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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교회사 에세이36-41: 교회 조직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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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1-17 ㅣ No.736

교회사 에세이 (36) 교회 조직의 발전 (1)

 

 

오늘부터는 교회의 외적 조직의 발전에 관해 살펴보게 됩니다. 우리가 이런 교회 조직의 발전에 관해 살펴 볼 수 있는 가장 오랜 자료는 신약 성경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우리가 원하는 방법으로 교회의 외적 조직의 발전과 성장에 대해 말해주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성경 저자의 관심이 거기에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초기 교회의 조직적 구조와 성사적 의미에서의 서열화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법적인 발전을 하고, 변형되어 가기 시작합니다. 초기 교회가 성경의 저자들처럼 공동체의 외적인 모습과 질서를 세우는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음에도 조직적이고 질서를 짓는 일련의 요소들이 교회 안에 등장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지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교회의 직무들 :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성장 과정 안에서 다양한 역할들의 확실한 조직화의 필요성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것은 공동체가 조직화의 필요와 공동체 내에서의 위치에 대한 규정의 필요에 대한 자각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요구와 자각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데 그것은 성경에 권위를 갖는 여러 집단들의 존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 첫째로, 초기 교회의 두드러진 사람들 중에서 ‘열 둘’(Dodici)이라 일컫는 사도들이 있었고, 그들의 기원은 역사적으로 예수님께로 거슬러 가는 오래된 그룹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복음에 따르면 그들은 새 이스라엘을 대표하기 위한 상징의 기능을 갖는 그룹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특별한 직무를 위한 법적인 책임이 맡겨지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다른 이들보다 법적인 우위를 갖는다는 어떤 사료도 발견되지는 않습니다.

또 다른 그룹이 존재하는데, 바오로 서간에서 보듯 요한과 베드로와 야고보의 그룹으로, 예루살렘 공동체의 ‘기둥들’이라고 표현되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지역 공동체에서 ‘권위’를 갖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아마 말씀의 권위적인 인도자들이었을 것입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형제였고, 베드로와 요한은 열 두 사도의 그룹에서 온 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예루살렘에 ‘일곱’이라 불리는 그룹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그리스 이름을 가진 이들로, 사도행전은 ‘일곱 부제들’이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초기 예수님 추종자들 중에서 ‘헬레니스트’의 직접적인 모임에서 권위를 갖는 이들이었습니다.

위 그룹들의 권위의 기초와 근거를 보면 ‘열 둘’의 경우는 예수님과 함께 살았다는 사실, 그리고 그 분으로부터 임명되었다는 점 그리고 부활의 증거자들이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이것은 ‘기둥들’의 삼분의 이에게도 해당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기둥들’ 중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열 둘’에 속했지만 야고보는 ‘열 둘’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야고보를 가리켜 그도 또한 부활의 증인이었다고 전해주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가족이었다는 무게감이 확실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일곱’은 예루살렘 헬레니스트들의 대변인들이었고 실질적인 우두머리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임명되었는지를 알 수는 없습니다.

이렇듯이 권위의 원천은 조금씩 다릅니다. 여러 모양의 권한과 역할들은 전문적인 엄격함을 가졌지만, 우리가 초기 공동체내에서 성사적, 그리고 법적인 의미에서의 ‘직무’를 묘사해 낼 수는 없습니다. 사도들과 부활의 증인들의 경우, 기원에서 독보적인 권위를 가졌고, ‘일곱’은 두 개의 언어가 사용되는 공동체를 인도하기 위한 현실적인 해결책이라 여겨집니다. 자연스럽게 예루살렘의 권위에 있어서는 부활에 대한 증언이 모든 공동체에게 가장 중요했기 때문에 ‘열 둘’의 권위는 넘어설 수 없는 권위였습니다. 그렇지만 그 권위가 새롭게 생겨나는 다른 공동체들에 대한 예루살렘 공동체의 법적인 우위를 뜻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의 권위는 사랑의 연대의 사슬이었습니다. 이렇듯이 아직 초기 공동체에서 어떤 특별한 조직적인 관계는 생성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2016년 1월 17일 연중 제2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37) 교회 조직의 발전 (2)


 

