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 (목)
(백)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너희 기쁨이 충만하도록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소공동체ㅣ구역반

왜 소공동체인가? - 소공동체가 안 된다? (2)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11-17 ㅣ No.125

[특별기고] 왜 소공동체인가? - 소공동체가 안 된다? (2)


“너는 이 웅장한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마르 13,1)


2. “교회가 침몰하고 있다!”

“교회가 침몰하고 있다!” 이 말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한 요한 23세가 왜 공의회를 소집했는가를 묻는 많은 주교들의 물음에 대답한 말이다. 이 말은 “교회가 쇠퇴하고 있다.” “교회가 망하고 있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과연 이 말이 사실인가를 의심할 정도로 너무나 충격적인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고 지금도 떠나고 있다. 한마디로 교회의 위기, 신앙의 위기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한 이유는 바로 죽어가는 교회를 살리기 위함이다. “왜 소공동체인가?”를 묻는 질문은 “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최되었는가?”를 묻는 질문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소공동체를 하는 이유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배우고 살자는 말이며 그것은 곧 ‘복음을 살자’는 것이며 또한 그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계기로 새롭게 등장한 ‘복음화’ 내지 ‘새로운 복음화’를 이루기 위함이다.

소공동체 교육을 청하는 어느 주임신부님께 “왜 이렇게 어려운 소공동체를 하려고 합니까? 틀림없이 기존 신심단체들, 특히 레지오 마리애의 반발과 저항때문에 어려울 텐데”라고 하였더니 “본당을 살리기 위함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죽어가는 교회를 살리기 위함이었듯이 소공동체도 바로 생기를 잃어가고 역동성이 떨어져 미래와 비전이 보이지 않고 죽어가는 교회를 살릴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이며 미래 교회의 대안이다. 소공동체의 목적은 소공동체 그 자체에 있지 않고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복음화하고 교회를 복음화하여 세상을 복음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교회에 무슨 문제가 있고 무슨 이유로 교회에 생기가 없고 교회가 역동성을 잃어가고 교회에 미래와 비전이 보이지 않아 결국에는 많은 사람들이, 특히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거나 교회를 외면하고 교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었는가?

작고하신 김수환 추기경께서 하신 말씀을 소개하고자 한다. “쇄신은 실로 공의회의 제1차적, 또 그 가장 간절한 소망이었다. 공의회의 모든 토의와 분위기, 여기서 나온 모든 교령은 ‘쇄신’이라는 ‘라이트 모티브’에 의해 낙인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럼 공의회는 왜 이렇듯이 교회 쇄신의 필요성을 절감했는가? 또한 교회는 어떠한 상태에 놓여 있었기에 이같이 쇄신을 강조하게 되었는가?”(사목 339호, 2007년 4월호 249쪽)


1)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교회상

김수환 추기경께서 지적하신 쇄신되어야 할 과거 교회, 즉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교회, 즉 트리엔트 시대의 교회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를 아래와 같이 지적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를 위해서나 세계를 위해서나 분명히 하나의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공의회를 기점으로 하나의 새 세대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또한 이를 종점으로 교회사상 한 특징적인 세대가 그 막을 내렸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트리엔트 시대의 종식이다. 환언하면 16세기의 종교 개혁 이래 오늘날에 이르는 400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세월에 걸쳐 교회 생활과 양상을 결정적으로 지배한 트리엔트 공의회 시대가 종결된 것이다.”(사목 339호 249쪽) 그렇다면 종결되고 쇄신되어야 할 트리엔트 시대의 교회는 과연 어떤 교회였던가?

① 성직자 중심의 교회

16세기의 교회는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혼란과 교회 분열이라는 크나큰 위기를 맞이하였다. 그런 나머지 교회는 엄률과 엄단의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고 다음과 같은 폐단을 낳게 되었다.

트리엔트 시대의 교회는 위계제도(Structura hierarchica)를 주장하고, 동시에 교회가 완전한 사회(?)라는 자기도취와 착각 속에 교회의 가견적 사회성을 강조함으로써 가톨릭 교회관이 오랫동안 ‘위계제도 중심의 교회’, ‘제도 중심의 교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교회의 가견적 사회성을 지나치게 주장함으로써 교회의 신비(Mysterium)를 가려 버리는 역효과를 초래하였다. 동시에 교회를 군주정체와 다름없는 봉건적 신분 사회로 전락시켜 버리는 엄청난 과오를 저질렀으며 아직도 그 꿈과 도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슬픈 현실을 보고 있다. 그 결과로 성직자들은 군주사회의 군주(?)가 되어 버렸고 평신도 사이에 격심한 신분적 차별이 생기면서 평신도가 교회에 속하기는 하되, 그들의 위치는 미성년의 그것과 같이 종속적인 것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아직도 교회 복음화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성직자 중심의 교회’가 되고 만 것이다. 그 결과로 평신도들은 아직도 자기들의 위치와 책임을 각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주된 원인은 가톨릭 교회관이 트리엔트 시대를 거쳐 이같이 오랫동안 ‘위계 제도 중심의 교회’, ‘제도 중심의 교회’로 변질된 데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결과적으로 교회는 복음과 멀어진 교회로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필연적으로 교회의 정체성을 상실하는 교회가 되면서 교회가 생기를 잃고 역동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군주와 기사들이 입고 있는 갑옷 속에 갇혀 유연성을 잃고 경직된 모습이 된 것이다.

② 성경을 빼앗아 간 교회

한 마디로 지금 교회에는 “말씀이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말씀’과 멀어졌다. 역사적으로 교회가 신자들에게서 성경을 빼앗아 버렸기 때문이다. 이유를 불문하고 교회가 성경을 신자들의 손에서 빼앗아 간 것은 너무나 큰 실수이며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지금 교회가 정체성을 잃고 역동성과 생기를 잃은 가장 큰 원인은 신자들과 교회가 복음에서 멀어진, 복음에서 이탈하였기 때문이다. 교회를 살리고 교회를 쇄신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인 ‘복음화’는 우리 신자들로 하여금 복음을 사는 것이고 교회가 복음 중심의 교회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복음화’란 잃어버린 성경을 다시 찾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가장 시급하고 절실한 문제이다. 아직도 많은 신자들이 미사 전에 그날의 복음과 말씀을 묵상하기보다는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미사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아직도 그들은 트리엔트 시대의 신앙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확실한 하나의 증거가 아닐 수 없다.

③ 경직된 전례

김수환 추기경은 또 다시 지적하였다. “가톨릭에서는 라틴어가 가톨릭의 ‘심벌’이라고 간주될 만큼 그 위치가 절대적으로 강화된 것을 비롯해서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전례가 제도화, 율법화, 형식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전례의 획일적인 일원화를 가져왔으며 또 전례의 생활화를 저해하였고 이로 인하여 신자들은 전례에 의식적이요 적극적인 참여가 불가능했다. 전례상의 기도도, 복음 선포도 그들에게는 우이독경(牛耳讀經)이나 다름없었고 그리하여 전례는 성직자들의 전유물화(專有物化)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성직자와 평신도의 계급적 차별과 유리는 어디서보다 전례에 있어 현저했다 아니할 수 없다. 또한 ‘교회의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모든 힘의 원천’(전례헌장, 10항)인 전례가 생활화되지 못하는 곳에서 신앙의 생활화나 열렬한 사도직 활동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런 상황 아래서는 참된 의미의 영적 공동체로서의 교회 건설과 성장은 기대하기가 힘들 것이다.”(사목 339호 254쪽)

[월간빛, 2012년 11월호, 박성대 요한(제2대리구장, 주교대리 신부)]


2,886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