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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제주교구 116년 전 하논성당 복원의 꿈: 제주 산남지역 신앙의 못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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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8-11 ㅣ No.1568

[신앙의 땅] 제주교구 116년 전 하논성당 복원의 꿈


제주 산남지역 신앙의 못자리 ‘하논성당’

 

 

- 하논성당 복원도.

 

 

제주교구 서귀포성당의 전신인 116년 전 하논성당을 복원하기 위한 움직임이 본당 신자들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다. 제주 산남, 서귀포시 지역 신앙의 못자리 하논성당은 역사 속의 한논(大沓)성당이다. 1899년 제주 땅에 처음 설립된 제주성당에 이어 한라산 남쪽에 처음으로 세워진 제주 교구 둘째 본당으로서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다. 1900년대 초가였던 본당의 옛 모습을 설계해 미니어처를 만들고 서귀포성당 안에 있는 하논역사기념관에 전시해 놓고 있다.

 

서귀포지역에 천주교 신앙이 전파된 것은 먼저 신자들에 의해서였다. 육지를 왕래하던 양용항(베드로)과 이 라우렌시오가 1898년 4월경 세례를 받고 고향에 돌아와서 양 베드로의 고향인 대정군 색달리(현 서귀포시 색달동)를 비롯해 제주 전 지역을 대상으로 신앙을 전하면서부터이다. 이후 1899년 4월22일, 제8대 조선교구장 민 아우구스티노(G. Mutel, 閔德孝) 주교는 제주 지역에 프랑스 선교사인 페네(C. Peynet, 裵嘉祿) 주임신부와 보좌인 김원영(아우구스티노) 신부를 파견해 제주성당을 설립했다.

 

- 대구대교구 성직자묘역의 타케 신부 묘소.

 

 

제주에 들어온 김원영 신부는 한국인 성직자로서 초기 전교 활동을 전담하다시피 하면서 서귀포시 한논을 중심으로 대정군과 정의군을 중심으로 활동한 결과 1900년 5월경에는 신자 수 20명, 예비신자 30명으로 증가했다. 김원영 신부는 1900년 6월12일, 제주성당을 떠나 한논(서귀포시 호근동 194번지)에 정착하게 된다. 바로 ‘한논본당’의 설립이다. 1901년 신자 수는 137명(정의군 101명, 대정군 36명), 예비신자 620명(정의군 382명, 대정군 238명)으로 급증했다.

 

 

신축교안으로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살해당해

 

하지만 이러한 교세 확장은 1901년 5월에 발생한 신축교안(일명 이재수난, 제주민란)으로  커다란 시련에 봉착했다. 이재수의 난, 제주민란으로 명명하기도 하는 이유는 당시 제주지역 세금 징수와 관련된 학정과 천주교 전파 과정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민중이 봉기한 사건이라 보는 입장이다. 하지만 제주교구에서는 이 사건이 조선시대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공식적으로 끝난 뒤에 일어났다는 점, 박해나 민란의 요소가 공존하며 그 여파가 외교적인 문제로 비화되었다는 점을 중시한다. 그리고 사건 배경과 그 과정에 교회와 일반 민중 간의 갈등 발생과 제주사회의 특성, 교회의 복음 전파에 대한 열망 등 복합적인 요소가 내포되었다는 의미에서 ‘신축년 교안(신축교안)’이라 함이 타당한 것으로 결론짓고 있다.(‘제주천주교회100년사’ 참조)

 

1901년 5월, 토착지주 세력 비호를 받는 상무사와 천주교인들이 조세문제로 충돌하게 되었고, 무장한 민란 주동자들이 앞장서서 제주목으로 진격해들어와 제주성을 함락시키고 관덕정 앞에서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살해당하면서 신앙을 버리지 않은 채 순교했다. 민란이 진압될 때까지 당시 제주 신자 수 1000명 중에 800∼900명가량 피살된 것으로 이야기되기도 하지만 평리원 검사가 공식적으로 집계해 작성한 희생자 317명 가운데 천주교 신자만 309명이었다. 제주목관아 관덕정 앞에 널려있던 시신은 제주시 소재 별도봉과 화북천 사이에 가매장되었다. 시일이 지난 1903년 4월29일, 협의를 거쳐 매장지가 황사평(현 제주시 화북2동 황새왓, 황사평성지)으로 선정되면서 같은 해 11월에 신축교안 희생자들의 유해가 모두 이곳으로 옮겨 안장되고 장례식을 치렀다.

