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월)
(백)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성극ㅣ영화ㅣ예술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마해송 프란치스코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4-04 ㅣ No.64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13) 마해송 프란치스코 (상)


‘어린이 헌장’ 만들고 최초의 창작동화 쓴 마해송

 

 

서재에서 마해송.

 

 

갑작스러운 죽음

 

마해송(프란치스코, 馬海松, 1905~1966)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아들 마종기 시인은 「아버지 마해송」이란 책을 냈다. 아버지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글로 가득하다. 마해송은 갑자기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경기도 포천으로 친하게 지내던 한 군종 신부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 날 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차에서 내렸을 때 동행한 친구에게 집 쪽 성당의 높은 철탑을 가리키며 웃을 뿐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서점에 들러 미국에 사는 아들의 시가 실린 잡지 한 권을 사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고 웃는데 얼굴 한쪽이 일그러졌다. 그날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 장례 미사는 명동대성당에서 문인장으로 치러졌다. 마해송은 그해 정월 초하루에 다음과 같은 짤막한 유언을 남겼다. “공부도 재주도 덕도 부족한 몸으로 외롭단 인생을 외롭지 않게 제법 흐뭇하게 살고 가게 해주신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그를 아끼던 사람들이 묘에 작은 비석을 세웠다. 거기에는 마해송이 즐겨 쓰던 글이 새겨졌다. “어린이 사랑하는 마음 나라 사랑하는 마음.”

 

아들 마종기는 미국 의과대학에서 수련의 과정 중에 아버지의 별세 소식을 들었다. 의학 공부하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런데 장례식에 갈 수가 없었다. 비행기 표를 살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돈이라고는 미국에 올 때 아버지가 준 50달러가 전부였다. 아들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다섯 해가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묘소를 찾았다. 큰절을 올렸다. 아들은 머나먼 나라에서 아버지를 그리며 시 한 편을 지었다.

 

“아버님 다시 돌아가서/ 큰절 한 번만 받으시옵소서/ 5년 후에 보자고 큰절 한번 안 받으시고/ 돌아올 때 나가마, 공항에도 안 나오신/ 아, 그 담담한 미소의 악수 한 번/ 이제 아버님은 가시고/ 저는 너무나 멀리에 있습니다.”(‘아버님 영전에 올리는 시’에서)

 

아들은 미국에서 생활하며 아버지를 무척이나 그리워했다. 그의 시에서 그리움이 절절히 묻어나온다. “가끔 당신을 만나요/ 먼 나라 낯선 도시에/ 나는 지금 살지만/ 나를 찾아온 환자 중에서도/ 비슷한 윤곽, 안경과 대머리/당신은 미소하시겠지만/ 나는 말없이 반가워서 속으로 울어요.”(‘선종 이후·4’에서) 

 

아버지 마해송의 묘소를 찾은 아들 마종기씨

 

 

아동문학가이자 수필가

 

마해송은 개성에서 출생했다. 어릴 적 이름은 창록(昌祿)이고, 법적인 이름은 상규(湘圭)였다. ‘昌祿’은 이름 쓰기가 어려웠고, ‘湘圭’는 그의 말대로 ‘맛대가리’가 없었다. ‘湘’ 자는 횟수가 많았고 글자를 써도 아래위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부친은 “상(湘) 자는 좋은 글자다. 소상강(瀟湘江)이라는 ‘상’ 자다”라고 했다. ‘소(瀟)’는 호남성에서 발원하여 상수(湘水)로 흘러가는 강이고, ‘상(湘)’은 광서성에서 동정호로 흘러드는 강으로 소상강은 중국에서 아름답기로 유명한 강이다. 부친이 말한 ‘소상강’이란 단어에서 바다와 소나무를 생각해냈다. 두 글자를 합쳐보니 ‘해송(海松)’이 되었다. 이내 ‘해송’은 그의 이름이 되었다.

