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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생명 그리고 죽음: 가장 좋은 웰다잉 준비는 웰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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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12-11 ㅣ No.293

[경향 돋보기 - 생명 그리고 죽음] 가장 좋은 웰다잉 준비는 웰빙

 

 

다잉(죽기)은 비잉(살기)의 일부분

 

생(生)과 죽음은 별개가 아니라, ‘앞뒤 일체’다. 서로가 서로에 불가결하며, 서로 의지하고, 서로를 위해 있는 것이다. 생명 안에 어떤 세포가 죽어야 다른 세포가 태어나 생명이 이어지듯이, 생은 죽음을 내포한다. 인간은 육신적 의미에서뿐 아니라 정신적, 영적 의미에서도 ‘죽어야 산다.’ ‘ 살기 위해 죽는다.’는 원칙을 매순간 체험한다. 이리하여 매순간의 생은 매순간의 죽음으로 이어지고 성장하고 완성한다. 죽음은 언젠가 장래에 일어날 사건이 아니라, 지금 준비되고 시작하고 반복되고 계속하고 접근하는 사건인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무시하고 망각하면 생을 파악하는 것도 제대로 사는 것도 불가능하다.

 

 

웰다잉(잘 죽기)의 준비는 웰빙(잘 살기)

 

생의 가치는, 세상에 약간의 사랑을 가져오고, 세상을 조금 더 따뜻하고 밝고 선하고 진실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일에 있다. 한 인간의 생이 남에게 약간의 사랑, 기쁨, 희망, 평화, 진실을 가져오면 그 생은 참으로 가치 있는 생이고, 진정으로 웰빙(잘 살기)이다. 그것이 웰다잉(잘 죽기)을 위한 최고의 준비가 된다. 전 생애의 매순간, 모든 일에 하느님과 남을 좀 더 사랑하고, 남에게 약간의 사랑, 기쁨, 희망, 평화, 진실을 가져다주는, ‘생의 질’을 높이는 웰빙(잘 살기)을 함으로써, ‘죽음의 질’을 높이는 웰다잉(잘 죽기)을 준비해야 한다.

 

고통과 포기의 ‘작은 죽음’을 수용할수록 남에게 기쁨과 행복의 ‘작은 새 생명’을 가져다주고, 자신도 기쁨과 행복의 ‘작은 새 생명’을 누린다. 날마다 매순간 모든 일에 수용하는 ‘작은 죽음’은 ‘작은 생’을 가져오고, 그것이 한평생 축적되어 마침내 종말에 육신이 죽고 부활할 때 완성한다. 이것을 먼저 예수님이 당신의 생애에 이루셨고, 모든 인간을 그에 참여하도록 부르신다. ‘파스카 신비’는 모든 인간이 한평생 모든 일에 끊임없이 예수님과 함께 죽고 부활하는 삶의 가장 근본적 체험이고, 종말에 완성할 최종적 체험이다.

 

예수님과 함께 고통과 포기라는 ‘작은 죽음’을 수용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반드시 기쁨과 행복의 ‘작은 부활’로 보답하신다. 그 기쁨과 행복은 이 세상의 어떤 기쁨과 행복과도 비교할 수도 바꿀 수도 없을 만큼 큰 것이어서 사람을 진정으로 충족시킨다. 그 보답이 너무 좋아서, 모든 고통과 포기는 참으로 아무 것도 아니었다고 깨달아, 오히려 그 보답을 얻으려고 그 고통과 포기를 수용할 수 있게 해주신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하게 된다.

 

그러나 그 보답을 누리기 전에는 고통과 포기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여기기 마련이다. 누리게 될 보답이 얼마나 좋고 큰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신앙과 영성과 성화의 과정은 고통을 수용한 결과로 기쁨을 누리고, 그 기쁨으로 더 큰 고통을 수용하게 되고, 그 결과 더 큰 기쁨을 누리는 ‘복된 순환’이다.

 

고통의 수용도 기쁨의 누림도 체험한 사람만 알지, 체험하지 않은 사람은 전혀 모르는 것이다. 참으로 신앙과 영성과 성화는 잘 죽을수록 잘 살고, 더 잘 살수록 더 잘 죽는 ‘복된 순환’이다.

