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0일 (월)
(백)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교육 주간)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최양업 신부가 베롤 주교에게 보낸 서한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9-18 ㅣ No.1161

최양업 신부가 베롤 주교에게 보낸 서한



새로 발견된 최양업 신부님의 친필 서한 2통을 소개합니다. 이 서한들은 최양업 신부님이 만주 대목구장 베롤(Verrolles, 方若望) 주교님께 보낸 것입니다. 1857년 10월 20일 소리웃에서 작성된 것과 1859년 10월 13일 안곡에서 작성된 서한입니다. 이 서한에서는 가난한 백성들이 국가의 폭정과 양반 관리들의 횡포에 시달리는 것을 측은하게 여기는 영혼의 아버지 최양업 신부님의 자부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신앙의 자유와 관련하여서는 프랑스 정부의 역할을 기대하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새롭게 공개된 최양업 신부님의 서한들은 최승룡(테오필로) 신부님이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입수한 것으로, ‘다블뤼 주교 비망기 원본’ 등을 비롯하여 한국 교회사에 관련된 자료들을 앞으로 더 발견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하는 데에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 편집자 주

 

 

1. 1857년 10월 20일 소리웃에서 보낸 서한 

 

베롤1) 주교님 각하


+ 예수, 마리아, 요셉

1857년 10월 20일 소리웃2)에서

 

경애하올 주교님,

저의 지난번 편지에서 우리의 경애하올 베르뇌 주교님의 초조하고 근심 어린 기대에 대해 주교님께 이미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만, 그분(베르뇌 주교)이 순조롭게 영입되셨으므로, 일 년 남짓 지난 지금에 와서는 새로 오신 두 선교 신부님3)들과 함께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분(베르뇌 주교)에 대한 일들이 잘 풀리리라는 것을 의심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저로서는 하느님의 이렇듯이 각별하신 은혜에 대해 그냥 침묵할 수가 없습니다. 주교님의 이런 은혜에 감사의 말씀을 표하는 것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으니, 왜냐하면 저희들을 위해 이렇듯 희생을 감수하셔서, 당신의 존귀하고 소중한 동료를 우리의 목자, 보좌 주교님으로 기꺼이 윤허하셨기 때문입니다.4) 게다가 당신께서는 1856년 12월 12일자로 편지를 보내주셨으니, 마땅히 또한 큰 감사를 드립니다.

이 기쁨에 더하여 바로 올해에 저희의 기대에 넘치게 아주 기묘한 방법으로, 새 동료 존경하올 페롱 신부님이 외교인의 쪽배를 타고 입국하셨고,5) 다블뤼 신부님은 아코넨스의 보좌 주교님으로 승품되셨습니다.6) 저희 가련한 자들 위에 이렇듯 자비를 베풀어 주시니, 지극히 좋으신 하느님께 얼마나 큰 감사를 올려야 할런지요! 저희를 위해서 하느님께 합당한 감사를 올려 주시옵기를 주교님께 청하옵니다.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별로 말씀드릴 바가 못 되옵니다. 우리는 모두 만족하게 잘들 지내고 있고, 선교회도 모두 현재로서는 한껏 평화를 누리고 있사옵니다.

지난해에 제가 성무를 집전하고 있던 마을7)에 저를 잡으려고 무장을 하고 침입했던 난동자들 일부는 우리 신입 교우들의 몽둥이세례를 받았고, 일부는 관가의 벌을 받았으며, 또 다른 일부는 마음으로 승복한 것은 아니라 해도 적어도 완력에 의해, 공포에 짓눌려 기진맥진해 있습니다. 그 일로 붙잡혀 투옥된 다섯 명의 신자들은 몇 개월의 형을 산 뒤 풀려났습니다. 저들의 난동을 통해서 몇몇 거짓 신자들은 이탈자들이 되었지만, 반면에 하느님의 오묘하신 섭리로 같은 기간 중 어떤 마을 전체가 온전히 회두하여 전부 신자가 되었습니다.