그리스도교 전파의 과정에서 우리가 앞서 열거했던 권위의 담지자들은 사실 고정된 채로 남아있지는 않았습니다. 이유는 공동체의 삶 안에서 위계적인 요청과 지역 공동체들 안에서 어떤 역할에 대한 필요가 생겨났기 때문이었고, 공동체는 책임을 갖는 인도자가 필요로 했던 것에 기인합니다. 하지만 이런 권위에 대한 서열화란 것이 중앙 집권적인 지시나 어떤 기초적인 계획에 따른 과정이 아니었다는 점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과정은 당시의 상황과 기능에 따라 가변적이었고, 실제로 실천되었던 권위와 그 형식에 대한 모습은 여러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가장 먼저 두드러진 현상은 어떤 공통적인 합의는 없었지만, 개별 공동체의 수장은 하나가 아닌, 권위를 가진 그룹에 의해서 인도되고 건설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 권위를 가진 이들의 모습과 명칭은 몇 가지로 드러납니다. 마치 그들의 원로들처럼 유다이즘에서는 이런 인도자 그룹의 특성을 가진 조직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기에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런 위계는 자연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공동체에서 ‘사제들’은 그런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에 바오로 사도가 선교한 지역의 상황은 달랐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스스로가 사도적 권위를 가졌고, 그것은 개별 공동체에 설교와 규율에 있어서 법적인 지도의 권위를 갖는다고 여겼습니다. 사도가 모든 지역에 있을 수 없으므로, 각 공동체들에 특별한 임무를 띤 대표자들이 있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들을 ‘사제들’이라 부르지 않고, 약간 다르게 부릅니다. 예를 들면, ‘협조자들’ ‘수고하는 이들’ 혹은 ‘지도자들’, 또는 ‘관리하는 이들’이라고 불렀습니다. 한편으로는 다른 임무와 기능을 가진 이들을 ‘사도들’ ‘예언자들’ 그리고 ‘교사들’로 구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바오로 사도는 통일된 개념 안에서 교회의 임무를 구분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역할과 지위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의 기능을 서로 다르게 이름 부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그 자신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지도에 관한, 그리고 조직적인 면에서 권위를 가진 이의 위치를 ‘봉사’와 ‘섬김’이라고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고하는 것처럼 조직 안에서의 위계나 서열에 의미를 두지는 않았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교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은사와 열정이 혼재하기만 하고, 공동체의 지도와 인도에 있어서 서열적인 기능의 요소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권위와 임무를 강화하지 않으면서도 분쟁들에 대처했고, 오히려 은사의 다양함을 설명하고 이 은사를 서로의 서열을 위한 경쟁이 아니라, 교회의 건설에 잘 사용하도록 초대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바오로 사도는 순종적이지 않았던 교회에 대해서는 개인적 권위를 주장하며 완고한 입장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서도 권위란 자신의 사도적 파견과 복음의 증거를 위한 권위이지, 교회 조직이란 의미에서의 권위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나아가 바오로 사도의 편지들에는 ‘우두머리들’과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주교들과 부제들’ 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감독자들과 조직자들’로 소개되는데, 아직 주교들에게 권력적 측면이 보여지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의 중요한 구별이 어렴풋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다른 두 개의 공동체적 조직을 말하고 있고, 그들은 분명 두 개의 서열로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는 히브리적 기원과 무엇보다도 유다교 공동체의 특성을 갖는 사제적 조직과 바오로 공동체에서 보이는 주교직이었습니다. 이 둘 모두는 집단적 체제를 갖고 있었습니다. [2016년 1월 24일 연중 제3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38) 교회 조직의 발전 (3)


 

이제 지난 호에서 조금 언급했던 것처럼 초기 그리스도교 안에서 위계의 구별이 어렴풋하게 드러나기 시작되는 지점을 살펴볼까 합니다. 두 개의 서열을 갖는 조직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하나가 유다교 공동체의 특성을 갖는 ‘사제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바오로 사도 공동체에서 드러나는 ‘주교들’의 모임이었습니다. 이들의 임무는 주로 공동체의 인도에 있었기에, 그를 위한 지시적, 지휘적인 조직이 드러나기 시작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임박한 세상의 종말의 기다림에 방향 지어졌던 사도들의 시대, 그러므로 시초에서부터 조직화와 조직의 설립이 중요성을 지닐 수 없었던 시대는 이제 역사 속으로 흘러갔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가 지나자 교회 안에, 즉 1세기에서 2세기로 넘어가는 즈음에 새로운 시대적 요청과 새로운 정서가 교회 안에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훗날 교회의 직무와 조직의 발전에 뚜렷한 영향을 미칩니다.

