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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2: 청양 다락골 새터 - 증조부 때부터 살아온 신앙 못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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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7-10 ㅣ No.1560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 (2) 청양 다락골 새터 


증조부 때부터 최양업 신부 일가가 살아온 신앙 못자리

 

 

- 청양 다락골 성지에는 최양업 신부 생가터인 새터와 병인박해 순교자 37위의 줄무덤이 있다. 사진은 다락골 성지 성당 전경.

 

 

칠갑산 굽잇길을 켜켜이 돌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 들어서면 다락골이라는 고즈넉한 시골 마을이 나온다. 최양업 신부 일가가 일군 교우촌이다. 다락골에는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1821~1861) 신부의 생가터인 ‘새터’와 150년 전 병인박해 때 홍주 감영이나 공주 황새바위에서 순교한 무명 순교자들이 묻힌 ‘줄무덤’이 성지로 조성돼 있다.

 

홍주 감영(지금의 홍성군청)에서 20여㎞ 거리에 있는 이 마을은 해발 791m의 오서산에 둘러싸여 형세가 마치 누각의 기둥 같아 ‘다락골’이라 불렀다. 박해자들의 근거지인 감영으로부터 걸어서 반나절 길에 있어 근황 파악에 쉽고, 앞은 틔어 있어 감시 또한 용이하며, 주위가 험한 산이어서 피신하기 좋아 교우촌으로서는 천혜의 입지 조건을 가진 곳이다.

 

 

최양업 신부 집안의 신앙 내력은 최 신부의 조카 최상종(원선시오)이 쓴 「최양업 신부 이력서」와 「최우정 바실리오 이력서」, 최 신부의 넷째 제수 송아가타가 구술한 「송아가타 이력서」를 통해 비교적 상세히 알 수 있다. 

 

최양업 신부는 경주 최씨 최치원(崔致遠)의 41대손이며 조선 시대 평정공신(平定功臣)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최확(崔確)의 11대손이다. 그의 부모는 성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과 복녀 이성례(李聖禮, 마리아)이다. 둘은 장남인 양업과 의정(義鼎, 야고보), 선정(善鼎, 안드레아), 우정(禹鼎, 바실리오), 신정(信鼎, 델레신포로), 2살 때 옥사한 막내 스테파노 등 6명의 자녀를 두었다. 

 

최양업 신부 일가가 서울에서 다락골로 이주해 ‘새터’를 이룬 때는 1791년 진산사건 이후이다. 최 신부 집안에 처음으로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인 이는 증조부 최한일(崔漢馹)이다. 그는 동생 최한기(崔漢驥)와 함께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에게 정조 재위 11년 되던 해인 1787년 서울 본가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 후 최한일은 경주 이씨와 혼인해 외아들 인주(仁柱)를 둔 채 사망했다. 최 신부의 증조모인 경주 이씨는 1791년 박해가 일자 화를 피하려 12살 된 아들 인주를 앞세워 충청도 홍주 누곡(樓谷)이라 불리던 청양 다락골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최한기 집안은 강원도 홍천으로 피신했다가 여러 순교자를 배출한 후 지금의 풍수원에 자리했다. 

 

이같은 최상종의 증언과 달리 최양업 신부는 조부 최인주가 1791년 박해 때 체포돼 많은 고초를 받은 후 석방된 후 다락골로 이주했다고 한다(최양업 신부의 8번째 서한 중에서).

 

 

경주 최씨 집성촌

 

다락골에는 경주 최씨들이 오래전부터 대를 이어 살고 있었다. 경주 최씨 화숙공파의 족보와 묘를 참조하면 적어도 1600년대 초반부터 이곳에 최씨들이 살고 있었다. 경주 최씨 집성촌에 정착한 최인주는 다락골에서 농사 품팔이를 하고, 경주 이씨는 가을걷이 품앗이와 바느질 품을 팔아 생활했다. 이렇게 생활한지 1년도 안 돼 둘은 초가를 마련하고 그나마 안정적으로 정착하게 된다. “가세가 날로 늘어 불과 수십 년 내에 몇백 석을 추수하므로 남들이 말하기를 천석 추수는 하리라 했다”(「최바실리오 이력서」 중에서).