날로 조선 전체에, 심지어 외교인들까지도 거의 모두가 프랑스 배들이 왔으면 하고 기대하고 있는데, 프랑스를 통해서 조선이 보다 개선되리라는 이런 속된 전반적인 감정이 어디에서 연유하였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확실한 것은 저들(프랑스 배)이라도 빨리 왔으면 하는 어떤 필연성이 충분히 납득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지고하신 섭리라 하더라도 말세가 아니고서는 믿지 못할 고질적인 그런 일들이 있는데, 예컨대 이렇듯 심한 폭정이라든지, 가난한 백성들에 대한 양반과 관리들의 횡포, ‘이제 거의 끝이 왔구나’ 할 정도의 완전히 전반적인 무질서가 그것입니다. 그래서 이 나라 자체로는 어떤 치유책도 없어 보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언제나 이루어지시고, 그분의 나라가 어서 빨리 임하시어, 그분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시옵기를! 이만 마치면서, 저와 제 가련한 조선 신자들을 당신의 거룩한 기도에 맡겨 드리옵니다.

 

주교님의 미약한 종
최 토마스 올림

-------------------------------- 

1) 베롤 주교(1805-1878) :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중국 선교사. 1828년 사제품을 받고 1830년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1831년부터 중국에서 사목하다가 1838년 요동 대목구(1840년 만주 대목구로 개칭)의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어 1878년 선종할 때까지 활동하였다. 최양업 신부는 1842년 마카오 신학교를 떠난 이후, 만주의 팔가자를 중심으로 조선 입국을 시도했고, 1843년 12월에는 베롤 주교가 집전한 페레올 주교의 주교 서품식에도 참석했다. 그리고 1849년 4월 사제품을 받은 후에는 몇 개월 동안 요동의 차쿠 성당에서 베르뇌 신부의 보좌로 활동한 적이 있다. 따라서 최양업 신부는 만주 대목구장인 베롤 주교와 잘 아는 사이라고 할 수 있다.
2) 소리웃의 위치에 대해서는, 전라도 교우촌, 용인 손골, 불무골(충청도 남부)이나 오두재(전라도 북부) 인근 교우촌 등으로 추정되고 있다(차기진, <최양업 신부의 사목 관할 구역과 관련 지명 연구>,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 천주교 청주교구, 2009, 235-237쪽).
3) 1856년 3월 베르뇌 주교와 함께 입국한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를 말한다.
4) 베르뇌 주교의 조선 대목구장 임명 과정을 말하는 듯하다. 원래 베르뇌 주교는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되기 전에 베롤 주교에 의해 만주 대목구의 부주교로 임명되었었다. 그러나 교황청에서 1854년 8월 5일자로 베르뇌 주교를 제4대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하면서, 베르뇌 주교는 만주 대목구가 아니라 조선 대목구의 책임자로 사목하게 되었다.
5) 페롱 신부는 1857년 3월 31일 서울에 도착했다.
6) 다블뤼 주교의 주교 서품식은 1857년 3월 25일 서울에서 거행되었다.
7) 1856년 전라도 진밧들 공소에서 있었던 일이다.

 

 

2. 1859년 10월 13일 안곡에서 보낸 서한

 

베롤 주교님 각하

+ 예수, 마리아, 요셉

1859년 10월 13일 안곡8)에서

 

경애하올 주교님,

1858년 12월 21일자 주교님의 편지들을 변문9)에서 온 배달꾼들을 통해서 받았사온데, 그 편지들이 얼마나 큰 위로와 기쁨을 제게 주었는지 붓으로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그 편지들을 읽고 예전에 함께 살았던 공경하올 모든 동료 선교사 신부님들과 신자들의 소중한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또한 그 편지들을 통해서 중국 전역에 두루 퍼진 그곳 선교회 안에서, 프랑스 군대의 다행스러운 효과에 대해 축하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가련한 우리 조선에서도 마침내 고대하던 자유를 볼 수 있으리라는 소망이, 저라고 왜 용솟음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도처에서 큰 성과를 거둔다는 프랑스 군대의 언급이 (여기서는) 전혀 없습니다.

고군산도10)의 난파 사건이 지난 후, 그 당시에는 나머지 난파자들11)을 위해서 협상 차원에서 조만간 돌아오겠노라고 조선 조정에 말했습니다만, 특별히 우리 앞에는 때로 대단히 태만하고 때로 속이는 자들이 있어서 많은 해가 지난 여태껏 일언반구도 없습니다.12) 당시 조정에서는 그 극한 상황에 처한 자들(난파자들)에게 도움을 베풀었습니다.