힘겨운 세상을 견디어 내야하는 교회는 긴 세월에 걸쳐 안정된 조직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이제 이런 조직의 문제는 교회의 큰 관심사 중의 하나가 됩니다. ‘감독하는 이들’은 이제 교회의 하나의 직무로 자리하고, 이들은 거룩하고, 교의적이고, 규율적인 문제에 있어서 사도들로부터 전해지는 충만한 권위와 거룩함을 갖는 조직이 되어갑니다. 이런 임무는 서품을 통하여 성사적으로 성대하게 전수되었고, 그들은 교의와 기원으로부터 전해진 복음을 소유한 이들의 사슬로 연결되어 전통의 담지자요 교의의 보증자들이 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에 대한 보호를 염두에 두면서, 제도적이고 법적인 의미를 동시에 갖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조직화는 이단의 출현으로 더욱 가속화된 측면이 있기도 하였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주변 환경들은 조직의 단일화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시초에는 사제적 조직과 주교적 조직들 간의 중간에 위치한 어떤 혼합적인 형태가 발견되기도 하였습니다. 클레멘스와 이냐시오 그리고 뽈리까르포의 편지들에서 보듯이, 사제와 주교의 모습이 함께 발견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둘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재현해 내기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것은 이런 발전이 다른 주변의 상황들과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여러 직무들 사이의 상하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다시 말하면 교계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고, 공동체 내에서 신학적 측면에서 우월적 역할을 맡는 직무에 대한 개념을 교회가 갖게 됨을 일컫습니다.

이런 초기 그리스도교 안에서 이뤄진 전환은, 즉 어떤 거룩함의 특성을 갖는 법적인 형태와 직무의 성사적 개념화를 향한 전환은 교회의 역사 안에서 이뤄진 새로움이었습니다. 신학의 역사 안에서 이것은 소위 말해 ‘원시가톨릭’의 생성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으로, 새로운 시대를 아주 잘 설명해주는, 즉 초기 교회로부터 이어지는 역사 안에서 가톨릭 교회로의 넘어감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 대한 즉각적 응답과 복음의 성령이 살아있는 은사적 공동체는 이제 교계적 특성의 관계들과 법적인 구조에 의해서 형성된 교회에 의해서 대체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런 조직이 글자 그대로 예수님과 사도들에 의해 설립된 신비스럽고 신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사도들이 유산으로 넘겨준 신학적인 영향 아래 있었고, 그러기에 그리스도교에서 직무들과 복음의 관계는 봉사와 십자가의 기준에 의해 규정되었고 지배와 권력은 배제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권위의 부정을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2016년 1월 31일 연중 제4주일(해외 원조 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39) 교회 조직의 발전 (4)


 

이번 호는 교부들의 편지를 통해서 교계제도의 형성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후기에 저술된 신약 성경과 같은 시대에 쓰여진 클레멘스의 첫 번째 편지는 앞서 말한 원시 가톨릭의 전형적인 예를 보여줍니다. 이 편지는 최고 우두머리, 주교, 사제들 그리고 그들의 전례적 기능, 특히 ‘예물 봉헌’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직무들이 사도들에 의해서 설립되었다고 전합니다. 이런 주장은 교회 조직의 완성이 하느님의 원의에 의한 거룩한 것이고 변경될 수 없음을 드러내줍니다. 그러므로 공동체는 사제를 비롯한 이런 권위 앞에서 순명의 태도를 가져야 했습니다. 이런 역사적 발전은 신학의 기초가 되고, 이런 직무들은 변화 가능성에서 예외적인 것이 되어 갔던 것입니다.

