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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ㅣ복음화

선교와 문화: 현대 세계의 종교적 흐름: 세속화, 근본주의, 뉴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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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11-12 ㅣ No.378

[선교와 문화] 현대 세계의 종교적 흐름: 세속화, 근본주의, 뉴에이지

 

 

밀레니엄이라는 새 천년기의 변화 속에 기존의 질서와 가치 체계가 도전받고 있다. 그중에서 종교가 변화의 가장 큰 관건이다. 형태와 내용에 있어 크게 변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고 어떤 부분에서는 이미 변화가 시작되었다. 그 변화의 세 가지 축을 꼽으면 세속화, 근본주의, 뉴에이지이다. 각각 독립된 주제이면서도 상호 연결되어 있는 내용들이다. 이런 현상들을 직시하지 않으면 미래 후손들은 하느님의 영역을 의심하거나 종교적 제도에 의문을 제기할 지경에 이를지 모른다. 이 세 가지 종교적 흐름을 살펴보자.

 

 

* 먼저 세속화 현상을 보자. 물론 세속화는 어제오늘 일만은 아니다. 실제 종교가 위치하는 곳은 성(聖)과 속(俗) 양자 사이의 어디쯤이다. 인간이 영적인 가치를 따라가면 성의 영역이 넓어지고, 세속의 가치를 우선시하면 속의 영역이 넓어지는데, 세속화란 바로 세상에서 하느님의 영역이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것을 말한다. 곧 종교가 지니는 영적 가치보다 육체적, 물질적 가치를 더 우선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과거 신앙인들에게 주말은 신앙을 통해 신과 함께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주5일 근무제 실시 이후 주말은 운동과 여가 활동의 시간으로 바뀌었다.

 

산업화와 과학화를 통해 인간은 창조주의 영역을 넘보기 시작했다. 시공의 탈성화(脫聖化) 현상은 극단적인 인본주의 경향을 노출하면서 속에 다가갔다. 신의 영역이 자꾸만 줄어들더니 어느 날 “신은 죽었다”고 외치자 사람들은 이제 신에게서 해방되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를 무서워하던 한 학생이 아버지가 출장을 가자 해방감에 쾌재의 콧노래를 불렀다. 아버지의 존재와 가치가 집안에서 제거되기를 바라는 이 아이와 하느님의 눈길이 느껴지지 않는 자유로움을 추구하려는 현대인들이 무엇이 다를까? 세상에서 하느님이 설 자리가 점점 없어지고 있다. 하느님이 창조하지 않은 생물들이 인간의 조작으로 생겨나 창조 질서가 어지럽혀진다. 한 나무의 뿌리에서는 감자가 열리고 줄기에서는 방울토마토가 열리기를 희망하는 세대이다. 황금을 좋아하다 껍질마저 샛노란 황금수박을 만들었다. 신의 비밀로 여겨지던 유전자 지도도 해석해 냈다. “하느님! 만약 계시더라도 안 계신 것처럼 조용히 계셔 주십시오. 우리 인간들, 잘 해낼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현대인은 세상을 인본(人本)의 영역으로 축소시켜 버렸다. 어느 광고 문구가 이를 잘 나타낸다. “기술이 인간을 자유롭게 하리라.” 신의 축복이 아니라 인간의 능력으로 인간이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바로 세속화이다.

 

 

* 종교적 근본주의는 신앙의 이데올로기이다. 자신의 신념과 행동을 고정시켜 타인에게 강요하는 행위를 이데올로기라 한다. 일반적으로는 보수 경향을 띤 사람들이 미래와 진보에 대한 극단적인 염려 속에 과거 지향적 광신을 주장하면서 생기는 현상이다. 경건주의와 신비주의적 경향이 농후한 이 사람들은 세상의 흐름에 더디고 변화에 둔감하여 현대 질서와 가치 체계, 곧 자유, 개성, 개인, 대화, 쇄신, 쾌락, 물질 등에 대해 극단적인 혐오감을 보인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루카 5,39)

 