북경과의 연락을 통해 중국에서 무시할 수 없는 준통치권을 행사하고 있는 저들(프랑스 군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조선 조정은 공적으로 대놓고 우리 신자들을 박해하거나, 적어도 대략은 행방을 알고 있을 우리 선교 신부님들을 체포하지는 않는 듯합니다.

어떤 관리들은 국법에 따라 신자들을 체포한 후 (놓아 주기도 하지만), 석방된 신자들을 권한도 없는 수하인들에게 통상적으로 맡겨 버립니다. 그런데 항시 성교회를 금하는 법이 살아 있어서, 그것에 의하면 누구든 우리를 고깝게 보거나 미심쩍으면 괴롭힐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박해 중에 사는 꼴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성교회의 진리를 잘 알고 있음에도, 조만간 오리라고 추측하는 미래 자유의 그 날까지 입교를 미루고 있습니다. 반면에 두려움을 모르는 적지 않은 사람들도 있어서, 자기의 재산을 던져 버리고, 온갖 곤궁과 치욕을 (감수하면서까지), 신적 소명을 따릅니다. 그들은 충실하게 복음의 법을 실천하는 사람들인데, 바로 올해 저희 관할 구역만 하더라도 500명의 예비 신자들이 있고, 그중에서 200명도 넘는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들 외에도 성교회의 진리를 알고 있어서 예수님께 자신을 봉헌하고 싶지만, 패기와 담력이 부족해서 초조하게 고대하는 자유의 그날까지 입교를 미루는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하오니 어서 빨리 복된 그날이 우리 위에 찬란히 빛나도록, 주교님께서 더욱 간절히 자비하신 하느님께 빌어주십시오. 또한 저를 위해서도, 지극히 감미로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온유하신 그분의 어머니이시며 우리의 어머니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전에 자주 기억되도록 간구하여 주십시오.

 

주교님께 감심(感心)으로 순종하는 비천한
최 토마스 올림

------------------------------------ 

8) 충남 부여군 외산면 혹은 미상(차기진, 앞의 논문, 241-243쪽).
9) 변문(邊門). 중국과의 국경 지대에 쌓은 장책(長柵)의 관문.
10) 전북 군산시 옥도면.
11) ‘나머지 난파자들’은 최양업 신부가 조선의 신자들을 은유하여 말한 듯하다.
12) 1847년 8월 프랑스의 글로와르(Glorie)호와 빅토리외즈(Victorieuse)호가 고군산도에서 난파한 사건을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해제>(본지 36-37쪽) 참조.

 

 

해제

 

 

1. 최양업 신부의 새 서한 발견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는,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에 이은 두 번째 조선인 사제이다. 그는 1849년 4월 15일에 사제품을 받고, 1849년 12월 3일에 조선에 입국하였다. 그리고 1850년 1월부터 활동을 시작하여 5도(道)를 두루 다니며 사목하다가 1861년 6월 15일 문경의 한 교우촌(혹은 진천의 한 공소)에서 선종하였다.

최양업 신부는 신학생 시절부터 선종할 때까지 여러 통의 서한을 작성하였다. 그중 현재 남아 있는 것은 19통으로, 이 서한들은 일찍부터 한글로 번역 · 간행되었다.13) 19통 가운데 아홉 번째 서한으로 알려진 1853년 10월 23일자 서한은, 바우링(John Bowring, 1792-1872) 영국 주중 공사 겸 홍콩 총독이 외무장관 클라렌든(Clarendon)에게 보낸 1854년 8월 25일자 서한에 들어 있는 발췌본이다.14) 그리고 나머지 18통은 원본과 사본 형태로 파리 외방전교회 고문서고(한국관계문서철 제577권, 제579권)에 소장되어 있었다.

