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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4: 부평 살던 온순한 최양업, 한국교회 첫 신학생으로 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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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7-31 ㅣ No.1565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 (4) 부평


부평 살던 온순한 최양업, 한국교회 첫 신학생으로 선발

 

 

- 인천 경서동 진펄마을에 있는 녹청자 가마터. 최양업 가족이 살던 부평 접푸리라는 주장이 있으나 교회사학계에선 크게 비중을 두지 않고 있다.

 

 

최경환(프란치스코, 1805~1839) 성인의 둘째 아들이며, 가경자 최양업 신부의 바로 아랫동생인 최의정(야고보)은 「기해ㆍ병오 순교자 시복 재판록」 증언(101회차)에서 서울 도성 밖 공덕리 일대에 3년여 살다가 박해를 피해 신자 300여 명이 교우촌을 이루며 사는 강원도 김성(현 김화읍)으로 이주했다고 밝혔다.

 

최양업 신부도 “집에 신자들이 너무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에 3년이 지나자 이웃 사람들한테 신자 집이라는 것이 탄로 나서 관가에 붙잡혀 갈 위기에 처해 산속으로 피신했다”고 한다(1851년 10월 15일 절골에서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1827년에서 1830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최양업 가족이 김성에서 얼마간 살았고, 언제 부평으로 이주했는지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최양업이 부평에서 조선 교회의 첫 신학생으로 선발돼 1836년 2월 6일 서울 후동(현 주교동)의 모방 신부 댁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적어도 1836년 초 이전에 그 가족이 이곳에 터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최양업 가족의 강원도살이는 무척 고달팠다. 부평에서 최양업 가족과 3년을 같이 살았던 이 베드로는 “앞집 포교가 잡으려 해 세간을 다 버리고 도주해 시골로 피하니 가산이 점점 다 없어졌다”고 했다(「기해ㆍ병오 순교자 시복 재판록」 97회차 증언에서).

 

- 인천 경서동 진펄마을 전경.

 

 

궁핍과 재난 받아들어 

 

최양업 신부는 이 시기를 “가족들은 손으로 가시덤불과 자갈밭을 개간해 연명했다. 과거에는 부자였으나 그리스도를 위해 자진해 이러한 궁핍과 재난을 받아들였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모범을 더욱 철저하게 따르는 것이라는 사실을 유일한 희망으로 삼고 만족해 하며 살았다”고 회상했다(같은 편지에서).

 

고단한 살림살이에도 아버지 최경환은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그는 한문 교육을 별로 받은 바 없지만 자주 묵상하고 신심 서적을 읽어 교리에 해박했다. 그는 이웃에게 천주교를 알리는 데 열정적이었고, 박학한 신자들이나 유식한 사람들까지 그의 강론을 들으려 모여와 설복돼 회심했다.  

 

최양업 가족이 부평으로 이주한 이유는 아마도 고향에서 서울로 이사했을 때처럼 더 나은 교리 공부와 신앙생활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20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교회 사학계에선 “최양업이 만 11세 되던 1832년경 과천 수리산 뒤뜸이에 거주하게 돼 이곳에서 1836년 초에 신학생으로 추천됐다”는 것이 정설이었다(한국교회사연구소 「교회사 연구」제14집, 24쪽, 1999년 참조). 이 자료를 기초할 때 최양업 가족이 김성에서 부평으로 이주한 때는 1832년에서 1836년 초 사이로 추정할 수 있다. 

 

조선 시대 부평도호부는 오늘날 행정구역으로 정리하면 김포시 하성면ㆍ통진읍ㆍ대곶면, 구 김포읍, 서울시 양천구ㆍ영등포구ㆍ금천구 일대이다. 이 지역엔 1810년 전후로 이미 교우촌이 있었다. “어려서 모친을 여의고 부친 및 형제들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했다”는 민극가(스테파노, 1787~1840) 성인의 증언, “모친에게 신앙을 배웠다”는 이호영(베드로, 1803~1838) 성인과 누나 이소사(아가타, 1784~1839) 성녀의 고백이 이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19세기 중반 당시 이 지역 신자 대부분은 부평과 인천에 집중돼 있었다. 그래서 최양업 가족도 신자들이 많이 사는 부평에 터한 것이다. 

 

이 베드로는 최양업 가족이 부평 ‘접푸리’(졉프리)에 살았다고 한다. 아드리앵 로네 신부는 「조선 순교 복자전」에서 “부평군 전퍼리로 이주했다”고 한다. 문제는 이 지명이 이 두 자료를 제외하고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2009년 인천교구 성지개발위원회 김진용(마티아) 부위원장은 「최양업 신부가 신학생으로 선발될 당시 부평지역에서의 거주지에 관한 연구」에서 부평 접푸리(전퍼리)를 지금의 인천 경서동 ‘진펄마을’이라고 유일하게 주장했다. 과거 부평군 석곶면에 속한 이곳은 땅이 질퍽한 갯벌 마을로 염전과 녹청자(綠靑磁) 도요지가 있었다고 한다. 

 

김 부위원장은 최양업 가족이 어패류 등 먹을거리가 풍족한 이곳에서 도요지에서 옹기를 굽고 호구책을 마련했을 것이라 주장했다. 하지만 교회사 학자들은 부평 접푸리(전퍼리)가 이곳이라고 비정(比定)하기엔 학문적 근거나 너무 빈약하다고 보고 있다.

 

여하튼, 최양업은 부평에서 조선 교회 첫 신학생으로 선발됐다. 그를 모방 신부에게 추천한 이는 정하상(바오로, 1795~1839)과 남이관(세바스티아노, 1780~1839) 성인들이다. 모방 신부가 1836년 1월 15일 한양에 도착해 그해 2월 6일 최양업을 선발했으니 아마도 양업은 여항덕(파치피코, 유방제) 신부 때 이미 신학생으로 낙점돼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부모는 조선에서 가장 훌륭한 교우”

 

모방 신부는 최양업과 자신이 선발한 신학생들과 그 부모에 관해 이렇게 평했다. “그들의 부모는 조선에서 가장 훌륭한 교우들입니다. 그리고 이 소년들은 매우 온순한 성격입니다. 저는 주님의 은총으로 신부님께서 이 소년들에게 만족하시길 바랍니다. 그들은 성심을 다해 공부에 전념할 것과 주님의 섭리가 명하는 대로 교회의 어른들께 완전히 순명할 것을 서약했습니다”(모방 신부가 르그레즈아 신부에게 보낸 1836년 12월 3일자 서한에서).

 

1838년 10월 부평에서 정 바오로가 조상의 위패를 부순 사건이 발생했다. 이 때문에 이원명 등 신자 12명이 체포됐고 50여 명의 신자가 피신했다. 최양업 가족은 아마도 이때 체포를 피해 수리산 뒤뜸이로 이주한 듯하다.

 

[평화신문, 2016년 7월 31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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