다른 예는 140년경 시리아에서 쓰여졌고, 교회의 삶과 규칙들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Didache(디다케)와 Dottrina dei dodici(열두 사도의 가르침)입니다. 디다케는 예언자적 시대, 즉 스승들이 지역을 옮겨 다니며 다양한 공동체를 방문하는 사도들 시대에 관한 흥미로운 점을 보여줍니다. 반면에 주교와 부제들은 지역을 선택하여 그 곳에 머물렀으며(정주) 고유임무 외에 행정적 임무를 맡아야 했음을 보여줍니다. 이 문서들은 직무 서열의 이중적 현상을 전해주는데, 순회적 기능자들(예언자, 사도, 스승들)과 지역에 거주하는 이들(주교들과 부제들) 이었습니다. 이런 직무자의 선출 또한 공동체의 선택을 통해 완성됨을 증거해 줍니다.

원시 가톨릭 시대는 1세기 후반에서 2세기 중반까지로 위치 지을 수 있습니다. 이 시대에 리옹의 주교 이레네오(Ireneo di Lione)의 편지들에서 우리는 조직적 부문이 더욱 견고하게 발전하고, 그것이 교의의 영역에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초기 교회에 있어서 진실과 오류의 순수한 경계를 찾기 위한 것으로, 이레네오는 이런 진리의 보전은 예외적으로 주교들에게 맡겨진다는 원칙을 천명합니다. 그리고 그 주교들이 보증하고 간직하는 진리는 사도들로부터 전해진 것을 말합니다. 사도들로부터 이어오는 끊어지지 않는 긴 사슬로 연결된 주교는 그 자신의 좌에서 첫 번째 진리의 담지자로 동의되었고, 이 첫 주교들은 한 사도에 의해서 착좌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교직이 갖는 직무의 정통성 아래서, 이런 직무들은 역사적 연속성을 창출해 내었던 것입니다.

200년이 조금 지난 시점에 로마의 히뽈리토(Ippolito) 주교의 서임은 다른 직무들을 확인해 줍니다. 직무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교회에서 교회로 가지를 뻗어나갔고 이런 임무와 기능은 비슷한 범주 안에서 발전되어 갔지만, 종종 그들 직무들 사이를 정확하게 규정하거나 구별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 직무들에는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것도, 또 생소한 것들도 있었습니다. 주교들과 사제들, 부제들, 그리고 고해자들, 과부들, 독서자들, 동정녀들, 차부제들, 교사들, 시종들, 구마자들, 성체분배자들의 존재가 확인되고 있습니다. 직무는 아직도 엄격하게 규정지어져야 할 것으로 남아있었습니다. 2-3세기에 이들의 의미는 아직 많은 점에서 미결정으로 남아있었습니다.

특별히 ‘부녀들’의 경우를 보면 이 직무는 초기에만 존재하였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히뽈리토에 와서 우리는 지금 살펴 본 것 외에도 공동체 안에서 서열의 기초 위에 성직자와 평신도가 구별됨을 발견하게 됩니다(tradito apostolica 8-10). 또 그의 저술에서 직무에 대한 단어의 변화가 감지되는데, 교회적 서열에 대해서 말하며 봉사와 섬김보다 권력과 다스림을 더 강조하고 있음이 발견됩니다. 2세기 말에서 4세기에 이르면 교회적 직무의 신학적 개념이 결정적으로 전례와의 관계에로 자리를 옮겨갑니다. 구약의 개념을 받아들여 주교와 사제는 구약의 사제처럼 성찬을 봉헌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구약에서 사제에게 요구되던 전례적 순결은 교회의 독신제도를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그 첫 번째 흔적이 4세기에 보여지게 됩니다. [2016년 2월 14일 사순 제1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40) 교회 조직의 발전 (5)


 

