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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부활 제5주간 토요일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

수도 ㅣ 봉헌생활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인보성체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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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7-02-13 ㅣ No.40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인보성체수도회 (상)

 

 

인보성체 수도회 초창기 회원들이 족두리를 쓰고 허원식을 갖고 있다.

 

 

창설과 역사 

 

 "이웃과 같이 웃을 수 있는 동정이 있고, 타인을 보살펴주는 일에 언제나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고, 내가 먹고 싶은 것도 남이 먹도록 하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천국의 행복이 우리에게 있으리라"(1963년 8월 인보회지 '내 재산은 극빈자, 병자들이다' 중에서)가진 것 없고 돌보아줄 이 없는 이들, 가장 낮은 곳에서 소외된 이들을 한가족으로 껴안은 인보성체수도회 수도자들. 그래서일까. 전주 시내 한켠에 자리잡은 인보성체수도회 본원에 들어서자 여느 평범한 가정집 안방에 들어온 것 마냥 편안함이 풍겼다. 수녀들도 서로를 언니 동생으로 부르며 가족애를 나누고 있었다.

 

인보성체수도회(총원장=박승애 미카엘라 수녀)의 시작은 4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윤을수(라우렌시오, 1907~1971) 신부는 경기도 부천에 골롬바사(社)를 설립하고 전쟁고아들을 위한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이것이 윤신부가 사회복지 사업에 뛰어든 첫 계기였다. 또한 그는 더욱 적극적인 사회복지사업을 펼치기 위해 인보성체수도회를 창설하게 된다.

 

1932년 사제품을 받은 윤을수 신부는 한국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제였다. 그는 학위 취득 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문화원 교수를 역임, 일제치하에서 해방된 한국으로 돌아와 성신대(현재 가톨릭대학의 전신) 학장을 맡으며 국내외에 그 학식을 떨쳤다. 특히 한국어판 '준주성범'을 발간하고 많은 호교 논문과 성서연구 논문을 발표하는 등 학자로서의 큰 업적을 남겼다.

 

이렇게 학자신부로서의 길을 걷던 그가 스스로도 생각하지 못했던 사회복지사업에로 뛰어든 것은 한국 전쟁 때문이었다. 전쟁 중에도 서울에 남아서 공산주의자들의 눈을 피해 지하교회를 이끌고 있던 윤신부는 시민들을 안전하게 피난시키는데 큰 노력을 기울였고, 그의 관심은 자연히 버려진 고아들에게로 모아졌다. 1953년에는 한국 가톨릭 사회사업협회(Caritas Coreana, 현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의 전신)를 설립, 초대회장을 역임했다.

 

윤신부가 더욱 적극적이고 체계적인 사회복지사업에 나서게 된 것은 1956년 서독 뮌헨에서 개최된 국제사회사업가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한 후부터였다. 유럽 선진 국가의 사회사업이 양로원 보육원 무료급식소와 같은 형태의 자선사업에서 벗어나 지역사회복지 및 개발 위주의 사회사업으로 전환되는 모습은 큰 감명을 줬다. 그는 자선사업이나 소규모 시설 사업의 형태에 머물러 있는 한국 사회사업도 광범위한 사회복지사업으로 전환돼야 함을 절실히 느꼈다.

 

그리하여 1956년 11월 19일 골롬바사 내에 사회사업 전문인재를 양성하는 구산후생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이곳의 학생들은 졸업 후 사회사업과 함께 전교활동도 할 수 있도록 교리신학, 윤리신학, 전례, 영성신학, 교회사, 라틴어, 종교음악 등의 과정을 수료했고, 주말에는 보육원, 산간벽지 등에 나가 현장 실습을 했다. 윤을수 신부와 당시 정부는 장차 이 학교가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사업 전문대학으로 발전되길 기대했다.

 

이듬해 3월 1일에는 구산후생학교 내에 수도 성소자를 중심으로 수도반을 별도로 편성해 인보성체수도회의 회원 양성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수도회는 1958년 6월 5일 서울교구장 노기남 대주교로부터 서울교구 소속 수도회로 인가를 받고 같은 날 24명이 첫 서원을 했다. [가톨릭신문, 2002년 2월 24일, 주정아 기자]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인보성체수도회 (중)

 

 

영성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여야 한다"(요한 13, 14~34),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 36)인보성체수도회는 그리스도의 이 말씀에 따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루가 10, 30)들에게 인보의 덕을 실천하는 사회사업과 복음선포에 협력함으로써 시대와 지역교회 요구에 응답하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헌신한다(인보성체수도회 회헌 1장 2절).

 

인보성체수도회의 수도생활은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극진한 사랑과 봉사의 정신에서 이어진다. 수도생활을 뒷받침하는 가장 근본적인 영성은 성체성사의 나눔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온전히 내어 주신, 또한 우리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의 그 모습이 수도생활의 표양이 된다. 당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주시는 성체성사를 통해 요구호자(要求護者)를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의 사랑, 이것이 바로 인보정신이다.

 

즉 인보(隣保)정신은 모든 인간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행복을 공유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이나 환자들을 물질로써만 지원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정신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누군가를 돕는 것은 단순히 물질적인 무엇을 제공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앞에 무릎꿇고 발을 씻기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가진 것의 여분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를 주인으로 받들어 돕는다. 더불어 그들의 인격을 최대한 존중해주는 것이 인보사상의 핵심이다.

 

발을 씻어줄 대상은 도움을 필요로하는 모든 사람들이 된다.

