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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영화칼럼: 영화 아무르 - 존엄한 죽음이라는 이름으로 저지르는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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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10-03 ㅣ No.1303

[영화칼럼] 영화 ‘아무르(Amour)’ - 2012년 감독 미카엘 하네케


‘존엄한 죽음’이라는 이름으로 저지르는 죄

 

 

생로병사(生老病死). 누구나 태어나면 늙고, 병들고, 죽습니다.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그래도 모두가 사는 동안 겪지 않길 바라는 것이 있다면 병(病)이 아닐까요. 더구나 그 병이 죽을 만큼 고통스럽고, 삶을 비참하게 만든다면. 그래서 ‘웰다잉(well-dying)’까지 외치면서 온갖 방법과 노력으로 그것을 막고 피하려고 애쓰는지도 모릅니다.

 

늙어가면서 이런 의문을 가집니다. ‘주님은 왜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 앞에 견디기 힘든 고통의 시간을 주시는 걸까. 당신 품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걸까. 그조차도 사랑이라면 그 사랑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거부할 권리는 없는가.’ 병이 주는 고통과 두려움, 비참함은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 없습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우리는 죽음을 알지 못하기에 둘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고통을 없애기 위해 자의든, 타의든 생명을 끊어버리는 것을 ‘존엄한 죽음’이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삶의 고통이 죽음과 소멸의 두려움보다 커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은데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권리는 없다는 것인가.’ ‘생명이 주님의 선물이자 의무라고 해서, 죽음도 그렇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전신마비로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씨 인사이드>의 라몬과 <미 비포 유>의 윌이 그랬습니다. 이유는 “더 살 이유가 없어.” “이런 삶은 의미 없어.”였습니다.

 

똑같은 말을 <아무르>의 안느(엠마누엘 리바 분)도 합니다. 말년을 우아하고 평화롭게 보내고 있는 80대 노인에게 어느 날 갑자기 불행이 찾아옵니다. 마비 증세가 나타나 수술을 했는데 상태가 더 나빠져 반신불수가 됩니다. 그런 아내를 은퇴한 음악 교수인 남편 조르주(장 루이 트린티냥 분)가 헌신적인 사랑으로 보살핍니다. 안느는 남편에게 하나만 약속해 달라고 합니다. “다시는 날 병원에 보내지 마.”

 

‘요양 병원에서 쓸쓸하게 혼자’가 되는 것이 슬프고 두려운 고령화 사회에서 그녀의 소망은 별난 것도 아닙니다. 조르주는 그 소망을 들어줍니다. 이따금 방문 간호사가 오는 것을 빼면 모든 시간을 쏟아 혼자서 아내를 돌봅니다. 그러나 마지막 시간을 ‘내 집에서 편안하고 품위 있게 보내기’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아픈 사람도, 돌보는 사람도 고통과 절망으로 지쳐갑니다.

 

<아무르>는 우리 주변에서도 심심찮게 일어나는 극단적이고 비극적인 선택으로 결말을 맺습니다. 그것을 안느가 원했다고 ‘존엄한 죽음’이 되고, 조르주의 ‘사랑(아무르)’이 되고, 둘의 ‘행복한 기억’으로 남게 될까요. 아무리 ‘조력 존엄사’로 미화해도, 누가 그것을 행하든 살인입니다. 안락사 합법화에 반대하는 서울대교구의 입장문은 주님께서 왜 생의 마지막에 병이라는 고통의 시간을 주는지 말해 줍니다. ‘그 시간을 주님께 봉헌하며, 지난날을 성찰하고 가족 친지들과 함께 사랑과 화해와 용서의 시간을 보내며 다가오는 죽음의 시간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의미 있고 존엄한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2022년 10월 2일(다해) 연중 제27주일(군인 주일) 서울주보 6면, 이대현 요나(국민대 겸임교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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