 

 

웰다잉(잘 죽기)의 먼 준비

 

(1) 자신의 죽음을 가까이 다가온 현실로 묵상한다.

 

자신의 죽음을 자주 묵상하는 것은, 사람을 우울하고 불안하게 만들고, 세상을 비관하고 소극적으로 살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죽음을 떳떳하고 침착하게 맞이하게 하고, 삶을 안정되게, 행동을 진지하게 한다.

 

병자를 방문하고 장례에 참석할 때마다 자신의 죽음을 임박한 현실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참회개와 성화의 계기로 받아들인다. 일부러 묘지, 무덤, 납골당을 찾아가 먼저 가신 분들을 생각하고, 병원, 시설, 양로원 등을 방문하여 병자와 거기에 있는 사람들을 유심히 바라본다. 남의 죽음과 질병과 고통과 세상의 재난을 통하여 하느님이 자신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예민하게 듣고 온순하게 수용한다. 책상 위에 죽음에 관한 어떤 문장, 시, 기도문, 그림, 사진, 성경 말씀, 자신의 묘비와 유언서 등을 게시하여 자주 바라본다.

 

인간의 사망률은 100%다. 다만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 것인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죽음의 상황을 여러 가지 상상하고 걱정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맡겨야 한다. 결국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하느님 앞에 어떤 내면으로 죽는가가 가장 중요하고, 최종적으로 그것만이 중요하다.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들 모임이나 부모, 배우자, 자녀를 여읜 사람들 모임 또는 자살로 가까운 사람을 여읜 사람들 모임에 참여하여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은 큰 위로와 힘이 된다. “나는 하느님에게서 나왔다가 하느님께로 돌아간다.” “알몸으로 태어나서 빈손으로 돌아간다.” 등의 말을 자주 자신에게 말하며 사는 습관을 가진다.

 

(2) 자신의 죽음을 기준으로 하여 행동한다.

 

죽음은 내가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치는 ‘교사’이고, 내가 현재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비추는 ‘거울’이다. 지금 여기서 이렇게 행동하면 죽을 때 감사하고 만족할 것이라고 판단되는 대로 그렇게 행동하고, 죽을 때 후회하고 아쉬워할 것이라고 생각되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어떤 일과 행동을 할 때도 ‘이것은 영원을 위해 어떤 가치가 있고, 영원한 생명을 위해 어떤 소용이 있는가?’ 하고 자문한다. 순간을 위해 살지 않고 영원을 위해 살며, 지상을 위해 행동하지 않고 천상을 위해 행동한다. 순간적 충동, 본능적 욕망, 돌발적 행동, 현세적 탐욕 등에 끌리지도 잡히지도 않고, 현세에서 해방되고 현세를 다스리는 자로서 자유롭게, 스스로, 기쁘게 사랑을 실천한다.

 

(3) 꼭 하고 싶은 일과 꼭 해야 할 일을 미리 해놓는다.

 

어떤 취미, 예술, 음악, 영화, 독서, 운동, 등산, 여행, 봉사활동 등, 꼭 배우고 읽고 보고 실행하고 싶은 것들을 하나씩 우선순위를 매겨 순서대로 실행한다. 술, 담배와 어떤 버릇을 그만두는 일, 성경 공부와 기도, 묵상, 피정을 통해서 하느님을 깊이 체험하는 일, 어떤 사람과 화해하고, 어떤 사람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는 일, 빌린 물건을 반납하는 일 등을 늦기 전에 미리 해놓는다.

 

자신의 소지품과 중요 서류도 미리 정리해 놓는다. 죄와 잘못을 저질렀으면 성사를 볼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그 자리에서 통회하고 하느님께 용서를 빈다. 남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비는 일과 남을 용서하고 그와 화해할 일이 있으면, 미루지 말고 지금 그렇게 한다.

 

유언서를 작성하고, 공증을 받아놓는다. 유언서는 아주 중요한 사항만을 요약해서 기록한다. 집과 재산 처분, 계약 수행, 식구들에게 꼭 남겨야 할 말 등이다. 자신의 장례의 내용과 절차를 미리 정해놓기를 원하면 그렇게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식구들에게 맡길 수도 있다. 관 속에 자신이 그동안 사용했던 묵주, 성경, 기도서, 성가집, 걸어놓았던 십자가, 세워 모셨던 예수상, 성모상, 기타 소지품 등을 함께 넣도록 부탁할 수 있다.