 

<표1> 기존의 최양업 신부 서한 일람표

번호        발신일            발신지        수신자
1     1842년 4월 26일     마카오     르그레즈와 신부
2     1844년 5월 19일     팔가자     르그레즈와 신부
3     1846년 12월 22일   심양        르그레즈와 신부
4     1847년 4월 20일     홍콩        르그레즈와 신부
5     1847년 9월 20일     상해        르그레즈와 신부
6     1849년 5월 12일     상해        르그레즈와 신부
7     1850년 10월 1일     도앙골     르그레즈와 신부
8     1851년 10월 15일    절골        르그레즈와 신부
9     1853년 10월 23일    미상        마카오의 스승 신부
10    1854년 11월 4일    동골         리브와 신부
11    1855년 10월 8일    배론         르그레즈와 신부
12    1856년 9월 13일    소리웃      르그레즈와 신부
13    1857년 9월 14일    불무골      르그레즈와 신부
14    1857년 9월 15일    불무골      리브와 신부
15    1858년 10월 3일    오두재      르그레즈와 신부
16    1858년 10월 4일    오두재      르그레즈와 신부
17    1859년 10월 11일   안곡        르그레즈와 신부
18    1859년 10월 12일   안곡        리브와 신부
19    1860년 9월 3일      죽림        르그레즈와 · 리브와 신부

18통 가운데 577권에 들어 있는 14통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원본이고, 579권에 들어 있는 4통은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것으로 사본이다. 18통의 서한은 1997년 6월 23일 파리 외방전교회로부터 한국 천주교회에 기증되어, 서울의 절두산 순교박물관(현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당시 서한 기증에는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문화위원회의 최승룡(테오필로) 신부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15)

이처럼 최양업 신부의 서한은 지금까지 19통만이 알려져 왔다. 그런데 이번에 새로 2통의 서한이 공개된 것이다. 이는 최양업 신부가 만주 대목구장 베롤(Verrolles, 方若望) 주교에게 보낸 것으로, 1857년 10월 20일 소리웃에서 작성된 것과 1859년 10월 13일 안곡에서 작성된 서한들이다. 이 서한들 역시 최승룡 신부가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입수한 것이다.


2. 내용

1) 1857년 10월 20일자(소리웃) 서한

이 서한은 시기적으로 1857년 9월 15일자(불무골) 서한 다음에 작성된 것으로, 최양업 신부가 불무골16)에서 소리웃으로 이동한 후 작성한 것이다. 내용은 1856년에 베르뇌 주교와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신부가 입국한 사실, 1857년에 페롱 신부의 입국 사실과 다블뤼 신부의 주교 서품식, 그리고 1856년 자신이 성무를 집행할 때 외교인들과 충돌한 사건17)에 대해 쓰고 있다.

이와 함께 ‘외교인들을 포함한 모든 조선인은 프랑스 배가 와서 조선 사회를 변화시켜 줄 것을 바라고 있다’라는, 당시 조선 사회의 동향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조선 사회의 개혁에 대해서는 최양업 신부도 공감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의 조선 사회가 말세라고 느낄 만큼 폭정이 행해지고, 가난한 서민들에 대한 양반과 관리들의 횡포가 심하다고 보고, 조선 사회 자체로는 이러한 상황을 치유할 어떠한 대책도 없어 보인다고 평가하였다.

최양업 신부의 이러한 인식은 기존의 서한에서도 볼 수 있다. 즉 1857년 9월 15일자 서한을 보면, 최양업 신부는 조선의 양반들을 대단히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즉 “모든 백성이 양반 계급의 독선, 오만, 횡포, 부도덕이 모든 악의 근원이고, 온갖 비참함의 원인임을 시인하며 지겨워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조선의 양반 제도는 일부 양반에게 모든 권리를 인정해 준 반면, 일반 서민은 양반들의 온갖 횡포를 에누리없이 당하도록 강요하는 제도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제도하에서는 형제의 우애와 애덕이란 있을 수 없고, 천부적 인권은 완전히 무시되기 때문에, 양반 제도는 그리스도의 정신에도 위배된다고 보았다. 그리스도께서는 말씀과 실행으로 항상 가난한 사람과 소외된 사람들의 편을 드시고, 교만한 자와 권세 있는 자에게는 혹독하게 대하셨다고 하였다.18)

