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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유럽 성지순례: 성 오틸리엔 대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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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6-24 ㅣ No.1679

[유럽 성지순례] 성 오틸리엔 대수도원


대성당 성인 유해함에 성 김대건 신부 성해 모셔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대수도원 대성당 전경. 고딕 양식인 대성당은 종탑 부분이 75m나 된다. 성당 입구에 서 있는 성 베네딕도 동상의 금도금 목장(지팡이)이 이채롭다.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연합회 모원인 독일 성 오틸리엔 대수도원.

 

독일 남부 바이에른주 뮌헨에서 남서쪽으로 약 40km 떨어진 오틸리엔(옛지명은 ‘엠밍 Emming’)이라는 한적한 시골마을에 자리잡은 성 오틸리엔 대수도원은 한국교회와 각별한 인연이 있는 곳이다. 이곳 연합회 수도자들이 1909년 우리나라에 진출, 한국교회 최초로 남자 수도원을 설립했고, 지금도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수도회 중 하나인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의 모태가 이곳이기 때문이다.

 

아오토반을 벗어나 오틸리엔 대수도원으로 가는 시골길이 정겹고 포근하다. 우리나라 가로수들보다 훨씬 키가 큰 전나무들이 도로 양편으로 곧게 뻗어 있고, 드문드문 보이는 집들이 한가롭기까지 하다.

 

초탈과 구도의 삶을 걷는 수도자들의 발걸음을 머금고 있어서인지 수도원 가는 길은 마치 피안의 성소로 빠져드는 듯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마을과 목초지는 며칠째 내린 눈으로 온통 은빛세계다. 간간이 굴뚝 위로 피어오르는 연기와 주인과 함께 산책 나와 은빛 화폭에 추상화를 그려대는 강아지 모습이 그렇게 정겨워 보일 수가 없다. 때마침 대수도원 성당에서 퍼져 나오는 맑고 은은한 삼종소리가 가난한 영혼을 반긴다.

 

성 오틸리엔 대수도원은 평원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다. 대수도원에 도착하자 문지가 수사가 환하게 웃으며 “그뤼스 고트”(Gruβ Gott, 독일말 인사)라고 말하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리고 “형제 나라 한국에서 오신 것을 환영한다”며 “이곳엔 현재 수도자, 직원, 학생, 도제 등 600여명이 사는 수도원 마을”이라고 소개했다. 수사들과 수도원 가족들은 이곳에서 출판사, 도서관, 농장, 양계장, 학교, 피정센터, 철공소, 전기방, 구둣방, 성물방, 주방 등 여러 일터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문지기 수사와 성물방 수사 등 손님을 맞는 몇몇 수사들만 수도복을 입고 있지 만나는 사람들마다 청바지 차림이어서 수도자인지, 직원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들 역시 눈만 마주쳐도 “그뤼스 고트”라며 반가워했다.

 

이곳 수도원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독일 성 베네딕도회 보이론 수도원 출신인 안드레아스 암라인(Andreas Amrhein) 신부가 중세 시대 선교의 중추적 역할을 하던 수도승 선교사들의 복음 정신과 베네딕도회 수도승의 삶을 실현하고자 1884년 독일 남부 지역 라이헨바흐(Reichenbach)에 독일 최초의 선교 베네딕도회를 설립한다. 3년 후 이 수도단체는 엠밍으로 옮겨왔다. 엠밍에는 성녀 오틸리아의 작은 순례 경당이 있었다. 수사들은 맹인들의 주보 성녀인 성녀 오틸리아와 영적 소경인 비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을 빛을 전한다는 수도회의 이상이 잘 어울려 수도원 이름을 오틸리엔으로 지었다.

 

성 베네딕도회 삶의 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사도직은 ‘복음전파’를 표방, ‘안으로는 수도승, 밖으로는 선교사’라는 정신으로 살아가는 성 오틸리엔 수도회는 1896년 교황청 인준을 받고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승격했다.