 

그렇게 4~5년이 지난 후 최인주는 어머니 이씨 부인과 함께 다락골에서 700여m 떨어진 지금의 새터로 옮겨 주인 없는 버려진 땅을 개간하며 살림살이를 늘렸다. 차츰 이웃이 늘어 교우촌을 이루고 이름도 ‘새터’라 불렀다고 한다. 

 

최인주는 이곳에서 이존창 집안의 딸인 경주 이씨와 혼인해 영설(榮說), 영겸(榮謙), 영눌(榮訥) 3형제와 네 딸을 낳았다. 그중 막내 영눌이 최 신부의 아버지인 최경환 성인이다. 

 

최경환은 15살 되던 해에 새터에서 이성례와 혼인했다. 이성례는 이존창의 사촌 누이인 이 멜라니아의 조카 딸이다. 이 멜라니아는 김대건 신부의 조모다. 따라서 최양업과 김대건은 진외 6촌 간이 된다.  

 

결혼 3일 후 최경환은 인사차 처가에 갔는데 처가 식구들이 “구교우 집안사람이니 교리를 듣자”며 청했다. 사실 최경환은 교리에 밝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즉시 며칠 밤을 새워 「칠극」을 다 외우는 등 교리를 익히는 데 전념했다.  

 

“(부친) 프란치스코는 천성적으로 진정한 신앙의 실천자였고, 정직하고 순박한 성품을 타고났습니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세속의 오락을 가벼이 여기고 오로지 천주교 교리를 듣거나 읽는 것만을 즐거워하였습니다”(최양업 신부가 1851년 10월 15일 절골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 중에서).

 

- 최양업 신부 생가터. 커다란 감나무가 켜켜이 이어온 최양업 신부 일가의 신앙 내력을 증언하고 있다.

 

 

최양업도 이곳 다락골 새터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최경환은 나이가 들면서 가족의 신앙심이 냉담해지는 것을 보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래서 여러 번 부모들과 형제들에게 고향과 재물을 버리고 마을을 떠나서 영혼을 구원하기 편한 곳으로 이사하자고 제안했다. 가족들이 그의 말을 듣지 않자 최경환은 긴 편지를 양업에게 주면서 자기가 떠난 후 엿새 되는 날에 어른들에게 전해 주라고 일렀다. 그리고 교리에 더 밝은 신자들을 찾아 집을 나갔다.

 

 

서울로 이사했다 강원도 등 거쳐 과천에 정착    

 

최경환이 사라지자 집안에 난리가 났다. 가족들이 당황해 하자 양업은 아버지가 준 편지를 내보였다. 삼촌들이 그 편지를 읽고 찾아 나서 그를 데려왔다. 그러고 나서 가족 전체가 만장일치로 합의해 고향과 친척, 재산을 모두 버리고, 25명이나 되는 전 가족이 서울 낙동(지금의 회현동)으로 이사했다. 최경환 일가는 다시 이곳을 떠나 강원도를 거쳐 부평으로 이주한다.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선발된 것이 이곳 부평에서 살 때였다. 이후 최경환은 다시 과천 수리산 뒤뜸이(현 경기 안양시 안양3동)로 옮겨 정착하게 된다.

 

 

다락골 새터는 

 

17세기 초반부터 360여 년간 경주 최씨네가 산 집성촌이던 청양 다락골은 박해를 피해 서울에서 이주해온 최양업 신부 일가가 증조모, 조부모, 부모, 최 신부 형제까지 4대에 걸쳐 새터를 이루고 살던 곳이다.  

 

최양업 신부 일가가 이룬 이 새터는 교우촌으로 성장했다. 1838년 기해박해 때는 모방ㆍ샤스탕 신부가 이곳에서 피신해 있다가 앵베르 주교의 권고로 자수했다. 또 다락골 출신의 최해성(요한)과 최대종(요셉)도 두 신부와 같은 시기에 체포돼 순교했다. 병인박해 때 관원들이 이 마을을 불사른 후 교우촌 기능이 쇠락해졌다. 

 

하지만 다락골 새터는 최양업 신부 일가의 신앙의 못자리로 성인과 복녀, 가경자 각 1위를 배출한 성지로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평화신문, 2016년 7월 10일, 글 · 사진=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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