 

(4) 가장 필요한 한 가지에 마음을 모은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꼭 필요한 한 가지”(루카 10,41-42)에 소소히 모든 관심과 힘을 모은다. ‘꼭 필요한 한 가지’는 하느님, 예수님, 사랑, 구원, 영원한 생명이며, 다른 모든 것은 결국 지나가고 멸망하고 사라진다. ‘사랑과 사랑이 만든 것만이 영원히 남는다.’ 사랑으로 하지않는 일은 아무리 크고 중요하고 거룩한 일이라 해도, 아무리 열심히 훌륭하게 했던 일이라 해도, 남지 않고 사라진다. 여러 가지 인간적 동기와 지향과 목적으로 했던 모든 일도 다 사라지며, 오직 하느님과 남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했던 일만 영원히 남는다.

 

(5) 허무한 세상을 내놓고, 하느님과 하늘나라를 그리워한다.

 

세상과 생활의 어떤 일에도 잡히지 않고, 어떤 일도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한다.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고, 모든 것을 소중하게 취급하는 한편, 할 수 없는 일과 바꿀 수 없는 일은 그대로 수용하고 흘러가게 한다. 모든 일에서 마음을 떼어 해방되어 자유로워진다. 자신을 붙잡고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다.

 

세상의 사랑과 진선미를 누리는 가운데, 그 원천과 목적이신 하느님을 누리며, 점차 하느님을 그리워하고 동경하게 된다. 그러려면 평소에 하느님을 아주 가까이 살아계신 분으로, 자신을 사랑하신 분으로 바라보고 의식해야 한다. 가끔 “하느님!” “예수님!” “성모님, 어머니, 엄마!” 하고 친밀하고 다정하게, 그립고 동경하는 마음으로 부른다. 세상에서 어렴풋하게 누렸던 하느님을, 죽음이란 경계선을 넘어 온전하게, 영원히 누리기 시작한다. 그러면 죽음은 두렵고 불안해하는 대상이기는커녕 최고의 설렘, 감탄, 감격, 행복의 시작이 된다.

 

성인 성녀와 순교자는 그렇게 죽음을 맞이했다. 그래서 교회는 성인 성녀와 순교자가 죽은 날을 경사로운 ‘축일’로 지낸다. 그들의 죽음은 얼마나 복된 순간일 것인가! 십자가의 성 요한은 말했다. “만일 인간이 하느님의 심오한 사랑을 한 번 맛들였으면 그 사랑을 다시 한 번 맛들이고자 세상의 가장 가혹한 고통을 천 번이라도 기꺼이 감수할 것이다.”

 

(6) 감사와 찬양의 기도를 바치고, 감사와 찬양의 마음으로 산다.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과 위대하심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은, 자신이 원래 창조되고 존재하는 본질적 신분에 꼭 알맞고, 자신의 본성의 필요성을 채우는 것이어서, 인간을 최고로 충족시키고 행복하게 한다. 천국의 영원한 행복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을 직접 보고 그분의 사랑과 영광을 누리며 그분께 한없이“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묵시 4,8; 이사 6,3) 하고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이미 감사와 찬양의 기도를 많이 바치고, 감사와 찬양의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이미 이 종말적 지복직관의 행복을 누리고 있고, 천국에 들어갈 준비가 된 사람이다.

 

재난과 고통이 일어나지 않게 최선을 다하는 동시에, 피할 수 없는 재난과 고통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하느님의 손에서 수용하여,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은 옳은 것이며, 죽음의 순간에 그렇게 한 것을 기뻐할 것이다. 감사와 찬양은 인생의 유종의 미를 거둬, 사람을 아름답게 늙어가게 하고, 풍요로운 노년을 지내게 한다.

 

 

웰다잉(잘 죽기)의 가까운 준비

 

(1) 마음의 안정, 평화, 침착함을 유지하고 희망을 가진다.

