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0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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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 124위 시복식과 명예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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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3-26 ㅣ No.1462

[특별 연재] 이 시대, 순교신심에서 길을 찾다


124위 시복식과 “명예회복”



삶의 푯대를 상실한 현대인들은 인문학, 심리학, 과학의 문을 서성이며 길을 찾고 있다. 여기, 한평생 순교신심을 연구해온 손골성지 윤민구 신부는 신앙의 유산이 담긴 순교신심에서 삶의 방향키를 찾아 우리에게 들려준다. 8월 교황 방한을 통해 이뤄진 124위 시복과 그 의미를 되새겨 본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우리를 찾아오신 것은 모두에게 행복이었다. 교황께서는 말씀과 행동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떠나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안주하지 말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며 도전하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순교자들을 본받으라는 당부의 말씀과 함께 124위 순교자들을 복자품에 올리셨다. 교황께서는 시복식 강론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견하시어 세상 안에서 거룩함과 진리의 누룩, 즉 땅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 되게 하셨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순교자들이 우리에게 가야 할 길을 제시합니다. 이 땅에 믿음의 첫 씨앗들이 뿌려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순교자들과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따를 것인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당신 때문에 세상이 그들을 미워할 것이라는 주님의 경고(요한 17,14 참조)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 됨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이것은 박해를 의미했고, 또 나중에는 산속으로 들어가 교우촌을 이루게 됨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은 엄청난 희생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서 그들을 멀어지게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즉 재산과 땅, 특권과 명예 등 모든 것을 포기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이 그들의 진정한 보화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매우 자주 우리의 신앙이 세상에 의해 도전받음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헤아릴 수없이 많은 방식으로, 우리의 신앙을 양보해 타협하고, 복음의 근원적 요구를 희석시키며, 시대정신에 순응하라는 요구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그리스도를 모든 것 위에 최우선으로 모시고, 그 다음에 이 세상의 다른 온갖 것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원한 나라와 관련해서 보아야 함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순교자들은 우리 자신이 과연 무엇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지, 그런 것이 과연 있는지를 생각하도록 우리에게 도전해 옵니다.

하지만 124위 시복식이 있고 나서 얼마 후에 어느 신자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그 신자는 제법 열심하다는 평을 듣는 사람인데 ‘교황님이 오셔서 순교자들을 친히 복자품에 올리시니 이제 그분들의 명예가 회복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이어서 ‘더군다나 조선 시대 관청들, 포도청, 의금부 등이 있던 곳하고 멀지 않은 광화문 앞 광장에서 시복식을 하였으니 한이 풀렸을 것이다’라고도 말하였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렇다면 순교자들이 이제껏 불명예 속에 살았고, 한이 맺혀 있었다는 말인가’라는 생각이 떠올라 무척 안타까웠다. 다른 신자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으리라 믿지만 그래도 노파심에서 여기에 대해 함께 생각하려 한다.

손골성지에는 3대(代) 순교자가 계시다. 이요한과 그 아들 이베드로 그리고 손자 이프란치스코이다. 이요한의 고향은 충남 당진군 면천면 가새울이다. 이요한은 신앙생활을 더욱 잘 하기 위해 가복(家僕)들과 함께 충남 목천 성거산 서들골에 숨어들어 살았다. 양반이었는데 ‘양반의 행세를 하면, 내게도 해로울 뿐 아니라 자손에게도 요긴치 않다’며 중인으로 살았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을 뿐 아니라 회장의 소임을 맡았었기 때문에 기해박해(1839) 때 사람들 입에 오르내려 전라도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박해가 잠잠해지자 ‘자녀 삼남매를 데리고 전라도에서 올라와 이때부터 손골에서 살았다. 병인박해(1866)가 일어나자 손골에 있던 도리(H. Dorie, 김(金), 1839-1866) 신부님이 모든 교우들에게 손골에서 급히 떠나라고 명해서 용인 남성골을 거쳐 충청도 아산 일북면 쇠재에 가서 살았다. 그러다가 그곳에서 잡혀 1871년 3월 19일(음) 서울 좌포청(左捕廳)에서 세 분이 함께 순교하였다.

이렇듯 이요한과 이베드로 그리고 이프란치스코 뿐 아니라 많은 순교자들은 시복식 강론에서 교황께서 하신 말씀처럼 “재산과 땅, 특권과 명예 등 모든 것을 포기”하였던 것이다. 이요한은 양반을 포기하고 중인으로 살았다. 그리고 거처를 여러 번 옮기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요한을 비롯한 순교자들은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자기가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지혜는 하느님께는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코린토 1서 3,18-19).

이요한은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 ‘어리석음을 택하는 지혜와 용기’를 지녔던 것이다. 이렇게 순교자들 스스로 어리석음을 택했는데 무슨 ‘명예회복’이 필요하고 ‘한 풀이’가 필요하단 말인가!

지난 번 「외침」 5월호에서 이미 필자가 말하였듯이 ‘원래 시복과 시성은 복자나 성인이 되는 당사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단지 살아있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그분들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본받으려 할 때 그 사람의 생각과 삶이 바뀌어 결국 하느님이 원하는 사람이 될 것이기에 교회가 순교자나 훌륭한 증거자를 뽑아 시복시성을 하는 것이다.’

시복과 시성을 순교자들에게 무엇을 만들어 드리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더군다나 ‘명예회복’이나 ‘한풀이’로 이해해서는 더욱 안 된다. 우리가 순교자들을 위해 무엇을 해드리는 것이 아니라 순교자들이 우리를 위하여 당신들 삶을 모범으로 내어주시는 것이다.

결혼식에서 신랑 신부도 아름답지만 그들을 키워낸 그 부모들이 더 아름답다. 첫 서원을 하는 풋내기 수녀들도 아름답지만 일생을 수도자로 살아낸 주름살의 수녀들이 더 아름답다. 한국천주교회를 시작한 이들도 아름답지만 신앙을 받아들이고 일생을 그 신앙으로 살아온 순교자들이 더 아름답다. 그들이 지혜와 용기를 갖고 살아내서 더 아름다운 것이다. 순교자들은 온 존재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서 8,35-39).

필자는 자주 124위 복자 호칭기도를 바친다. 주교회의에서 아직 정식으로 124위 호칭기도를 만들어 주지 않았지만 103위 호칭기도에서 103위 성인들 이름을 빼고 대신 124위 복자들 이름을 넣고 기도를 바친다. 복자들을 공경하고 본받고 싶어서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복자들처럼 초심을 잃지 않고 ‘어리석음을 택하는 지혜와 용기’를 지니고 살며 하느님을 사랑하여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하느님이 알아주시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그분들께 전구를 청하는 것이다(코린토 1서 8,1-3).

* 윤민구 도미니코 신부 - 1975년 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탈리아 로마에 유학하여 1983년 라떼란대학교에서 사목신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2003년까지 수원가톨릭대학교에서 강의하였다.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사무차장으로 일하였고 안성 대천동, 성남 수진동, 이천, 분당 야탑동성당 주임신부를 지낸 후 현재 손골성지 전담신부를 맡고 있다.

[외침, 2014년 11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윤민구 도미니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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