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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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생명 그리고 죽음: 오늘 다시 생각하는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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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12-11 ㅣ No.291

[경향 돋보기 - 생명 그리고 죽음] 오늘 다시 생각하는 죽음

 

 

정보(력)의 확장은 우리 삶의 일부분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어서, 이전보다 훨씬 많은 부고를 접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특히 유명인들의 죽음을 개인적으로 ‘유의미한 타자’의 죽음처럼 실시간 중계로 함께하며 ‘경험’하는 것이 낯설지 않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말한다, 오늘 죽음은 없다고. 근대사회를 사는 우리에게 죽음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가?

 

 

오늘날 죽음은 ‘금기’, ‘터부’인가?

 

적잖은 사람들은 오늘날 죽음이 금기, 터부라고 한다. (금기, 터부, 억압 등은 엄밀하게는 구분되어 사용될 필요가 있는 개념들이나 여기서는 크게 의미상 차이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사용하였다.) 서로 서로 그것을 확인하고 단정 짓는 절차를 밟는다. 그런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너무 당연하게 그리 말하는 것은 어딘가 의심스럽다. 그리고 그 결과로 죽음이 억압되고 있다는 ‘말’이 여기저기 넘쳐나는 것은 무척 흥미롭다.

 

문학작품 속에서도 근대적 죽음은 자주 터부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사랑을 생각하다”에서 “죽음이 과연 테마인가? 죽음은 테마가 될 수 없지 않은가? 사랑에 대해 그토록 많은 언급이 있는 것과는 반대로 죽음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다. 죽음은 우리의 말문을 막아버린다. 물론 일찍이 … 사정이 달랐다고 … 사회의 일이자 가족의 일 … 지난 2백 년 동안 … 죽음이 말이 없어진 것이다.”라고 한다.

 

아르토 파실린나는 “기발한 자살여행”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언급한다. “여성심리학자는 기타 다른 심리적인 문제들과 비교해서 자살의 독특한 특성을 강조했다. 핀란드에서 자살은 여전히 금기였다. 아무도 자살에 대해 공공연하게 말하지 않았으며, 당사자나 가족은 불운하게도 환자로 낙인찍혔다. 바로 이 금기라는 특성 때문에 자살은 특히 가족들에게 견디기 힘든 후유증을 남겼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여기서도 이미 그들 스스로 끊임없이 죽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각종 ‘터부 담론’은 역설적이게도 그 스스로 죽음에 관한 ‘담론’의 핵이 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지나온 역사의 인류와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아직은’ 죽음을 운명으로 안고 살아가고 있으며, - 인간 ‘만’ 이 누리는 행운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으나 - 죽음에 대한 ‘선취적 인지’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는 때로 또는 자주 죽음에 대한 생각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 글쓴이는 바로 그 때문에도 ‘근대사회에서 죽음은 터부다.’라고 하는 ‘상식적 인식’은 하나의 특정한 형식과 내용을 가진 담론으로 재인식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서양 중세 때 고해성사가 비밀스러운 성을 일정한 틀에 따라 고백하게 함으로써 금지된 성에 대해 말하도록 하는 방식의 하나가 되었던 것처럼(미셀 푸코, “성의 역사” 참조), 그래서 이런 장치가 성에 대한 단순한 억압과 금지라기보다는 성담론의 생산과 조절 방식의 하나로 이해될 수 있는 것처럼 ‘죽음은 터부’라는 인식은 특정한 방식으로 죽음에 대한 생각을 생산하도록 유도하는 하나의 기제로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맥락에서 글쓴이는 죽음의 억압이라는 인식을 근대사회에서 관찰되는 죽음에 대한 하나의 특별한 소통으로 이해한다. 우리가 그것에 동의할 수 있다면 오늘날 죽음이 억압되고 있는지 여부를 지속적으로 (재)확인하고 그것을 일종의 ‘사회적 문제’로 소통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죽음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말해지고 또한 그것이 어떻게 경로화되는가, 곧 죽음이 오늘 어떤 방식으로 이해되고 소통되는가를 진지하게 추적해 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자면, 죽음의 억압을 기정사실화하고 그것을 도덕적 잣대로 섣불리 판단하는 것보다는 하나의 소통방식과 내용으로서 죽음 억압 담론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에 대해 고민해 보는 것이 더 생산적인 일이 아닐까.