 

마해송은 개성학당을 거쳐 서울에서 중앙고보와 보성고보를 다녔다. 재학 중에 동맹 휴학 사건이 있었다. 3·1 독립운동 후에 학교에서 학생들이 존경하는 조선인 교사를 해고했다. 학생들은 반발했다. 마해송은 주동자로 몰려 퇴학당했다. 그리고는 그다음 해에 일본에 있는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과에 입학했다. 전공은 극문학(劇文學)이었다. 유학생 극단인 ‘동우회’를 조직해 방학 때면 귀국해 전국을 돌며 공연했다. 회원은 홍난파, 윤심덕, 오상순, 김우진, 홍해성 등이었다. 그들과 함께 우리나라 신극 운동을 주도했다. 또한, 방정환과는 색동회를 조직했다. 마해송은 「바위나리와 아기별」과 「어머니의 선물」로 이 땅에서 최초로 창작동화를 썼다.

 

그는 아동문학가이면서도 수필가였다. 수필집으로는 「편편상」, 「아름다운 새벽」, 「전진과 인생」이 있다. 그의 수필은 진실하고 솔직하기로 이름났다. 마해송은 대학 졸업 후에 일본 최대 종합잡지사인 ‘문예춘추사’에 입사했다. ‘문예춘추사’를 창간한 소설가 기쿠치 칸은 마해송의 스승이었다. 마해송은 니혼대학에서 그의 강의를 들었다. 스승이 직장의 상사였던 것이다. 후에 마해송은 잡지사 ‘모던 니혼’을 인수했다. 그는 일본에서 뛰어난 경영자이며 편집자로 이름을 날렸다. 마해송은 해방 직전에 귀국해 작품 집필에만 전념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 어린이 헌장’을 만들었다. “어린이는 나라의 앞날을 이어 나갈 새 사람이므로 그들의 몸과 마음을 귀히 여겨 옳고 아름답고 씩씩하게 자라도록 힘써야 한다.”(헌장 前文) 마해송은 일제강점기와 광복 그리고 6·25 전쟁과 4·19 혁명 등의 험난한 시대를 살아오면서 수많은 아동문학 작품을 써서 이 땅의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다.

 

마해송은 열세 살에 부친의 강요로 결혼했다. 결혼생활은 재미가 없었다. 자신이 선택한 여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열다섯 살 때 기차에서 만난 네 살 연상의 초등학교 교사를 사모했다. 마해송은 그 여성에 대한 느낌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 사람이 차에 오르면 찻간은 갑자기 밝아졌고 한 송이 함박꽃이 거기 조명을 받으며 서 있는 것 같아서 내 가슴은 부풀었다.’ 그 여인과의 만남과 헤어짐은 한 편의 연애소설과도 같다.

 

- 서울 명륜동 자택에서 찍은 가족사진. 사진 왼쪽부터 마해송, 차남 종훈, 부인 박외선, 딸 주해, 장남 종기. 출처=「아버지 마해송」

 

 

연애 사건으로 부친은 유학 중이던 마해송을 고향으로 불렀다. 그리고는 집에서 못 나가게 했다. 마해송은 자신을 묶어두는 것이 부당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 억울함을 작품으로 만든 것이 「바위나리와 아기별」이었다. 바위나리는 꽃 이름이 아니라 바위에서 난 꽃이다. 동화는 바위나리와 아기별과의 애절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마해송은 어른은 언제나 어린이를 철부지로 여긴다고 생각했다. 어린이도 사람 대접받아야 한다는 신념이 생겼다. 이를 이 땅의 어른들에게 호소하고 싶었다. 이것이 이 나라에서 어린이 운동을 일으킨 계기가 되었다.

