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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십자가의 손길로 오는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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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7-12 ㅣ No.1326

[평신도 연구] 십자가의 손길로 오는 희망

 

 

십자성호는 우리의 고통을 그리스도와 함께 수난하는 우리의 특권으로 인정하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 인류의 고통을 멀리 치워버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고통과 몸부림에 거룩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구원의 희망을 주셨습니다. 서로 용서하고 화해의 길을 찾을 줄 모르는 70년 분단의 어리석음이든, 인터넷 공유경제 시대에 무너져 내리는 산업사회의 독점력에 집착하는 사회갈등이든, 우리에겐 복음의 빛이 절실합니다.

 

 

그분의 힘에만 의지해야

 

우리는 앞이 환히 보이는 쉬운 삶을 사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매일 걸어가야 할 삶의 길 위에는 수많은 함정과 장애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간의 완고함이나 우리의 어리석음이 마련한 것들일 수도 있고, 하느님께서 우리의 훈육을 위해 준비하신 것들일 수도 있습니다. 삶의 길에서 시련과 노고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시련은 존엄한 가치를 지닙니다. 우리의 시련은 십자가이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수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인류의 역사와 인간 사회 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압도적인 시련과 고통의 연대기가 들어있습니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닥친 실망과 재난의 기나긴 기록입니다. 신약성경은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하고 계신 보이는 하느님을 인간이 배척하고 배반하고 십자가에 못 박고 도망가는 우리의 비참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드라마입니다. 기록과 드라마를 희망의 메시지로 바꾸는 진짜 스토리가 거기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언제나 쉼 없이 하느님의 구속 사업이 계속됩니다. 성경 이야기처럼 우리 하나하나의 삶 안에서 사랑스러운 아버지가 되고 자애로운 어머니가 되어 사람들을 훈육하고 계십니다. 일이 꼬이고 응어리가 뭉쳐지는 것은 인간의 완악함이나 이기적인 고집 때문이지만 그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만나게 되는 분은 언제나 우리를 감싸 안으시고 매듭을 풀어 안전한 곳으로 다시 이끌어주시는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나약한 겁쟁이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자유의지로 선택하고 결과를 감당하도록 하셨습니다. 실패를 통해 학습하고 배운 것을 가지고 불가능을 알아내도록 하셨습니다. 자연을 경탄하고 하느님을 경외하고 창조를 훼손하지 않도록 조심성을 심어주셨습니다. 내가 겪어본 고통 속에서 허덕이는 이웃을 보면 연민의 정을 일으켜 도움의 손길을 나누도록 만드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좋은 것들은 하느님의 선하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우리의 신음소리를 듣고 계시며 뼈가 부딪히는 가난을 알고 계십니다. 잠근 열쇠를 들고 불안해하는 탐욕을 보고 계시며 모두가 적으로 보이는 불안을 모른 체하지 않으십니다. 쭉정이는 타작마당에서 거두어 불구덩이에 넣으실 것이며 알곡만 저울에 달아 곳간에 보관할 것입니다. ‘주님, 주님!’ 울부짖는 소리가 귀에 따가워도 가난하고 불쌍하고 외롭고 잠자리 없는 네 형제에게 해준 게 무엇이냐고 낮은 목소리로 물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세상을 바꾸고 자연을 가꾸고 풍요를 함께 누릴 힘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닥친 시련을 대면하고 왼쪽으로도 오른쪽으로도 굽지 않고 바르고 가볍게 똑바로 걸어나갈 힘을 주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힘에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알게 하시는 하느님의 영에 의지하는 힘이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힘을 주시는 그분의 힘에만 의지해야 합니다.

 

 

모든 것의 시작을 십자성호로

 

존 헨리 뉴먼 추기경은 모든 것의 시작을 십자성호에 두었습니다. “죄 많은 나의 육신을 가로질러 십자성호를 그을 때마다 모든 좋은 생각들이 내 안에서 일어나, 잠자고 있던 신성한 힘을 새롭게 하여 고통을 견디고 행동을 할 수 있는 높고 참된 용기가 마침내 솟아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 삶의 작고 하찮고 반복되는 일상의 불편까지 거룩하게 만듭니다.