계속해서 함께 살펴보고 있는 것은 ‘눈에 보이는 교회 조직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입니다. 그런 ‘교회 조직의 변화’의 역사 안에서 주교의 직무는 그 모든 것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이 될 때까지 발전합니다. 앞서 보았던 것처럼, 그 시작은 그렇게 특별히 중요하게 기대되는 그런 직무가 아니었습니다. 첫 번째 주교직의 기원은 하나의 ‘감독의 직무’였지만 주교직은 점점 사람들의 모임, 주교들의 모임으로, 공동체에서 조직화의 임무와 집행의 책임을 통해 완성되어갑니다. 이 직무에 다른 임무들이 역사를 통하여 추가되는데, 즉 가르침의 권한이 추가되는 것을 우리는 디다케를 통하여 보게 됩니다(디다케 15,1). 이런 역사적 과정을 거치며 주교직은 가장 강력하고 중요한 직무가 되어갔던 것입니다. 주교직은 3세기까지 성장을 계속해 가는데, 그 때가 되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를 흡수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교회의 조직에서 그 자신의 큰 족적을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교 군주’의 직무가 되어갔던 것입니다. 이런 표현은 모든 공동체가 더 이상 주교들의 집단이 아니라, 하나의 주교 감독자를 갖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군주 주교’ 직무의 존재를 증거해 주는 가장 오래된 사료는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주교(Ignatio di Antiochia)의 일곱 편지입니다. 이냐시오는 자신이 안티오키아의 ‘군주 주교’로 소 아시아의 다섯 교회에서 이런 주교직의 존재를 추측하게 하는 편지를 습니다. 에페소, 마그네시아, 트랄레, 필라델피아와 스미르네 교회가 수신인인 편지를 115-117년경에 쓰는데 여기서 이런 점들이 발견됩니다. 어떤 변화의 특징이 이런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예를 들면 로마 교회처럼, 아직도 집단적인 지도가 작동하고 있기도 했습니다.

다양한 교회의 직무들은 서로 다른 방법으로 발전하고 빠르게 구별되어 갑니다. 2세기경이 되면 군주적 주교직은 계속해서 하나의 모습으로 모든 개별 교회들에 적용되었습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냐시오에서부터 벌써 공동체 단일성의 상징이 주교직의 단일성이란 사실과 또한 주교가 성찬례를 주관한다는 사실입니다. 주교는 모든 관점에서 공동체의 우두머리요 중심이 된 것입니다. 주교에게 모든 것이 속하게 되었고, 주교 밑에 일부의 그룹들, 즉 사제들과 부제들이 놓여지게 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위계적 조직화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이었습니다. 즉 이 교회적 서열이 천상적 위계의 지상 모델, 혹은 연속성으로 여겼다는 점입니다. 이냐시오는 천상적 질서(하느님-그리스도-사도)의 교회의 서열(주교-사제-부제)로 이해했다는 점입니다.

고대 교회에서 이것은 권위의 합법화와 기초 놓기에 아주 특별하고 효과적인 모델이었던 것입니다. 교회적 서열은 천상의 질서에 상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서열은 하느님에 의해서 원해진 것이었고, 그런 이상 그것은 변경될 수 없는 어떤 것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의 도덕, 윤리가 싹트는데, 즉 공동체는 이 직무에 대한 존중을 가져야 하고, 하위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윤리적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적 서열이 천상적 위계를 재생산한다는 신학적 개념은 약 500년경 위디오니시오(Pseudo Dionigi)에 의해서 전해진 것처럼 중세의 서열 개념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이런 생각이 하지만 이냐시오에게만 국한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주교는 하느님의 대리자가(Veci di Dio) 되어 공동체는 하느님께 순종하듯 그에게 순종해야 한다(막네시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6,1). 유일한 주교는 유일한 하느님의 모상이고, 교회가 위협 당할 때 교회의 단일성을 보증하는 이였던 것입니다. 이것으로 지역 교회의 인도자는 오직 주교 하나여야 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의 모상과 교회의 단일성은 흐릿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군주적 주교 직무는 고대 교회에 견고함과 단일성을 부여했습니다. 교의와 전례에서의 단일성은 유일한 주교 아래, 하나의 공동체의 효과적인 인도의 가능성을 열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주교직은 가장 강력하고 중요한 직무로 자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2016년 2월 21일 사순 제2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41) 교회 조직의 발전 (6)

 

 

교회조직은 천상적 위계에 상응한다는 것을 지난 호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에 하나의 관점이 더 추가되는데 그것은 사도적 창립이라는 신학적 기초입니다. 이 시대 주교들의 모습은 바로 ‘사도들의 후계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모델은 교회 조직의 합리적이고, 합법적이며 변형될 수 없는 신학적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2세기가 되면 주교는 교의의 순수성을 보증하고 공동체를 인도하였고, 교회의 규율을 감독하는 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찬례에 참여와 허락을 감독하고, 교회의 단일성이 그의 인격을 통해 상징되게 되었습니다. 3세기가 되면 주교는 교회의 희생 예물을 하느님 대전에 봉헌하는 자이고, 사제들을 서품하고 죄를 용서하는 이가 됩니다. 주교는 교회의 최상위 사제요 우두머리가 된 것입니다.