 

 

그럼에도 죽음, 우리 시대의 ‘진정한’ 타자일지도

 

최근 ‘존엄사’에 대한 사회적 논의도 활발하지만, 우리는 결코 죽음에 대해 ‘침묵’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 왜 우리는 죽음이 금기, 터부라고 하는 담론을 계속해서 재생산하고 있는 것일까? 앞서 이러한 현상을 단순한 억압으로 해석하기보다는 특정한 담론의 방식으로 생각해 보자는 제안을 했는데, 이제 그에 대한 약간의 추가 주석을 달아보고자 한다.

 

글쓴이는 죽음의 ‘억압’이 근대적 죽음 담론의 중심에 서게 된 상황은 죽음의 의미 부여 가능성의 축소라는 구조적 조건에서부터 연유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먼저 ‘의미’라는 단어부터 좀 들여다보자. 이 말의 가장 핵심적 내용은 ‘관계성’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이는 굳이 현상학적 사회이론을 끌어당기지 않더라도, 일상생활의 언어에서 쉽게 확인 가능하다. “그럼, 그러니까 그 일이 의미가 있지.”, “그렇게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우리가 언제 어떻게 이런 말들을 사용하는지 생각해보면 사물이든 사람이든 그 무언가는 다른 무엇과의 관계성 안에서 ‘만’ 의미를 획득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렇다면 관계성의 상실은 곧 의미의 상실로 이어질 것이라는 것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예컨대 누군가 자식에게 삶의 의미를 걸고 있었다면, 자식을 잃는 일은 너무 당연하게 그 사람의 삶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의미의 획득’이라는 맥락에서 근대사회의 죽음은 커다란 ‘위기’에 직면해 있다. 죽음은 기본적으로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사건들 중에서 가장 강력하게 ‘이 세상 너머’와의 관계성을 요청하는 사건인데, 자기준거적 성격의 근대사회는 전적으로 내부지향적 성찰성을 지향하는 사회구조적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서 죽음은 거의 모든 전통적 관계성들과 - 그것이 신이었든지, 조상이었든지, 해와 달이었든지 간에 - 단절 · 고립되어 있다. 그것은 근대의 논리 자체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죽음은 여전히 이해되고 소통되어야만 하는 중요한 삶의 국면이다. 더구나 죽음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던 안온한 고리의 상실은 역설적으로 죽음이 설명되어야 하는 이유를 증폭시켜 왔다. 죽음은 어떻게든 말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죽음이 금기이고 터부라는 담론은 근대사회가 - 어떤 ‘외부’를 상상하지 않고 - 선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죽음 소통의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죽음 터부 담론’은 죽음의 구조적 비통합성을 소통하고자 하는 역설의 결과이다. 이 담론은 근대사회가 직면한 상황 자체를 사회적 문제로 소통하게 하는 중요한 고리 역할을 함으로써 죽음에 대한 사회적 소통의 연결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이를 통해 죽음은 비록 ‘팔다리’가 꺾인 채이지만, 사회 ‘내’에서 소통될 수 있게 된다. 존재론적인 차원에서의 죽음의 의미를 묻지 않고도, 여하한 초월성에 기대지 않고도 끊임없이 죽음에 대한 사회적 담론을 생산할 수 있는 기제가 생긴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이러한 구조적 조건을 사회적 ‘문제’로 보고 싶지는 않다. ‘사회’는 그 자신의 조건 안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일 테니 말이다. 다만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죽음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진정한’ 타자가 아니겠나 싶어지는 것이다. 끊임없이 가시화될 수밖에 없는, 그러나 자신의 ‘존재 자체’는 질문될 수 없는, 아니 그래서는 안 되는 죽음이, 그런 타자의 ‘감춰진 이름’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싶은 것이다. 터부로서 ‘만’ 사회적 소통의 장에 등장하는 죽음은 썩 괜찮은 대답을 제시하지 못하는 근대사회의 비명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누구나 ‘개별적’으로 만나게 될 죽음

 

“누구나 다 예외 없이 죽어야 한다는 보편적 종말이 나의 개별적이고도 구체적인 죽음을 위로할 수는 없다. … 모든 죽음은 끝끝내 개별적인 각자의 죽음이다. 그러나 살아있는 자들의 의식 속에서 그 죽음은 통계화된 사회현상일 뿐이다. 죽음이 그렇게 사물화될 때, 삶 또한 우연성 속에 방치된 사물로 전락한다. 사물화된 죽음은 더 이상 삶의 시간들을 긴장시키지 못하고, 삶과 죽음의 자리매김은 불가능해진다”(김훈,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 중에서).