 

신축교안 혼란기에 한논성당은 2대 주임 문 제르마노(G. Mosset, 文濟萬) 신부에 이어 1902년 4월20일, 3대 주임 엄 에밀리오(E. Taquet, 嚴宅基) 신부가 부임했다. 이때 신자 수는 35명으로 급감해 있었다. 전교활동에 어려움을 느낀 타케 신부는 1902년 6월17일, 서귀포 홍로지역으로 본당을 이전해 ‘홍로성당(현 서홍동 면형의 집)’ 시대를 열었다. 타케 신부는 1915년까지 재임하면서 본당 정착과 지역 선교를 위해 노력을 기울여 1904년에는 신자수가 101명으로 늘었고 지속적인 선교로 신축교안 이전의 교세를 회복했다.

 

특히 재임 기간 중에 제주지역 식물채집 작업을 하면서 왕벚나무(천연기념물 제156호)를 비롯해 애기나비나물, 능수버들, 산버들, 섬잔대, 한라산 구상나무 등을 유럽학계에 보고한 식물학자로서도 이름을 남기고 있다. 이후 1937년 8월15일, 제10대 주임 나 토마스(T. D. Ryan 羅) 신부에 의해 현재 ‘서귀포성당’ 자리로 이전하면서 명칭을 변경,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논성당 옛터를 중심으로 10.8km의 성지순례길 조성

 

하논성당의 홍로 이전 후 하논 마을은 쇠락의 길을 걸어야 했다. 결국 1948년 제주 4.3이 일어나자 당시 토벌군에 의해 주민 100여 명(가옥 16채)이 소개(疏開)되면서 오늘날까지도 ‘잃어버린 마을’인 채 남아 있다. 그로부터 60여 년이 흐른 지난 2010년 ‘서귀포성당 설립 110주년 뿌리 찾기 사업’의 일환으로 하논성당터 발굴과 초가성당 복원 추진에 돌입하기로 본당 신자들의 뜻을 모았다.

 

먼저 하논성당 옛터를 중심으로 하는 성지순례길을 조성해 지난 2013년 4월20일, 교구장 강우일 주교에 의해 ‘김대건길’에 이은 제주교구 두 번째 순례길로서 ‘하논성당 순례길’을 공식 선포했다. 지난 4월17일에는 ‘타케신부기념사업추진위원회’도 결성해 다양한 사업을 펼쳐나가기로 했다.

 

- 한라산이 바라보이는 하논분화구.

 

 

하논성당 순례길은 서귀포성당에서 출발한다. 성당을 바로 나가면 작가의 산책길, 칠십리시공원으로 이어지고 예술의 전당 - 하논돌담길 - 하논성당터 - 하논분화구 - 담쟁이길 - 선반내 - 흙담소나무길 - 후박나무길 - 홍로마을길 - 면형의집 - 서홍과수원길 - 복자성당 - 서귀포시 1호광장 - 복자성당터 - 매일올레시장 - 이중섭문화거리 - 서귀포성당까지 다시 돌아오는 코스이다.

 

10.8km에 이르는 순례길은 그야말로 다양하고 아기자기하다. 교회의 역사는 물론 서귀포의 매력, 아름다운 자연과 역사·문화예술·생태환경·사람들의 삶 등을 다양하게 만날 수 있는 길이다. 그 의미를 더욱 잘 살려내기 위해 서귀포성당에서는 순례자들을 안내는 하논성당길 해설사를 양성해 현장에 투입하고 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6년 8월호, 안창흡 프란치스코(제주 Re.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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