 

토리노의 성 막시모는 모든 고통의 마감을 위해 십자성호를 그었습니다. “우리는 십자성호를 그음으로써 우리의 모든 상처들이 치유되리라 기대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평신도에서부터 사제와 주교, 교황에 이르기까지 견디어내는데 필요한 힘을 얻기 위하여 교회로 가서 성사에 참여합니다. 우리 육신의 아버지께 했던 것처럼 하느님께도 불평합니다. 그리고 시작과 마침의 십자성호로 언제나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믿음을 간직합니다.

 

성 요한 비안네 사제는 두 개의 십자성호 사이에 하느님께서 언제나 현존하고 계심을 가르쳐 주십니다. “거룩한 성찬의 전례가 없다면 이 세상에는 행복이 없고 삶은 견딜 수 없게 될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하느님의 길과 세상의 길이 갈라섭니다. 교회는 우리가 고통을 겪어야만 하고 그럴 힘이 우리에게 있다고 약속해 주고 가르치고 보여줍니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가 더 이상 고통을 견딜 필요가 없게 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탈출의 수단이 무엇이 되었든 다 제공하려 합니다. 술, 섹스, 마약, 도박, 사치, 이런 것들로 고통으로부터 도망치게 만듭니다.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는 우리의 정신이 번뜩 들게 묻습니다. “생명이신 그분 자신이 내려와 죽음을 당하셨다. 빵이신 그분이 내려와 배고픔을 겪으셨다. 길이신 그분이 내려와 여행의 고달픔을 견디셨다. 샘이신 그분이 내려와 목마름을 경험하셨다. 그런데 네가 노동과 고통을 거부하겠단 말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죄 많은 인류의 대리자가 아닙니다. 우리 대신 고통을 겪으신 게 아니라 우리의 대표로서 고통을 겪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수난은 우리에게 고통을 면제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겪는 고통에 하느님의 힘과 구원적 가치를 부여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길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3-5) 바오로 사도는 언제나 영광을 바라보려 노력했지만 자신이 육신 안에서 사는 동안에는 많은 고통을 겪으리라는 것과 자신이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고통에 대한 핵심적인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증언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로마 8,17-18)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용기를 갖도록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유일한 탈출경로를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서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에게 닥친 시련은 인간으로서 이겨내지 못할 시련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성실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에게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마련해 주십니다.”(1코린 10,12-13) 우리 스스로의 힘만으로 고통을 견디면 끝이 보이지 않는 구부러진 길이 됩니다. 주님께서 마련하신 길은 시련에서 곧바로 벗어나는 고통을 피하지 않는 똑바로 난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반복되지 않는 고통이며 멈춰 서지 않는 시련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힘주어 말합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그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1코린10,16) 우리가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실 때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우리의 몸과 피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가 견디셨던 대로 시련을 견디어 낼 수 있는 힘을 갖게 됩니다. 고통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이며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이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고자 그분과 함께하는 고난을 피하지 않는 것입니다.

 

 

북녘 형제의 고통에 동참하면

 

통일의 길은 머지않습니다. 북녘 형제들의 고통에 우리가 동참하면 말입니다. 1839년 성 정의배 마르코는 우연한 기회에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가 순교하는 모습을 새남터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이역만리 낯선 땅에 와서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리를 전하며 모욕과 멸시와 학대를 달게 받고 있으니 그들은 무엇을 믿으며, 무엇을 바라고, 누구를 사랑하는 것인가? 그래서 그는 천주교 서적을 구해 읽기 시작하여 천주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같은 새남터에서 1866년 3월 11일 72회 생일에 그가 군문효수형을 받을 때 그의 곁에는 북녘 황해도 출신 22세의 성 우세영 알렉시오도 함께 칼을 받으려고 서 있었습니다.

 

[평신도, 2016년 여름(계간 52호), 정진호 프란치스코(한국평협 사회사도직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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