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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복자 124위 열전48: 신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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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2-08 ㅣ No.1431

[복자 124위 열전] (48) 신태보


신앙 지키다 12년 옥살이 끝에 순교, 박해 실상 전하는 옥중일기 남겨



거듭되는 박해로 조선 교회의 기반이 붕괴 직전이었다. 양반, 중인, 평민, 천민도 다 잡혀가고 유배를 당하고 옥사하고 참수됐다.

교회가 제대로 유지될 리 없다. 신해박해(1791년)에서 신유박해(1801년)을 거치는 동안 조선 교회는 크게 변모했다. 교회 지도층 또한 양반 신자들이 대거 이탈하면서 일부 양반층과 평민층 신자들이 교회의 주축을 이루게 됐다.

- 복자 신태보 베드로.


당연히 교회 재건에 신자들의 ‘기도’가 모였다. 목표는 성직자 영입이었다. 1811년 이여진(요한, ?∼1833)이 베이징교구로 떠나게 될 밀사를 자원하자 조선 교회는 당시 교황 비오 7세와 베이징교구장에게 보내는 두 통의 서한을 작성, 이여진을 통해 베이징에 보낸다. 이 편지가 그 유명한 ‘신미년 서한’으로, 조선 신자들이 직접 교황에게 목자 파견을 간청한 첫 서한이었다.

신미년 서한은 이듬해인 1812년 베이징교구에 접수됐고, 구베아 주교 사후에도 계속되는 박해로 베이징에 오지 못한 채 마카오에 머무르던 베이징교구장 수자 사라이바 주교를 통해 교황청에 발송된다. 이 서한은 훗날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을 거쳐 교황의 손에까지 전달됐고, 1831년 9월 9일 조선대목구가 설정되는 데 작은 씨앗이 된다.

정해박해(1827년) 때 체포돼 기해박해(1839년) 때 순교한 신태보(베드로, ?∼1839) 복자는 당시 조선 교회 재건의 주역이었다. 밀사 이여진의 사촌으로, 조선 신자들의 성직자 영입 운동에 뛰어들어 권기인과 홍우송, 조동섬, 한 토마스 등과 함께 신미년 서한을 작성했고, 이여진을 베이징에 보내는 경비를 마련하는데도 갖은 노력을 다했다. 신미년 서한으로 당장 성직자 영입이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신태보를 비롯한 조선 신자들은 이후에도 성직자 영입 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물론 그가 처음부터 신앙에 열심이었던 것은 아니다. 경기도 용인 근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이천시 동산밑(현 경기도 이천시 호법면 동산로 일대)에서 살았다. 1790년대 초 천주교를 접한 듯하지만, 신심이 그리 깊지는 않았고, 1794년 말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입국하자 이여진과 함께 주 신부를 만나러 서울에 왕래했지만 만나지는 못했다. 그저 마음속으로만 신앙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 그는 신유박해가 끝난 뒤 용인에 살던 가족들을 이끌고 강원도 산골로 이주, 40여 명의 신자와 함께 신앙 공동체를 이뤘다. 당시 그는 신심 서적을 100권이나 필사해 주며 교회 재건에 열심을 보였다고 한다. 아울러 여러 지역을 두루 다니며 영혼을 구하는 힘쓰고, 전교에 열중했다.

그는 특히 전라도 일대에 불어닥친 정해박해가 경상과 충청, 서울까지 번지는 실마리를 제공했다. 당시 교회의 주요 인물로 활동했던 그는 교회 서적을 많이 필사해 유포시켰기에 당연히 관의 주목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었다.

1827년 4월 정해박해가 일어나면서 상주 잣골(현 경북 상주시 함창읍 신흥리 일대)에서 체포된 그는 전주로 압송돼 혹독한 심문과 고문을 당해야 했다. 다블뤼 주교의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에는 당시의 그의 심문 과정에 관한 참상이 소상히 기록돼 있다.

“다리 살이 헤져 뼈가 드러났으며, 앉지도, 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 상처는 곪아서 참을 수 없는 악취를 풍겼다. 방은 벌레와 이투성이여서 아무도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 몇몇 교우만이 그를 부축해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동료들을 밀고하지 않고 굳게 신앙을 지켰다.

물론 흔들릴 때도 없지 않았지만, 용맹정진하며 이를 극복해 나갔다. 전주옥에서 12년을 더 산 그는 기해박해가 일어나고 그해 5월 29일 전주장터(숲정이)에 끌려가 동료들과 함께 순교의 화관을 썼다. 「승정원 일기」에 따르면, 그의 나이 70세가량이었다. 그 뒤로 1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1988년 그의 5대손인 신인균 신부가 경기도 포천의 서울대교구 금호동본당 묘역에 그의 가묘를 조성해 신태보의 삶과 행적, 영웅적 덕행을 기렸다.

그가 순교 한 해 전인 1838년 샤스탕 신부의 요청에 따라 쓴 옥중일기는 박해 시대의 실상을 보여주고 있어 주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수기의 원문은 현재 전해지지 않지만, 샤를르 달레 신부의 「한국 천주교회사」에 그 일부가 수록돼 있다.

[평화신문, 2015년 2월 8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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