양반 제도에 대한 비판과 함께, 1858년 10월 3일자 서한에서는, “머지않아 서양 함선들이 쳐들어와서 조선을 전복시킬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전국적으로 나돈다”,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서양 함선들이 빨리 오기를 조급하게 기다리면서, 조선은 이 상태로 지탱할 수 없고 자멸할 것이다. 차라리 서양 함선들이 빨리 와서 더 좋은 상태로 철저히 개혁할 필요가 있다. 우리 조정을 다른 형태로 바꾸는 것이 훨씬 낫다고 한다”라는 등 당시 흉흉한 조선의 민심을 소개하고 있다.19)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최양업 신부도 신앙의 자유를 위해 프랑스 정부의 외교적인 역할을 기대하고 있었다. 즉 최양업 신부는 1859년 10월 12일자 서한에서 “프랑스 정부에서 한 번만 공식으로 우리 조선 정부에 대해 백성들에게 천주교를 믿을 신앙의 자유를 주라고 강력히 요구하는 경고문을 보낸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우리 조선 조정에서 이 요구를 감히 반대하지는 못할 것이 확실합니다”20)라고 하여, 하느님을 섬기고 자기 영혼이 구원되기를 원하면서도 나라의 금령 때문에 신앙을 고백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프랑스 정부가 도와줄 것을 바라고 있다.

따라서 이번에 새로 공개된 1857년 10월 20일자 서한의 내용은, 기존의 서한들 속에서 보여준 최양업 신부의 인식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고 있다. 특히 최양업 신부가 조선 사회의 개혁에 공감했던 이유가, 지배층의 폭정과 수탈에 시달리던 가난한 백성들을 위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21)

2) 1859년 10월 13일자 서한(안곡)

이 서한에는 베롤 주교가 1858년 12월 21일자로 보낸 편지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적고 있고, 고군산도(古郡山島)에 난파했던 사람들이 다시 협상하러 오지 않는데 대한 불만, 중국에 있는 프랑스군의 영향으로 공적인 박해는 없지만, 박해령이 살아 있기 때문에 항상 박해 중에 살고 있다는 것, 그리하여 많은 사람이 자유의 그날까지 입교를 미루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서한에서 주목되는 것은, 중국에서 선교회가 두루 퍼져 활동할 수 있는 것은 프랑스 군대의 영향이라는 인식과 중국에 있는 프랑스 군대를 두려워하여 조선 정부에서 공적으로 박해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최양업 신부는 고군산도 난파 사건 이후 프랑스가 보여준 태도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고군산도 사건이란 1847년 8월 조선 정부와 접촉하기 위해 항해하던 프랑스의 글로와르(Glorie)호와 빅토리외즈(Victorieuse)호가 전라도의 고군산도에서 난파한 사건이다. 당시 이 배에는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가 동승하여 조선 입국을 시도했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중국으로 돌아간 글로와르호의 라피에르(Lapierre) 함장은, 중국 정부를 통해 조선에 서한을 보냈는데, 거기에는 1848년 초에 프랑스 군함 1척이 조선에 갈 것이라는 내용이 있었다.22) 그러나 그 후 프랑스 군함이 조선에 온 적은 없었다. 최양업 신부는 이때 프랑스 정부가 계속 조선과 교섭하기를 기대했었다. 그랬더라면 조선도 중국 정도의 신앙의 자유는 누릴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 듯하다. 그리하여 최양업 신부는 1849년 5월 12일자 서한과 1850년 10월 1일자 서한에서 프랑스 군함이 약속만 해놓고 2-3년 동안 조선에 오지 않은 것에 대한 섭섭함을 표하고 있다.23)

결국 최양업 신부는 베롤 주교의 편지에 나타난 중국 교회의 상황과 조선에서 박해가 소강상태인 것이 프랑스의 영향 때문이라고 보았고, 그렇기 때문에 고군산도 난파 이후 12년이 지난 1859년의 서한에서도 1847년 당시 프랑스가 적극적으로 조선 정부와 교섭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아쉬움을 나타냈던 것이다. 그러면서 어서 빨리 신앙의 자유가 와서 많은 사람이 입교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는데, 이러한 내용에서도 서한1)과 같이 신앙의 자유와 관련해서 프랑스 정부의 역할을 기대하는 최양업 신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24)


3. 가치와 의의

이번에 공개된 2통의 서한은 내용상으로 특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다만 최양업 신부가 1857년에 불무골에서 2통의 서한을 보냈는데, 소리웃에서 보낸 1857년 10월 20일자 서한이 발견되면서, 최양업 신부가 1857년에 소리웃에도 갔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는 가난한 서민들이 국가의 폭정과 양반 · 관리들의 횡포에 시달리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최 신부의 위민의식(爲民意識)과 신앙의 자유와 관련해서 프랑스 정부의 역할을 기대하고 있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고 있다.