 

 

생사의 고비 넘기며

 

마해송은 일본에서 결핵에 걸려 해발 900m에 위치한 결핵 요양소에서 요양했다. 두 번째 요양했을 때는 피를 쏟았다.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 1년만 더 살게 해달라고 울면서 기도했다. 요양소를 나오고 한 달 후에 예술가였던 여성과 결혼했다. 그 여성은 나중에 이화여대 무용과 교수가 된 박외선이었다. 그녀는 마산여고 시절에 최승희의 무용 공연을 보고 감동했다. 그 후, 일본 여자외국어대학으로 유학을 가 최승희가 소개해준 무용연구소에서 공부했다. 졸업 후에는 일본 전역을 돌며 공연했고, 영화에도 출연했다. 그렇게 일본 땅에서 조선의 현대무용가로 이름을 날렸다. 청포도의 시인 이육사가 박외선 무용연구소를 찾아가 인터뷰할 정도였다. 귀국하자 6·25 전쟁이 일어났다. 박외선은 자식들을 데리고 마산으로 피난 갔다. 그곳에서 갖은 고생을 했다. 시장 개천가에서 쭈그리고 앉아 옷가지와 장신구를 펼쳐놓고 팔았다. 아들은 그런 초라한 어머니를 만나는 것이 창피했다. 그래서 개천가 다른 곳에서 어머니를 훔쳐보기만 했다. 아들은 어머니가 장터에서 꿀꿀이죽을 먹는 모습도 보았다. 가족에게는 깨끗한 저녁 식사를 만들어 주면서 자신은 냄새가 나는 더러운 음식을 먹은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아들은 가슴이 메고 눈물이 났다.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4월 2일, 백형찬(라이문도, 전 서울예대 교수)]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14) 마해송 프란치스코 (하)


생애 마지막, 훌륭한 신앙인으로 산 검은 색안경의 문학가

 

 

서재에서 마해송 부부. 부인 박외선이 먼저 세례를 받았고 마해송은 뒤늦게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났다. 출처=「아버지 마해송」

 

 

명륜동의 아늑한 집

 

마해송(프란치스코, 馬海松, 1905~1966)은 자신이 사는 마을을 ‘코끼리 우는 마을’이라 불렀다. 명륜동에 살았는데 창경원 뒷담 밑이라 새벽이면 코끼리 우는 소리가 들렸다.

 

당시 창경원에는 동물원이 있었다. 마해송의 집은 터가 30평, 건평이 13평, 그리고 다섯 평쯤 되는 마당이 있었다. 마당에 박을 길렀다. 밤에 하얗게 피는 박꽃이 좋았다. 하늘에서 백로는 춤을 추고, 새들은 추녀 끝에서 노래했다. 대문 밖에서 보면 보잘것없는 집 같으나, 문을 열고 들어서면 아늑했다. 안방에는 아내와 딸, 건넌방은 마해송, 아랫방에는 아들 둘이 살았다. 마해송의 방은 온돌방인데 사방탁자와 문갑이 있고, 교자상 같은 책상과 글 쓰는 작은 소반이 있었다. 책상에는 늘 많은 책이 있었다. 밝은 곳에서 글을 읽고 써야 했기에 이동에 편리한 작은 소반을 사용했다. 머리맡에는 오래된 라디오를 두었다. 글을 쓸 때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었다. 그가 가장 사랑한 음악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4번이었다. 이외에도 베토벤의 피아노 3중주(대공),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3중주, 드뷔시의 영상집을 좋아했다. 재떨이는 청동화로 모양의 놋재떨이를 썼다.

 

아내가 임신하고 출산을 앞두자 마해송은 방에 들어가 순산하게 해달라고 빌었다. 방 한가운데 서서 이쪽저쪽으로 돌아가며 절했다. 무엇을 바라보며 무엇에게 향해서 하는 절이 아니었다. 그저 두루두루 돌아가면서 절을 했다. 둘째 아들을 낳을 때도, 딸을 낳을 때도, 딸이 육십일 되는 날도 그리고 미군 폭격기 B-29의 폭격을 각오하면서 가족을 귀국시킨 밤에도 그렇게 절했다.

