수 있다. 깊은 믿음, 희망, 사랑을 지니고 영성적 성장과 기쁨과 친교 봉사를 실천하는 행복한 의령본당 공동체가 그것이다. 본당의 날은 격년제로 성지순례와 본당 자체 행사를 하는데, 작년 가을에는 구한선 타대오 성지순례와 고성 야유회를 병행하여 기쁜 친교의 시간이 되었다. 자모회원들도 주부로서 주일학교 교사까지 겸하며 활동적인 본당을 이어가고 있다.

 

 

본당의 오랜 역사를 이야기꽃 피우며

 

연령회장인 최종환 토마스가 이야기를 이었다. 의령에 복음의 씨앗이 싹튼 것은 1890년 대부터였으며, 1966년에 함안공소에서 의령본당으로 승격했다. 최 회장은 40년사에 이어 50년사까지 편집 책임자였다. 꼼꼼히 기록하고 정리한 사진과 자료들이 단연 눈에 띄었다. 그렇지만 의령성당 50년 화보를 편집할 때, 화보 내용은 다양성이 부족하고 편중하여 아쉬움이 컸단다. 2016년 이후의 소사들을 여전히 모으고 정리하며 60년사를 향해 가고 있다. 교직 경력 42년에 교장으로 퇴임하기까지 학교에서 익숙하게 해 오던 것이라 본당역사 기록 편찬도 용이하단다. 두 차례의 사목회장에 이어 연도와 장례지도사 기본 교육 강사로서 교구 일을 도왔다. 본당의 연령회가 모범적으로 운영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앞으로도 신앙의 역사와 문화가 잘 보존되길 바랄 뿐이다. 옛 공소 사진 속의 까만 교복을 입은 소년이 자신이라는 최 회장은 여전히 이곳을 지키며 귀한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정호순 데레사 또한 본당의 산증인으로 초창기를 회고했다. 당시 성당 일을 보는 수녀 한 명과 의령여중·고에 수업 지원을 하던 수녀 두 명이 있었다. 학교 수녀들은 교원자격증이 없어서, 몇 년 뒤 학교 일을 그만두고 본원으로 돌아갔다. 당장 수녀가 하던 성당 일을 대신할 사람이 없었다. 당시 정 데레사는 텅 빈 수녀원에서 한 달만 살기로 하고 모든 일을 이어받았다. 그 한 달이 어느덧 12년으로 늘어났다. 성당의 제대일과 식관 일까지 도맡았다. 신영도 루카 사목회장은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는데, 정 데레사의 심부름을 도운 적이 있다고 회상한다. 정호순의 남편도 입교하여 사목회장으로 세 차례나 봉사하였다.

 

 

어려운 시절을 신심으로 이겨내

 

이인규 베드로에 의하면, 의령성당 자리는 만석꾼 집안 출신인 이우식의 생가터였다. 그는 어릴 적에 이우식의 손자와 한동네에서 자랐다고 했다. 부잣집 터의 기운을 받아 세워진 의령성당이지만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 사제관의 생활비조차 감당할 수 없던 70~80년대를 거쳤다. 주일헌금 3만 원을 못 채워 전현직 회장 간에 사비로 해결했던 때를 그는 떠올렸다. 사제가 신자들을 일대일로 면담하며 교무금 증액을 호소하던 시절도 있었다. 우선 많이 내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사제관으로 다시 오라며 종용했다. 부족함은 주님께서 다시 채워주시지 않겠냐며 서로 위로했다. 십여 년 전까지도 사제관은 단열재가 안 들어가 겨울이면 추웠다. 여러 차례의 시공으로 상황은 나아졌다. 코로나 전후에도 경제적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워도 교무금을 꼬박꼬박 내는 신자들이 있었다. 때 묻지 않은 신심 때문이라고들 입을 모았다. 만석꾼 생가터는 믿음으로 가득 찬 신앙의 땅으로 거듭났다.

 

 

화음으로 하나 되려는 의령본당

 

신영도 루카 회장은 코로나 이전 신자들의 90퍼센트는 돌아왔다고 본다. 그러나 아직도 냉담자들이 많고, 교구 내 많은 신심 단체가 위축된 점을 상기한다. 코로나 시대를 거치면서 너 나 할 것 없이 편한 신앙생활에 익숙해지진 않았는지 자신을 돌아볼 때라고 한다. 그리고 의령본당이라면 성가대를 빠뜨릴 수 없단다. 20여 명의 단원이 내는 화음이 수준급인데, 여느 시골 성당의 성가대쯤으로 여겨서는 안 된단다. 주임 신부도 다녀본 본당 중에서 제일가는 성가대라고 맞장구쳤다. 이미 2019년에 찾아가는 음악회를 통해 교구 합창단과 공연하였다. 내년에는 성가대 음악회를 별도로 준비하고 있다. 

 

설립 50주년 행사 당시 이해인 수녀 초청 강의를 열었을 때는 각지에서 많은 사람이 몰려와 자리가 부족해서 성당 마당에도 의자를 준비할 정도였다. 의령성당 신자들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본당을 떠올리며, 고령화도 사라지고 냉담자들도 돌아오는 광경을 그리며 함께 손을 모은다.

 

[2023년 9월 24일(가해) 연중 제25주일(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가톨릭마산 4-5면, 이준호 라파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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