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9일 (일)
(홍) 성령 강림 대축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강론자료

2015-1101.....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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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5-10-31 ㅣ No.1899

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 (1101)

묵시 7,2-4.9-14 1        요한 3,1-3       마태 5,1-12

2015. 11. 1. (주일) 이태원.

주제 : 성인들의 도움을 입음

저와 여러분이 믿음의 중심으로 두고 사는 우리 신앙에는 아주 멋있는 이론(理論)이 있습니다. 제가 굳이 신앙에 대한 말을 시작하면서 이론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감각을 중심으로 하는 세상에서는 그 존재를 확인할 방법도 없고 남에게 증명할 수도 없지만, 참된 신앙인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큰 영향을 주는 요소가 우리 신앙에는 있다는 뜻입니다. 제가 거창하게 이론이라고 말한 내용은 성인들이 통공(通功)’입니다.

 

여러분은 통공이라는 표현을 어디에서 들으십니까? 이런 질문에 혹시라도 뚜렷하게 대답을 하지 못한다거나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제가 여러분에게 시비를 걸 생각은 없습니다만, 세상의 언어로는 잘 사용하지 않는 신앙의 몇몇 가지 내용들은 우리가 잘 기억해야 그 모습대로 내 삶을 바꾸어갈 수 있다는 말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이들에게 본보기를 보이면서, 좋은 길로 이끈다는 것은 남들에게 뭔가 설명할 수 있는 지식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말씀드리는 지식이라는 표현을, 세상이 알아주는 박사나 석사, 혹은 교수나 뛰어나고 독보적인 연구자라는 표현으로만 알아듣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에서 인정하는 명함이 없거나 그것을 내놓지는 못한다고 해도, 내가 믿고 따르는 신앙을 다른 이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심각한 문제입니다. 나는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말하거나 우길 수는 있어도, 다른 사람을 내가 아는 길로 이끌지도 못하고 그 길에 대해서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통공이라는 표현은 참으로 아름답고도 멋있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사용하는 표현은 아닙니다. 교회에서 사용하는 통공의 의미는 우리말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는 뜻과 다릅니다. 우리는 이 통공이라는 표현이 들어있는 기도를 주일이나 대축일의 신앙고백시간에 반복합니다. 내 의지를 담았거나 담지 않았거나 내가 일정한 표현을 사용한다면, 그렇게 사용하는 말의 의미는 알아야 하고, 다른 이에게도 설명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제가 하는 말에 그럴 수 없다고 말해도 제가 뭐라고 할 말은 없습니다. 그렇게 드러내는 의지로 자신의 삶을 바꿀 기회를 스스로 차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모든 성인의 날 미사를 봉헌하는 날, 우리가 사용하는 통공의 뜻은 세상에서 나보다 먼저 살았고, 지금은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축복에 참여한 영혼들의 도움을 우리가 입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표현을 좀 더 설명하면 <교회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공로(功勞)를 서로 나누고 공유한다는 뜻이고, 지상의 순례자로 있는 사람들과 죄의 용서와 정화(淨化)가 필요한 죽은 이들, 그리고 하늘에 있는 복된 이들이 모두 그리스도예수님 안에서 결합되어 오직 하나의 교회를 이루면서 자신의 선행과 공로를 서로 나누고, 기도 안에서 영적인 도움을 주고받음>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말이 더 어려워졌나요?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진복팔단에 대해 들었습니다. 진복팔단은 요즘 말로는 행복한 사람들이란 어떤 사람이냐에 대해 예수님께서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 신앙에서는 이 내용을 참된 복이라고 말합니다만, 세상의 기준으로 판단하면 행복(幸福)’이라고 말할 수 없는 내용도 포함합니다.

 

그 안에 담은 뜻에 차이는 당연히 있겠지만,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당하는 사람이 포함된 이들이 행복한 사람의 무리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우리들은 고개를 가로젓기가 십상팔구(=열에 여덟이나 아홉 정도로 거의 예외가 없음)이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차이를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그것을 우리의 생활로는 어떻게 드러내겠습니까? 그래서 아직 신앙을 모르는 사람들이나 신앙에 소홀하게 사는 사람들이 신앙을 올바로 대하도록 하겠습니까? 어려운 일입니다. 힘든 일일 것입니다.

 

오감을 중시하는 세상의 기준과 하느님나라의 기준은 다릅니다. 사도요한도 묵시록에서 큰 환난을 겪어낸 저 사람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빨아 희게 만들었다고 세상의 관점과는 다른 표현을 말합니다. 이러한 표현을 올바로 알아듣고, 올바르게 행동으로 드러낼 수 있을 때, 우리는 성인들의 도움을 힘입어 통공에 참여할 수 있고, 우리의 삶으로서 다른 이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을 전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지금 내가 발을 디디고 있는 이 세상에서부터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내일 시작해도 된다거나 내년 쯤 시작해도 열심히 하면 늦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인생에서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는 하느님 외에는 누가 알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모든 성인의 날, 지금은 우리가 성인들께서 쌓으신 공덕에 힘을 얻어 하느님과 일치하여 살도록 힘쓰고, 그 언젠가는 우리가 세상에서 더 오래 살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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