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강론자료

사순 6 주일-나해-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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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0-04-16 ㅣ No.199

수난 성지주일 (나해)

        (입성기념 복음) 마르코 11,1-10

        (수난성지주일 나해) 이사 50,4-7    필립 2,6-11    마르코 14,1-15,47

    2000. 4. 16.

 

주제 : 삶의 고통을 통한 승리를 위하여

 

우리는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을 비슷하고 또 비슷한 것으로 바라보기 쉽습니다. 특히 다른 사람의 생활을 바라볼 때 내가 기대하는 바가 채워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말할 수 있고, 자신이 생각하는 꿈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도 삶을 그렇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어제와 다르고, 내일은 또 오늘과 완전히 다르고 새로운 느낌이고 기분이기를 바라지만 어쩔 수 없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1년, 12달을 이와 같은 심정으로 지낸다면, 우리의 삶은 참으로 무미 건조하다고 느낄 것입니다. 혹시라도 우리가 그러한 타성에 젖어들까 봐서, 하느님께서는 만물이 생동하는 봄이라는 계절의 초입에 보통의 생활에서는 체험할 수 없고 생각하기도 힘든 부활이라는 선물을 마련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은 인류에게 다가오는 커다란 선물, '구원(救援)'을 주시기 위해서 인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안간힘을 다 쏟으신 성주간의 첫날입니다.  이 성주간의 첫날에 우리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예루살렘 입성에서부터 최후만찬과 더불어 이루어진 제자의 배반예고, 게쎄마니 동산의 처절한 기도에서부터 한밤중에 범법자로 체포되는 일, 속전속결의 죽음을 향한 재판에서부터 십자가형벌과 그 위에서 이루어진 운명에 이르는 <수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역사 속의 까마득한 기억, 진정한 성군, 하느님의 뜻을 이룰 통치자로 임금으로 등장하던 사람들에게 바쳐지던 존경과 사랑을 받는 행동이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구원자, 호산나로 등장하는 볼품없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에게 주어진 영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습니다. 로마인들에게서 유다인들의 대표자로 인정받던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 산헤드린 의회의 사람들은 전혀 다른 계획을 아무도 몰래, 그것도 제자중의 하나를 통해서 진행시키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면, 사람의 마음은 다 아는 듯하다가도 참으로 모를 일입니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고 자신의 명예에 보탬이 되는 일이라면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덤비다가도, 조금이라도 수틀리면 같은 하늘아래에서 함께 숨쉬며 살 수 없는 적대적인 관계로 만들고 마는 것이 인간의 마음인가 봅니다.

 

하느님으로서, 하느님의 아들로써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주시기 위하여 인간으로서 겪어야 하는 삶의 조건을 수락하셨던 예수님은 사람들의 이러한 마음의 변화를 다 꿰고 계셨을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 이번 한 주간, 성주간을 지내는 슬픔이 있는 것이고, 신앙인들의 안타까움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해마다 사순절을 지내고 해마다 부활절을 맞이하면서 올해는 지난해와는 좀 더 다른 마음이기를 바라고 삽니다.  그러나 그 마음도 사람으로서는 피하고 싶은 고통이라는 문제에 닥치면 행동양식이 달라집니다.

 

고통은 사람을 성장하게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도 고통을 올바른 의미로 받아들인 사람에게 적용되는 이야기입니다. 당연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39;고통이란 그저 피하는 게 상책&#39;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우리 사회에는 고통을 통한 참된 승리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찾아보기 어려운 것입니다. 삶의 의미에 대해서 자신있게 대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 고통은 모든 것의 걸림돌일 뿐이고 그 안에서 긍정적이거나 건설적인 효과는 기대하지 못하는 부담스러운 것으로 머무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일에는 앞면과 뒷면이 있습니다. 동전에도, 사람의 얼굴에도, 이익을 추구하는 회사의 모습에도, 민주주의 표방하는 국가의 얼굴에도 서로 가까이 할 수 없는 앞면과 뒷면은 존재합니다.  가까이 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 앞면과 뒷면을 어떻게 조화시켜 가느냐에 따라 우리가 인생에서 성공하거나 만족한 결과를 빚어내느냐, 이 사람 저 사람에게서 싫은 소리를 들어가며 함께 머물기 거북한 사람으로 남을 것인가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런 단순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것의 실현이 문제일 뿐입니다.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주러, 하느님이 인간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던 사람들은 그 사실 자체가 부담스러웠기에 인간 예수를 이 세상에서 없애버리려고, 규정에도 없던 한밤중 체포와 일사천리의 재판을 진행시킨 것입니다.  사람이 왜곡된 마음을 가지면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왜곡된 심성을 우리는 누구나 갖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상대적인 위치에 있는 행복은 누리고 싶어합니다. 바로 그곳에 인간에게 드러나는 모든 슬픔의 뿌리가 박혀 있는 것입니다. 이 부조화를 깨는 방법을 오늘 우리는 성지주일,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보는 것입니다.

 

자신이 죽을 것을 수없이 예고했고 짐작했으면서도 사지(死地), 예루살렘을 향해서 걸어가는 의연함, 화려한 장식을 한 것도 아닌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구원자로서의 초라함, 자신을 배반할 제자를 눈앞에 뻔히 보면서도 하느님이 계획하신 뜻이 먼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어리석음, 고통중에 제자들이 함께 기도해주기를 원했으나 그것도 얻지 못하는 안타까움, 그리고 결국에 자신을 미워하고 질시하는 사람들에게 십자가 재판을 통하여 목숨을 내주는 기꺼운 선택에 이르기까지, 삶의 부조화(不調和)를 깨는 방법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행동이 세상에서 부조화를 없애는 방법이라고 수긍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판단에 맞지 않으니 그저 피하려고만 합니다.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39;예수님이 보여주신 행동&#39;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면 세상에서 부조화는 사라지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서에 나오는 하느님의 종은 슬프고도 안타까운 길을 갈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슬프고도 안타까운 길이 인류에게 구원이라는 선물을 주기 위한 하느님의 계획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종은 지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종은 사람들에게서 욕설과 침 뱉음을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돌려 피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기꺼운 마음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정신으로 예수님은 겸손의 모범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 겸손의 모범으로 바울로 사도는 두 번째 독서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 바쳐지던 찬가를 우리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의 모습과 자세를 통하여 하느님의 축복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바뀔 수 있도록 오늘 성주간의 첫날에 같은 마음으로 임해야 할 것입니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  "주님이시여 우리가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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