 

위에서 언급한 사회적 조건과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언젠가 모두 ‘아주 개별적이고도 구체적으로’ 죽음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때 근대사회가 우리 손에 쥐어줄 수 있는 깃발은 과연 무엇일까? {“종교의 힘이란 궁극적으로, 사람들이 죽음 앞에 설 때, 더 정확하게 말해서 죽음을 향해서 필연적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 종교가 사람들의 손에 쥐어준 기치(旗幟)의 신뢰성에 달려있다.”는 피터 버거의 말을 변형해 본 것이다. - 필자 주} 이 문제 앞에서 근대사회는 한없이 작아지고 마는 것이다.

 

사회가 ‘구조적으로’ 제공할 수 없는 대답, 그렇다면 그 대답 찾기는 이제 우리 각자 개인의 몫일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상황은 오늘 ‘잘 죽자!’는 얘기, 어떻게 잘 죽을 것인가 하는 얘기, 잘 죽는 걸 배우자는 얘기들이 무성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글쓴이는 그런 이야기 대신에 조금 냉정하게 상황을 기술하고 있다. 어느 시각에서든지 사각지대가 있고, 다만 학자는 우리가 무엇을 보지 못하는지에 대해 조금 더 잘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정서적 해답을 주지는 못할지라도 나름의 역할이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우리는 현재의 상황에서 죽음과 소통하는 더욱 다양한 방법들을 찾아내 훈련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더 ‘새로운’ 차원에서 죽음이 말해지고, 소통되고, 담론화되어야, 죽음과 만났을 때 - 흔쾌히는 아니더라도 - 너무 쉽게 나가떨어지지는 않을 정도로는 대면할 수 있는 ‘사회적 힘’을 기를 수 있지 않을까 하기 때문이다. 근대적 죽음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을 통해 오늘, 여기 ‘죽음의 자리’를 되짚어보는 작업들이 죽음에 대해 지금까지와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죽음을 바라보고 조금은 다른 각도로 이야기할 수 있는 하나의 매개 정도는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모리 선생’이 전해주는 이야기

 

개인적 수준에서지만 근대라는 삶의 조건에서 어떤 거대한 ‘초월성’에 기대지 않고도 근사한 죽음이해 / 소통방식을 보여준 참 멋있는 사람을 알고 있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에서 만난 모리 선생이다. 이른바 스테디셀러인 이 책은 글쓴이에게도 특별한 책이었다. 담담해서 더 좋았던 기억이 있다.

 

모리는 본인도 루게릭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이전 대학동료의 장례식에 다녀오게 되고 다음과 같이 탄식한다. “이런 부질없는 일이 어디 있담. 거기 모인 사람들 모두 멋진 말을 해주는데, 정작 주인공인 어브는 아무 말도 듣지 못하니 말야.” 그러고는 본인의 ‘살아있는 장례식’을 기획한다. 어느 일요일 오후 모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평소에는 쑥스러워서, 시간에 쫓겨 하지 못했던 풍성한 사랑의 말들을 나누던 살아있는 장례식. 그 풍경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고 ‘나도 꼭 따라 해야지.’라고 마음먹었다.

 

“너무 늦지 않게 오늘 지금 이 자리에서 충분히 사랑하라.” 나지막이 전해주는 모리 선생을 기억하며 지금 이 자리에서 ‘관계성’을 생산해 내는 죽음인식에 대해 생각한다. 일상에서 살아내야 하는 죽음은 근대적 삶의 조건에서 이전보다 훨씬 중요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인들은 종교에 기대지 않고 얼마나 건강한 죽음인식을 생산해낼 수 있는가 하는 도전 앞에 서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에 실패한다면 죽음은 계속해서 그저 ‘터부’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종교 또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죽음을 이해 / 설명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가장 강력한 사회적 기제였던 종교. 종교는 지금 유래 없는 도전을 살아내야 하는 이들 옆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고 할 수 있을 것인가?

 

* 천선영 율리아나 - 독일 뮌헨 대학교 박사, 경북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경향잡지, 2010년 11월호, 천선영 율리아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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