 

 

종소리 따라 성당에 간 아내

 

6·25 전쟁 때 마해송은 국방부 정훈국 편집실에서 일하고 있었다. 전후방 각지를 돌아다녔다. 한번은 지프를 타고 가다가 커브에서 차가 굴러 운전병이 즉사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죽을 뻔한 것이다. 마산으로 피난 간 부인에게서 편지가 왔다. “…어제 해 질 때는 성당에 갔어요. 어떻게 그 높은 언덕 위까지 올라갔는지 몰랐어요. 종소리를 따라서 정신없이 올라갔어요. 아무것도 모르지만, 무릎을 꿇고 앉아있으니 가슴 속이 아주 가라앉았어요. 성모님은 아름답고 거룩하고 인자했어요.…” 마해송은 아내에게 ‘성당에 가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답장을 보냈다. 마해송은 일본에 있을 때 성당에 간 적이 있었다. 일본인 친구 장례 미사에 참여했다. 그때의 느낌을 이렇게 적었다.

 

“성당에 들어설 때에 여인들은 머리에 흰 보, 검은 보를 쓰는 것이었고, 한 발 들어서자 마룻바닥에 한편 무릎을 꿇고 절하며 경건히 성호를 긋는 것이 세상에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내가 어려서 많이 드나들었던 예배당의 풍속과는 딴판으로 질서가 정연하고 엄숙한 품이 보기에 아름다웠다.… 모든 절차가 엄숙했고 기침 소리조차 조심스러운 것 같았다.”

 

마해송의 부인은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가족 중에 제일 먼저 세례를 받은 것이다. 마해송은 용기를 내어 가톨릭대학 신학 교수로 있던 최민순 신부를 찾아갔다. 최 신부와는 대구 시절부터 알고 지냈다. 최 신부는 단테의 「신곡」,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등의 명저를 번역한 학자 신부였다. 최 신부에게 일 년 동안 교리를 들었다. 마해송은 “교리가 끝나면 세례를 받겠습니다”하고 약속했다. 성경도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읽기 시작했고, 최 신부가 준 성인전(聖人傳)도 읽었다.

 

마해송과 군의관 시절 아들 종기.

 

 

하느님 사랑을 깨닫다

 

그러던 어느 주일에 명동대성당에 갔다. 미사가 시작되었다. 성호경,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사도신경 등 교리 공부하면서 익힌 기도문들이 미사 중에 많이 나왔다. 사람들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하는 모습을 본 순간, 갑자기 ‘당신이 정말 나를 오늘 있게 해주신 하느님이십니까? 감사합니다. 이렇게 늦게야 알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마해송은 10월 3일 새벽 여섯시에 서울 정릉에 있는 성가수녀원에서 최 신부의 집전으로 프란치스코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고 성당 밖으로 나오니 성모상이 새롭게 보였다. 그 앞에서 기도를 드렸다. “천주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으시어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그날은 마해송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새벽’이었다. 아들 마종기는 신앙심이 깊었던 아버지를 이렇게 기억했다. “아버지의 만년 생활은 그 전체가 가톨릭 믿음과 연결되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들 때까지 크리스찬으로, 가톨릭인으로 사셨다.”

 

아동문학가 박홍근도 마해송의 신앙심을 이렇게 말했다. “선생은 신덕, 망덕, 애덕을 갖춘 철저한 신앙인이었다. 하느님의 존재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생전에도 매일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끝냈다. 사도신경 그대로 살았다. 십계명과 가톨릭 교리를 그대로 지키며 사람들을 사랑하고 덕을 닦고 죄를 피했다.”

 

이렇듯 마해송은 생애의 마지막을 훌륭한 신앙인으로 살았다. 아버지의 신앙생활에 감동을 받은 딸과 아들도 세례를 받았다. 식구 모두가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생각하면 참으로 오랜 세월, 나는 많이도 빌며 살아왔다. 하늘에도 빌었다. 땅에도 빌었다. 달님에게도 빌었고, 별님에게도 빌었다. 바윗돌에도 빌었고 대감님에게도 빌었다.” 이렇듯 마해송은 오랜 세월을 여기저기에 빌며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하느님께만 비는 삶을 살기 시작했다. 신앙심을 갖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모래알 고금’과 ‘비둘기가 돌아오면’이 그의 신앙이 담긴 작품이다.