한편 이 서한들은 발견된 그 자체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즉 이를 통해 향후 최양업 신부의 또 다른 서한은 물론, 한국 교회사와 관련된 자료들이 더 발견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주목되는 것이 새로 발견된 2통의 수신자가 만주 대목구장인 베롤 주교라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지금까지 알려진 최양업 신부의 서한 18통은 파리 외방전교회 고문서고에서 한국 관계 자료를 모아놓은 577권과 579권에 들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공개된 최양업 신부의 서한은, 한국 관계 문서철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베롤 주교와 관련된 문서철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렇다면 이 서한들은 한국 교회와 관련된 자료가 반드시 한국 관계 문서철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다.

최양업 신부가 서한을 보낸 베롤 주교는 만주 대목구장이었고, 파리 외방전교회의 고문서고에는 만주 대목구의 자료들이 562-567권으로 분류되어 수장되어 있다.25) 그리고 이 가운데 조선 교회와 관련된 시기의 자료로는 562권(1840-1860), 563권(1824-1865), 566권(1838-1898)이 있다. 따라서 이 자료들을 검토해 보면, 한국 교회와 관련된 자료들이 더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 아울러 중국의 경우도 438권(1780-1787), 439권(1788-1800), 440권(1801-1817), 441권(1818-1843), 447권(1768-1785), 448권(1786-1804), 449-1권(1805-1817), 449-2권(1818-1835), 450-1권(1836-1841), 450-2권(1842-1848), 450-3권(1849-1857) 등이 조선 교회와 관련된 시기의 자료들인데, 이 자료들 역시 검토할 필요성이 있을 것이다.

최양업 신부는 현재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어 시복시성이 진행 중에 있다. 이러한 시기에 신부님의 서한이 새롭게 공개된 것은 뜻깊은 일이며, 이를 계기로 새로운 자료를 찾으려는 교회 차원의 노력이 좀 더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2통의 서한은 발견 그 자체로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
13) 현재 최양업 신부의 서한집으로 간행된 것은, 임충신 · 최석우 역주, <<최양업 신부 서한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배티 사적지 편, <<최양업 신부의 서한>>, 청주교구, 1996; 정진석, <<너는 주추 놓고, 나는 세우고>>, 가톨릭출판사, 2006; 청주교구 배티성지 · 양업교회사연구소 편,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 천주교 청주교구, 2009 등이 있다.
14)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 118쪽.
15) <서한집 해제>,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 201쪽.
16) 충남 서천군 판교면 흥림 2리(차기진, 앞의 논문, 237-239쪽).
17) 전라도 진밧들 공소에서 있었던 일로, 이에 대해서는 1856년 9월 13일자 서한에 자세히 나와 있다(<<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 134-136쪽).
18)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 156-158쪽.
19)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 162쪽.
20)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 189쪽; 최양업 신부의 1854년 11월 4일자 서한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는데, 거기에는 조선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 것으로 되어 있다(<<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 120-121쪽).
21) 최양업 신부는 1850년 10월 1일자 서한과 1853년 10월 23일자 서한에서도, 조선 백성들의 비참한 현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 61 및 118쪽).
22) 사를르 달레 원저,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하,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144-151쪽.
23)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 51 및 80쪽.
24) 외교적인 교섭에 의한 신앙의 자유 모색은, 주문모 신부 때부터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자들은 1811년과 1824년에 교황에게 보낸 서한에서도 사신이 대박(大舶)을 타고 와서 조선 정부와 교섭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구베아 주교의 셋째 서한>, <<교회사연구>> 8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92, 202쪽; <<만남과 믿음의 길목에서>>, 한국교회사연구소, 1989).
25) 파리 외방전교회 홈페이지(http://mepasie.org)에서 문서철의 목록(CATALOGUE DES VOLUMES)을 확인할 수 있다.

[교회와 역사, 2013년 8월호, 22-37, 번역 김상균 세례자 요한 신부(한국교회사연구소 고문서고), 각주 및 해제 방상근 석문 가롤로(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파일첨부

1,879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