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 (목)
(백)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너희 기쁨이 충만하도록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소공동체ㅣ구역반

왜 소공동체인가? - 소공동체가 안 된다? (1)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10-21 ㅣ No.124

[특별기고] 왜 소공동체인가? - 소공동체가 안 된다? (1)


* 이번 달부터 소공동체 활성화를 위해 대구대교구 2대리구장 박성대(요한) 주교대리 신부님의 글을 연재해드립니다. 현재 본당 소공동체를 하고 계시는 분들과 소공동체 모임을 갖고자 하시는 분들께 많은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 편집자 주(註)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보라, 너희 집은 버려질 것이다.”(루카 13,34-35)


1. 소공동체가 안 된다?

몇 년 전, 대구대교구에서 소공동체 대회를 가진 적이 있었다. 마침 서울대교구 정월기 신부님께서 소공동체에 대한 강의를 시작하면서 이런 질문을 하였다. “‘소공동체!’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그러자 뒷좌석에 계신 어느 신부님께서 “안 된다!”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참가자들 모두가 일시에 큰 소리로 웃은 기억이 있다. 사실 맞는 대답이다. 소공동체는 잘 안 되고 있다. 한국천주교회에 소공동체가 도입된 지 20년이 되었고 대구대교구에서는 제1차 교구 시노드의 결론으로 소공동체를 도입하고, 본당의 모든 조직도 소공동체 정신에 따라 개편하기까지 하면서 10년을 거쳐 왔지만 소공동체 사목을 하는 본당은 거의 없다.

어느날 교구장이신 조환길 대주교님께서도 물으셨다. “왜 대구대교구에서 소공동체 확산이 안 됩니까?” 이 질문은 대주교님 혼자만의 질문이 아니다. 교구 대부분의 신부님들이나 신자들의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지금 대구대교구에서는 소공동체 사목이 안 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제와 신자들이 “되지도 않는 소공동체를 붙들고 있을 이유가 무엇인가?”하고 소공동체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며 포기를 권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그렇다면 소공동체는 과연 미래 교회의 대안이 될 수 없다는 말인가? 이쯤에서 소공동체 사목을 포기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인가? 과연 소공동체 사목은 실현 불가능한 것인가? 왜 그럴까?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소공동체가 안 되는 이유는 분명히 있다. 그렇다면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지금의 교회가 소공동체를 받아들이기에 매우 어려운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공동체가 안 되고 어려운 것이 당연한지도 모른다. 소공동체가 잘 안 되는 현실을 보면서 먼저 예수님께서 하신 다음의 말씀을 소개하고 싶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보라, 너희 집은 버려질 것이다.”(루카 13,34-35)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셨지만 그들은 그 복음을 마다하였다. 그래서 결국에는 그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말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 구세주이시며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이신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알아볼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편협한 율법주의에 젖어 있고 전통과 관습에 묶여있고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마태 12,7)라고 하신 말씀을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마음이 경직되어 있고, 귀와 눈이 멀어져 있었다. 그로 인해 결국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분을 죽이는 어처구니없는 죄를 짓게 된 것이다. 구약시대에 자신들이 누리는 기득권이나 특전에 연연해 한 나머지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에 눈을 뜨지 못한 것이다. 과거의 전통만을 고집한 나머지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당신이 한탄하시고 우신 예루살렘 성전에 제일 먼저 들어 가셔서 평소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분노를 터뜨리시고 예수님답지 않는, 이해할 수 없는 난폭한 모습을 보이시며 말씀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그리고 또 말씀하셨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22) 지금의 교회는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으려고 하지 않고 자꾸만 헌 부대에 담으려고 하고 있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마르 2,22) 답답한 마음이 앞선다.


1) 교회가 정체성(正體性)을 잃었다.

소공동체가 잘 안 되는 그 첫 번째 이유로 교회가 정체성(正體性)을 잃었기 때문이다. 교회가 정체성을 잃었다는 증거가 무엇인가? 그것은 교회가 복음에서 멀어졌다는 말이다. 이 말은 ‘말씀중심’의 교회가 아니라는 말이다. 심하게 말하면 말씀을 잃어버렸다. 교회가 복음에서 멀어지면 예수님과 멀어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틀림없이 교회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교회가 정체성을 잃게 되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즉 교회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인지를 모르게 된다. 또한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맡기신 중요한 사명인 빛과 소금의 역할을 못하게 된다. 그러면 교회는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지탄의 대상이 되고 걱정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요즈음 이런 말이 들리는지도 모른다. “요즈음은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고 있다.” 너무나 부끄러운 말이고 충격적인 말이다.


2) 교회가 성사성(聖事性)을 잃었다.

두 번째 이유는 교회가 성사성(聖事性)을 잃었기 때문이다. 교회가 정체성을 잃게 되면 자동적으로 성사성을 잃게 된다. 교회는 하느님의 성사이다. 하느님의 가장 큰 특징이며 신비는 다름 아닌 삼위일체의 신비이다. 이 삼위일체의 신비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바로 ‘공동체’를 말하고 있다. 하느님은 외톨박이가 아니라 가족 공동체이다. 그러나 공동체이신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믿는 신자들이 ‘나 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고 교회는 그것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 자기 집에 다른 사람들이 오는 것을 싫어하고 있다. 그래서 방문을 모두 닫아 걸고 살고 있다. 동시에 마음의 문까지 닫아버렸다. 아무도 그 집에 들어갈 수가 없게 되었다. 심지어는 예수님마저도 거절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3) 교회가 심각한 병을 앓고 있다.

한마디로 교회가 심각한 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소공동체의 영성을 거부하거나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치 심각한 위암과 같은 위장병에 걸린 사람이 밥을 먹는데 그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심각한 상태가 되어버린 것과 같은 것이다. 자기 몸의 병은 생각하지도 않고 음식에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루 빨리 병든 몸을 고쳐야 한다. 필요하면 수술도 해야 한다.

이런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채택한 프로그램이 바로 소공동체이다. 그런데 많은 사목자들과 신자들이 기존의 신심행위에 발목이 잡혀 탈출을 못하고 있거나 과거의 생각이 바뀌지 않고 있다. 아직도 많은 사목자들과 신자들이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생활을 하던 이집트에 머물고 있거나, 광야의 많은 어려움 때문에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다. 절대로 이집트로 다시 돌아가서는 안 된다. 역주행은 자살행위와 같다. 아직도 많은 사목자들과 신자들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상태에 머물러 과거의 안일과 관습에 묶여 있는 안타까운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하루 빨리 이집트를 탈출해야 하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교회의 모습에서 과감한 탈출을 해야 한다.

[월간빛, 2012년 10월호, 박성대 요한(제2대리구장, 주교대리 신부)]


4,135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