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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8: 제1~3차 귀국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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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9-04 ㅣ No.1572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 (8) 제1~3차 귀국 여행


유학 6년 만에 귀국길에 오르지만 실패를 거듭하는데…

 

 

최양업 신부는 1849년 12월 말 조선으로 귀국했다. 마카오로 유학을 떠난 지 13년 만이다. 최 신부는 조선 입국을 위해 1842년 7월부터 총 6차례 귀국 여행길에 오른다.

 

 

 제1차 귀국 여행 

 

최양업은 1842년 7월 17일 마카오에서 프랑스 함선 파보리트호에 승선해 귀국 길에 올랐다. 제1차 귀국 여행이다. 최양업은 파쥬 대위 지휘로 조선에 가서 프랑스와의 통상 조약을 요청하기 위해 떠나는 이 배에 통역사로 승선했다. 이 여행에 만주대목구 선교사 브뤼니에르 신부와 쟝시니 프랑스 외교사절이 함께했다. 만약 프랑스 함선이 조선으로 가지 못할 경우 쟝시니 외교사절이 북경으로 가서 조선의 남쪽 해안까지 둘러보고 올 계획이었다.

 

귀국 길에 오르는 날을 고대하면서 최양업은 마카오에서 그 설렘을 스승에게 다음과 같이 털어놓았다. “하루하루 그 군함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의 동포들이 마침내 시온성으로 회두하여 우리의 창조주이시요 구세주이신 하느님을 찬송할 날이 언제쯤 올 것인가요”(1842년 4월 26일 마카오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쓴 편지에서).

 

7월 17일 마카오를 떠난 코르벳함 파보리트호는 8월 23일 상해 인근 오송(吳淞)에 닻을 내렸다. 오송에 올 때 하구 모래 위에 좌초돼 닻 4개를 분실하고 죽을 뻔한 위기를 넘겼다. 

 

하지만 최양업의 제1차 귀국 여행은 곧 실패로 끝나고 만다. 영국과 청나라가 아편전쟁을 끝내고 남경조약을 체결하면서 동아시아의 정세가 급변하자 프랑스 함대가 조선 원정을 포기하고 변화 추이를 지켜보기 위해 상해에 머물기로 했기 때문이다. 

 

파보리트호에서 하선한 최양업 일행은 김대건과 메스트르 신부와 합류한 후 강남대목구장 베시 주교의 도움으로 1842년 10월 12일 중국 배를 타고 상해에서 출발해 23일 요동 태장하(太長河)에 도착했다. 

 

김대건과 메스트르 신부는 거지로 변장하고 조선 입국로 개척을 위해 압록강 변문쪽으로 갔고, 최양업은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가 머물고 있는 소팔가자(小八家子, 현 길림성 장춘시 합륭진 소팔가자촌)로 떠나 11월 그곳에 도착했다.

 

 

제2차 귀국 여행

 

최양업은 소팔가자에 머물면서 신학 공부를 계속했다. “그는 대단히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가 한 살만 더 많았다면 아마 그를 올해에 사제품을 하는 일이 옳을 것입니다”(페레올 주교가 1843년 2월 20일 소팔가자에서 그르레즈와 신부에게 쓴 편지에서).

 

1843년 3월 김대건이 변문에서 조선 밀사 김 프란치스코를 만난 후 소팔가자로 왔다. 김대건은 1839년 기해박해로 앵베르 주교와 모방·샤스탕 신부뿐 아니라 최양업의 부모인 최경환(프란치스코)과 이성례(마리아) 등 많은 신자가 순교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 소식을 들은 최양업은 “언젠가 좋으신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저의 동포들을 만날 행운이 저에게 다가오기를 하루하루 바라면서 머물러 있습니다.…저의 부모와 형제들을 따라갈 공훈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저의 신세가 참으로 딱합니다. 그리스도 용사들의 그처럼 장렬한 전쟁에 저는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말입니다. 정말 저는 부끄럽습니다”(1844년 5월 19일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라고 한탄했다.

 

최양업과 김대건은 1844년 12월 10일께 페레올 주교에게 부제품을 받았다. 페레올 주교와 김 부제는 조선 입국을 위해 변문으로 떠났고, 최양업 부제는 교구장의 지시로 메스트르 신부와 소팔가자에서 1846년 1월 말 제2차 귀국 여행을 떠날 때까지 머무른다.

 

“페레올 주교가 (최양업) 토마스에게 반감을 품었습니다. 이것은 주교와 얼마 동안 같이 지내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아주 쉽게 일어나는 일입니다.…저는 벌써 이 문제에 대해 그에게 몇 번 지적하였습니다. 그가 이것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랍니다.…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진정될 것입니다”(메스트르 신부가 1845년 5월 25일 소팔가자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최양업 부제와 메스트르 신부는 페레올 주교의 지시로 1846년 1월 소팔가자에서 훈춘으로 떠났다. 두만강 국경에 접한 조선 마을 경원(慶源)에서 밀사와 만나 조선으로 입국하기 위해서였다. 제2차 귀국 여행이다.

 

최양업과 메스트르 신부는 17일 동안 산과 골짜기를 지나 두만강 얼음을 타고 만주의 황야를 걸은 후 훈춘에 도착했다. 설맞이를 위해 열흘간 두 나라 사이의 교역을 위해 경원에서 장이 열리는 데, 둘은 이 개시(開市)의 혼잡함을 이용해 입국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장이 열리기 전날 많은 포졸을 거느린 만주 장교 4명에게 체포된 후 3일 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가 석방돼 소팔가자로 되돌아갔다. 제2차 귀국 여행도 이렇게 실패로 돌아갔다.

 

- 페레올 주교가 조선 입국을 위해 머물던 소팔가자는 최양업, 김대건 신부가 부제품을 받고 조선 입국로 개척의 중심 거점 역할을 한 교우촌이다.

 

 

제3차 귀국 여행

 

소팔가자로 돌아온 최양업은 신학생들을 지도하던 중 1846년 12월 말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압록강 귀국로 탐사차 여행길에 오른다. 변문(邊門)을 통한 귀국을 시도하기 위해서였다. 

 

“지금까지도 저는 우리 포교지 밖에서 떠돌고 있으니 저도 매우 답답하고, 신부님의 마음도 괴로우실 것입니다. 저는 이제야 겨우 저의 동포들한테로 가는 도중입니다. 인자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저로 하여금 저의 신부님들과 형제들을 반가이 만나 포옹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기를 빕니다”(1846년 12월 22일 심양에서 르그르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라고 여행 도중 스승에게 편지를 보냈다. 

 

최 부제는 이번 3차 여행이 꼭 성공할 수 있기를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이제 발걸음은 가볍게 뛰어 달리고 있으나, 얼굴은 무겁게 푹 수그러지고 있습니다. 죄악의 막중한 무게에 짓눌리고 극도의 빈곤과 허약으로 시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풍요한 자비심에 희망을 갖고, 하느님 아버지의 섭리에 저를 온전히 맡깁니다.… 매일 두렵고 겁이 납니다만, 하느님께 바라는 희망으로 굳세어져서 방황하지 않으렵니다. 바라건대 지극히 강력하신 저 십자가의 능력이 저에게 힘을 응결시켜 주시어, 제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게 하시기를 빕니다”(1846년 12월 22일 심양에서 르그르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압록강 변문에 도착한 최양업과 메스트르 신부는 1846년 기해박해로 국경 감시가 너무 엄중해 또다시 귀국에 실패하고 만다.

 

[평화신문, 2016년 8월 21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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