 

그 후 성 오틸리엔 대수도원은 세계 곳곳에 여러 수도원을 세우고 복음을 전파, 선교 베네딕도회 연합회 즉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연합회’의 모원으로 발전했다.

 

성 오틸리엔 수도원 대성당 제단. 제대 밑 청동문 안에는 성녀 오틸리아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성해가 안치돼 있다.

 

 

먼저 수도원 대성당을 찾았다. 종탑 높이가 75m나 되는 고딕양식의 성당이 수도원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성당 내부는 선교사를 싣고 세계 곳곳으로 향해 나아가는 세 척의 배 모양을 하고 있다. 그리고 좁은 창문마다 선교사들의 활동상을 담은 색유리화가 장식돼 있다. 제대 밑 청동창살 뒤편에 있는 성인 유해함에는 성녀 오틸리아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성해가 보관돼 있다. 성인 유해함 주변으로 독일의 사도 성 보니파시오와 수도원 수호성인인 성녀 오틸리아, 한국인 첫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우간다의 순교자 성 칼 르방가의 동상이 서 있다. 이곳 수도자들은 전례 때마다 이 네 분 성인의 선교 정신을 상기하면서 복음화 사명을 고취시키고 있다고 한다. 불행히도 제단 위로 올라갈 수 없어 성인 유해함과 동상은 볼 수가 없었다.

 

대성당을 둘러본 후 박물관으로 갔다. 박물관에는 한국을 비롯한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민속품과 서적들이 전시돼 있다. 한국관에는 태극기와 한복, 가구, 농기구뿐 아니라 우리말 전례서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일제 강점기 때 수집한 일본풍 전시물들이 많아 마음이 무거웠다.

 

일정대로라면 이곳에서 수도자들의 낮기도에 참여하기로 돼 있었으나 2시간여를 기다려야 했기에 소성당에서 우리말 미사를 했다. 기꺼이 성당 사용을 허락하고 미사 준비까지 직접 챙겨준 수사가 흰 이를 드러내며 살짝 웃더니 부끄러운 듯 사라졌다.

 

미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무슨 용도로 사용하는지 모르겠으나 건물 앞 철제함 옆에 써 놓은 낙서가 렌지를 통해 들어왔다. “Dominici scola servitii”, ‘주님을 섬기는 학교’라는 뜻이다. 알프스에서 유명 사립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성 베네딕도회 ‘에탈 수도원’으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오르는 순간 ‘수도원만이 아니야! 세상 전부가 주님을 섬기는 학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틸리엔 대수도원을 떠나면서 비로소 예수님을 닮는 학교가 바로 내가 사는 세상임을 알게 된 것이다.

 

 

성 오틸리엔 대수도원과 한국교회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연합회 수도자들이 한국에 진출한 것은 1909년 2월이었다. 당시 서울교구장 뮈텔 주교 초청으로 사우어 신부 등 수사 신부 2명이 내한해 서울 백동(지금의 혜화동 성당 자리)에 수도원을 설립한다. 한국교회 최초로 세워진 남자 수도원이다.

 

1913년 아빠스좌로 승격한 수도원은 1927년 교황청으로부터 원산교구 자치를 위임받고 함경도 덕원으로 수도원을 옮긴다. 신학교를 세우고 중국 간도지방까지 복음화한 수도회는 해방 후 소련군에게 수도원의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수도자 18명이 순교하는 박해를 받는다.

 

한국전쟁이 끝나자 대구교구의 허가로 왜관에 수도원을 세운 수도회는 순심학교와 분도출판사, 피정의 집, 목공소, 금속 공예실, 유리화 공예실 등을 운영하며 생활하고 있다. 1987년 서울 근교 불암산 자락에 성 요셉 수도원을 설립했고, 2001년에는 미국 뉴튼 수도원을 인수 한국인 수도자들 파견하고 있다. 현재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에는 143여명의 수도자가 생활하고 있다.

 

[평화신문, 2004년 3월 28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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