 

- 마해송은 언제나 검은 색안경을 쓰고 지팡이를 쥔 단아한 모습이었다. 화가 장욱진이 그린 마해송. 출처=‘문학사상’ 표지

 

 

아버지와 아들의 눈물

 

피난 시절, 주인집에서 신문을 구독하고 있었다. 어느 날 아들 마종기는 배달온 신문을 주인이 없을 때 마당에서 읽고 자기네 방 툇마루에 올려놓았다. 그날 저녁에 주인집 아주머니가 마종기를 큰 소리로 불렀다. 신문을 읽고 어디에 두었냐고 물었다. 아들은 집안을 뒤졌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그 광경을 보고 있다가 주인집에 사과하고는 아들을 집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리고는 무자비하게 때렸다. 뺨도 때리고, 다리도 때렸다. 이리저리 피하는 것을 따라가면서도 때렸다. 마해송은 아들을 왜 그렇게 무자비하게 때렸는지 후에 「너를 때리고」라는 수필에 자세히 썼다. 마해송은 아들을 때리고 나서 훈계했다. 아들은 옷에 묻은 흙을 털다가 우연히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가 울고 있었다. 아버지의 우는 모습을 처음으로 본 것이다.

 

또 이런 일화도 있다. 피난 시절, 마종기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대구 약전골 방 한 칸에서 가난하게 살았다. 어느 날, 마해송은 원고료를 많이 받았다고 하며 아들에게 한턱을 내겠다고 했다. 아들은 짜장면을 먹고 싶었는데, 아버지가 데리고 간 곳은 ‘르네상스’라는 고전음악 다방이었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따뜻한 우유 한 잔을 사주었다. 우유를 마시며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과 쇼팽의 피아노곡을 들었다. 지금도 그 곡을 들으면 아버지가 생각나 눈물이 흐른다고 했다.

 

서양화가 장욱진은 명륜동에 살았다. 그는 매일 새벽 산책을 했다. 산책 코스 중 한 곳인 혜화동 로터리 길에서 한 사람을 늘 만났다. 그는 언제나 검은색 안경을 똑바로 쓰고, 밤색 점퍼, 검은 베레모 그리고 지팡이를 손에 쥔 단아한 모습을 했다. 그리고 작은 강아지가 따라다녔다. 처음에는 몇 번 그냥 지나쳤지만, 새벽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매일 만나게 되어 장욱진이 먼저 인사를 했다. 바로 그 사람이 마해송이었다. 아이들을 사랑한다는 같은 생각으로 두 사람은 더욱 가까워졌다. 장욱진은 마해송의 동화를 좋아했다. 마해송 역시 장욱진의 그림을 좋아했다. 어느 날, 장욱진은 마해송이 세상을 떠났다는 얘기를 들었다. 장욱진은 슬펐다. 마해송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렸다. 그림에는 함성을 지르는 꼬마와 동네를 슬슬 산책하는 강아지가 있고, 하늘에는 해와 달이 친구처럼 떠 있다. 그리고 검은 색안경을 쓴 사람이 지팡이를 짚고 웃으며 걸어가고 있다.

 

참고자료 : ▲ 마해송. 아름다운 새벽. 문학과사상사. 2015. ▲ 마해송. 전진과 인생. 문학과사상사. 2015. ▲ 마종기. 아버지 마해송. 정우사. 2005. ▲ 마종기.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문학과지성사. 1980. ▲ 마종기. 우리 얼마나 함께. 달. 2013. ▲ 장욱진. 강가의 아틀리에. 열화당. 2017. ▲ 조선일보. ‘[최홍렬 기자의 진심] 50년 만의 옛집 툇마루… 의사 詩人 눈물이 그렁그렁’(2015.5.2.)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4월 9일, 백형찬(라이문도, 전 서울예대 교수)]



225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