 

죽음에 대한 본능적 공포, 불안, 두려움, 걱정은 누구에게나 있다. 몸이 아프고 기력이 떨어지고 죽음의 순간이 다가올수록 자연스럽게 무기력, 실망, 우울, 슬픔으로 휩싸이게 된다.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일부러 마음의 안정과 평화와 침착함을 유지하도록 노력한다. 그러고자 하느님께 의지하고, 예수님께 전폭적 신뢰와 굳건한 희망을 가진다.

 

자신의 죽음의 현실을 ‘부정’하거나, ‘분노’하거나, 어떤 ‘거래’를 하거나, ‘우울’ 상태에 빠지지도 않고, 적극적, 능동적으로 ‘수용’한다(퀴블러 로스). 그 ‘수용’은 어떤 ‘기대’와 ‘희망’과 ‘의탁’과 ‘맡김’을 내포한 ‘수용’이지, 절망적, 부정적, 자포자기적 수용이 아니다.

 

(2) 능동적 자세와 밝은 표정과 희망적 마음가짐을 유지한다.

 

어떤 절망적 상황에 놓이게 된다 하더라도 항상 의욕과 희망을 가지며 능동적 자세를 지니는 것이 꼭 필요하다. “희망을 가져라.” “힘을 내라.” “좋아질 것이다.” 등의 말은 어떤 상황에 놓인 사람에게도 항상 필요하고 유익하고 도움이 된다.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모든 사람에게 용서를 빌고, 모든 사람과 화해하고, 모든 사람에게 감사하고, 모든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한다. 자신의 고통, 불안, 걱정을 필요 이상으로 드러내지 않고, 그 반대로 항상 누구에게나 밝은 표정으로 대하고, 긍정적, 적극적 자세를 유지한다. 남의 위로, 격려, 사랑의 말을 기대하는 것보다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에게 위로, 격려, 사랑의 말을 해준다.

 

(3) 사랑을 마무리한다.

 

침대에 누워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해도 사랑은 얼마든지, 언제든지 할 수 있다. 한평생 사랑의 삶을 살았던 그 마무리를 할 때가 온 것이다. 사랑의 마무리는 얼마나 오랫동안 크고 많은 사랑을 외적으로 실행하는가에 있지 않고, 짧은 시간이라도 내면으로 얼마나 큰 사랑을 지녔는가에 있다. 행동보다 마음이 더 중요하다. 찾아오는 사람에게 미소와 친절과 정성으로 최대의 사랑을 실천하고, 하느님께 진실한 사랑의 기도를 바치고, 자신의 호흡, 박동, 움직임과 자신이 누워있는 것과 자신의 전부를 최대의 사랑으로 봉헌한다.

 

(4) 마지막으로 하느님께 봉헌, 감사, 찬양의 기도를 바치며 숨을 거둔다.

 

마지막 순간에 바칠 기도문을 그냥 자유롭게 바칠 수도 있지만, 미리 작성해 놓고 가끔 바치는 것도 좋다. 하나의 예로서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바칠 수 있다.

 

“죽음과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 마침내 때가 왔습니다. 당신께서 저에게 주신 가장 소중한 선물, 저의 생명과 저 자신을 감사와 찬양의 마음으로 당신께 돌려드립니다. 여러 가지 죄를 저질렀고 부족한 것이 많지만, 저의 존재의 붕괴를 죄의 보속과 봉헌 제물로 기쁘게 바칩니다. 모든 죄와 잘못을 너그러이 용서하시고, 어떤 좋은 일을 할 수 있었다면 그것도 당신의 은총이오니 감사를 드리며 바치오니 받아주십시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들이 참 많았지만, 당신과 이웃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했던 것이 제일 마음이 아프고 아쉽습니다. 적어도 하늘나라에서 당신을 온전히 사랑하고, 당신께 한없이 감사와 찬양을 드리게 해주십시오. 당신은 참으로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는 주님이시나이다. 아멘.”

 

* 김보록 바오로 - 살레시오회 신부. 1940년 일본 히로시마에서 한국인으로 태어났으며, 1960년 일본 살레시오회에 입회하고 1969년 서울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미국 포댐 대학에서 교의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살레시오회 부관구장, 광주 살레시오 고등학교 교장, 서울 돈보스코 정보문화센터 원장을 지냈다. 현재 서울 살레시오회 본원에 거주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0년 11월호, 김보록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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