이런 중요한 주교직의 권위에 대한 신학적 확정에 공헌한 이는 3세기 중반 아프리카 북부 카르타고의 주교 치쁘리아노(Cipriano)였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교회는 주교의 교회였고, 주교의 직무는 교회의 중심점이었습니다. 또한 주교는 지역 교회와 보편 교회의 연결을 담보하면서 교회의 단일성과 평화를 보증하였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 위에 주교들의 단일성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즉 베드로와 함께 주교 직무가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주교들 상호간의 합의는 마치 보편 교회의 단일성처럼 베드로 직무의 성취 또는 완성이었고, 주교의 직무는 단일성에 대한 봉사였습니다. 이렇게 그가 큰 열성으로 단일성을 강조하는 것은 당시 상황의 반영이었습니다. 즉 데치오 황제 박해 동안 많은 순교자 뿐 아니라 더 많은 배교자들이 나왔고, 그들이 (lapsi) 다시 교회로 돌아오려고 했으므로, ‘그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의 문제로 교회가 분열되고 있었습니다. 엄격주의자들은 되돌아올 가능성을 제거하고자 했고, 관대한 이들은 받아들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많은 현실 교회의 불일치 안에서 치쁘리아노는 주교들에게 다양한 권한을 부여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오직 주교만이 권위가 있고, 죄사함의 충만한 권한을 소유하고, 그 과정을 인도하고, 교회와의 화해를 결정할 수 있는 이로 자리매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주교직은 더욱 다양하게 부여되었던 임무들과 권한 그리고 권력의 덕택으로 명실상부 교회의 중심적 직무가 되었던 것입니다. 주교는 현실적으로 그 자신 안에 모든 기능과 교회의 법적인 권한을 하나로 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과정이 아무런 저항 없이 이뤄지지는 않았습니다. 분열된 교회와의 단절이란 아픔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교회의 공동체적 구조는 자기 공동체의 사건들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하는 구조였습니다. 그렇게 3-5세기까지 우리는 로마 교회처럼, 혹은 아프리카와 스페인 지역의 교회들처럼, 새로운 주교의 선출에 그리스도교 백성들도 참여하였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 참여는 성직자에 의해서 제안된 후보자에 대해 허가를 주거나 아니면 거부함을 포함하였습니다. 이런 참여는 적합한 주교를 찾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직 주교의 서품은 태동되지 않았고, 물려지지 않고 지울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단이나 부적함에 따른 주교의 면직이나 파면 또한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런 주교직의 계속된 발전의 결과는 개별 교회들 간의 동등한 관계, 즉 ‘친교’의 구조에 있어서 하나의 변형을 가져오게 됩니다. ‘균형’에 균열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교들 사이에 특권과 권력에서의 구별이 결정적으로 발생하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모든 주교가 동일한 중요성을 획득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주교들 사이에서 지위의 다름은, 예를 들면 과거에 다른 교회들에 비해 유명하거나 알려지지 않았었거나 혹은 서로 다른 도시들의 정치적 특권의 차이에서 기인합니다. 이 문제는 다음 호에서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이렇게 고대 교회의 주교들은 고난 가운데 확장되고 있는 교회의 지휘그룹이 됩니다. 그들 중의 많은 이들이 교양 있고, 신학적 저술에 뛰어난 이들이거나, 교회를 인도하기 위한 현실 정치에서 능력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마치 하나의 종교 대표자들처럼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즉 코스탄티노 이전의 시대에도 주교들의 좋은 본보기가 당 시대의 존경을 받았고, 그렇게 주교직은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2016년 2월 28일 사순 제3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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