동서의 냉전이 사라진 현대 세계에서 종교적 근본주의가 문제되는 것은 두 근본주의, 곧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충돌이다. 새 천년 벽두부터 이 양대 세계의 근본주의자들은 세계 여러 곳에서 폭력, 테러, 전쟁 등을 벌이고 있다. 9.11테러, 보복 전쟁, 탈리반, 민족 청소, IS의 폭력과 문화 혁명, 무함마드 만평과 그에 따른 만평성전 등이 그것이다. 이런 현상이 대두되는 이유는 신이슬람 세력의 증가와 확대 때문이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이 시대를 제2전성기로 인식하고 있다. 특히 유럽에서 뚜렷이 나타나는 이슬람 인구의 증가는 ‘이슬라모포비아’(이슬람 공포증)라는 신조어까지 낳고 있다. 현재 전 세계 이슬람 인구는 약 16억 명으로 보고 있는데, 세계 인구의 25%를 차지하면서 종교의 두 번째 위치를 확보했다. 2025년이 되면 무슬림이 20억 명이 되어 세계 인구의 30%를 차지하며 첫 번째 종교로 부상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이러한 현상에 그리스도교 근본주의자들은 위기의식을 표출하면서 그리스도교 근본주의로 맞불을 놓고 있다.

 

 

* 다음으로 직시해야 할 문제는 뉴에이지이다. 뉴에이지는 그리스도의 존재와 가치를 제거하려는 신영성운동이다. 21세기의 새 시대 별자리는 물병좌이다. 한 남자가 물병을 기울여 물을 붓는 모습의 별자리이다. 과거 물고기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였다면 이제는 지나갔다는 것이다. “새로운 정신이 필요하다. 새로운 가치가 새 시대에 부어지고 있으니 새 포도주를 마셔라. 새 포도주가 새 부대에 담겨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뉴에이지 추종자들이 말하는 가치와 정신은 인간의 자아 성취를 말한다.

 

뉴에이지는 현상이다. 현상이니 표면적으로는 종교적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영화, 음악, 춤, 연극, 명상 등의 새로운 문화 현상이 뭐 그리 큰 문제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신과의 합일, 자연주의, 반전 평화 운동 등은 더욱 그렇다. 수녀원이나 신학교에서 아침 묵상 시간에 조지 윈스턴의 피아노곡이나 엔야의 음악을 틀어 놓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겉으로 들리는 느낌은 평화스럽고 잔잔하니 영혼이 고양되는 것 같고 평화로운 마음이 솟아나는 것 같다. 그러나 뉴에이지 문화의 폐해는 생각보다 깊고 넓다.

 

그렇다면 뉴에이지 현상은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말인가?

 

종교는 마음의 평화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종교와 신앙의 가치와 역할에 대해 잘못 생각하지 말라는 충고의 말씀이다. 타볼산에서 느낀 평화, 신비, 안락함, 아름다운 자연은 인간이 종착해야 되는 가치가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의 여정에 이르는 하나의 에피소드일 뿐이다. 이것에 취해서 천막을 치고자 하는 베드로 사도를 주님께서는 사탄이라고 부르셨고, 엄하게 꾸짖으시며 내려가자고 말씀하신다. 이 뜻은 인생은 참된 평화와 행복, 평안과 휴식만을 취하는 상태가 아니라 계속 나아가야 하는 ‘파스카적 존재’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뉴에이지의 음악이 지친 삶의 현장에서 돌아와 잠시 듣는 음악이라면 그리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추구하는 가치가 무사안일이요, 나만의 평화라면 수도자의 삶은 사치일 수 있다. 삶의 현장에서 겪는 땀과 노력, 경쟁, 위험, 불안 등이 빠진 위안, 평안, 휴식, 영혼의 고양은 자기 속임수일 수 있다. 뉴에이지 음악을 듣다가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들어 보아라. 삶이 그렇게 녹녹한 게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신만을 위한 세계에서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고, 그 신이 바로 나 자신 안에 있다고 말하는 뉴에이지 추종자들의 정신세계는 바로 극단적인 이기주의, 불간섭주의, 무정부주의, 무신론적 유물사관인 것이다. 그들에게는 공동체, 친교, 희생, 사랑이라는 가치와 질서가 우습게 들릴 것이다. 내가 구축해 놓은 재물과 시스템에 해를 입힐까 두려워 통일, 민족의 화해와 공존, 공영이라는 가치를 외면하는 기득권자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뉴에이지의 추종자가 된 셈이다.

 

미래 세대에 종교가 어떤 형태로 다가올지 걱정된다. 종교의 변형과 세속화는 불 보듯 뻔한데, 거기에서 종교가 어떤 모습으로 생존을 추구할 것인지는 미지수이다. 그 변화의 추이를 지켜보며 올바로 대처해야 한다.

 

[땅끝까지 제90호, 2015년 11+12월호, 김병수 대건 안드레아 신부(한국외방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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