 

창설자 윤을수(라우렌시오) 신부는 무엇보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한 형제, 자매라는 평등주의를 강조했다. 모두가 평등하며 인격을 존중받을 대상이라는 것이 사회복지사업의 기본이 된다. 따라서 수도회의 가장 큰 이웃사랑 실천은 사회복지사업에 헌신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윤을수 신부는 사회사업은 복음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사업 그 자체라고 생각했고 사랑이 있는 진정한 신앙생활을 하는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윤신부는 무료급식,겲渶?보육원과 같은 형태로 운영되는 소규모 시설 위주의 자선사업적 사회사업에서 벗어나, 인권의식의 발전과 더불어 생활력이 없는 이들이 국가 등을 통해 생활력을 얻을 수 있는 권리를 내포하는 적극적인 사회사업으로 나아갈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

 

특히 우리 민족에게 복음말씀을 들려주지 못하는 것은 성직자와 수도자의 부족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것을 보충하기 위하여 급선무로 필요한 것이 전교사업을 보조할 수 있는 사회사업가 또는 전도사의 양성기관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러한 견지에서 사회사업을 전교의 보조사업의 위치에 두면서 이를 실천할 기구를 조직하고자 하는 진보적이고 적극적인 생각을 보였다. 윤신부는 이 과제를 교황청 본부 천주교 사회사업 국제연합회에 호소했고, 1956년 한국 최초로 사회사업을 전문으로 하는 구산후생학교를 설립하게 됐다.

 

윤을수 신부는 수도생활의 규칙을 마련하면서 특히 수도자의 잘못된 특권의식을 버리도록 했고, 수도복이나 규칙은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것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수도복도 굳이 입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으나 수녀들의 바람으로 수도복을 마련하게 됐다. 또 회원들 서로간에는 '언니'라고 호칭하여 한국적이며 가정적인 분위기 안에서 서로 지내게 했다. 이는 당시 수도자들에게는 획기적이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했다. [가톨릭신문, 2002년 3월 3일, 주정아 기자]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인보성체수도회 (하)

 

 

야유회를 통해 인보성체 수도회 회원들이 서로 간의 우애를 다지고 있다.

 

 

사도직 활동

 

인보성체수도회의 사도직활동은 특별히 한계를 지우고 있지 않다.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떤 형태로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한 활동이 모두 수도회의 활동이다. 그들이 누구이든 관계없고,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은 그 시대의 필요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될 수 있다.

 

수도회 설립 당시에는 전쟁고아들을 돌보는 것이 가장 큰 일이었다. 이후 창설자 윤을수 신부가 나환우 보호시설인 '성 라자로 요양원(현 라자로 마을)'원장을 맡으면서 함께 활동했고, 사제가 없는 도서지역이나 공소로 수녀를 파견, 낮에는 농사일을 돕고 저녁에는 교리를 가르쳤다. 또 지역사회복지를 위해 개간·간척사업도 함께 했다. 그때는 본당신부가 없는 곳에 수녀를 파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지만 수도회에서는 사목적 혜택에서 소외되기 쉬운 오지의 이웃을 먼저 선택함에 있어 망설이지 않았다.

 

70년대 들어서는 교리교사로서의 임무가 큰 몫을 차지했다. 당시 전국 교사들의 반 이상이 인보성체수도회 수녀들이었다. 80, 90년대에는 선교사들에게 이 자리를 내어주고 주로 어린이 교육과 여성복지를 위해 노력했다. 어린이들을 위한 탁아소, 유치원, 학교 등의 운영은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늘려갔다.

 

수도회의 활동은 해외 선교에서도 발빠른 모습을 보여왔다. 1960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경로수녀원에 수녀를 파견한 이후 양로사업과 보육사업 등을 위해 미국 엘가온에 분원도 설립했다. 특히 인보성체수도회는 한국교회에서 최초로 1989년 4월 페루에 선교수녀를 파견, 현재 원주민 직업학교와 유아원을 운영하고 있다. 또 미국과 독일에 수녀를 파견한데 이어 80년대 말부터 일본 교포 양로원과 미국 위치타 교구 양로원에 회원을 파견하는 등 해외선교활동을 강화하고 있다. 최근에는 중국과 북한 선교를 위한 수녀 양성 등에 힘을 싣고 있다.

 

현재 인보성체수도회에서 가장 큰 관심과 활동을 보이고 있는 부분은 노인과 장애인 복지. 사회변화와 지역사회의 필요에 응답해 기존의 성모 조산소는 무의탁 할머니들의 보호시설인 인보의 집을 변경, 운영하고 있다. 또 90년대 이후 뇌성마비 중증 장애인 요양시설인 '성 요한의 집', 행려자 보호시설인 '사랑의 집', 양로원 '인보마을', '인보노인종합복지관' 등을 마련해 장애인과 독거노인 등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한편 10여년 전부터는 신앙의 약화를 심각하게 우려, 신앙을 가장 처음 접하게 되는 가정의 성화를 위해 특별한 관심과 활동을 보이고 있다. 수도회에서는 칠레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있는 가정 교리를 도입, 우리 문화와 정서에 맞게 연구개발해 각종 책자 등을 펴냈다. 또 가정교리관련 책 발간과 세미나 등을 지속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최근에는 특히 가정에서 전담하기 어려운 청소년들의 교육을 위해 주말 프로그램 등을 펼칠 수 있는 청소년 교육센터 건립을 추진 중이며, 각종 프로그램도 개발 연구 중이다.

 

현재 인보성체수도회는 종신서원자 300여명, 유기서원자 60여명의 회원(2000년 말 현재)이 각종 교육과 사회사업을 비롯해 13개 교구 72개 본당, 국외 3개 본당에서 사도직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인보정신을 바탕으로 시대의 필요에 따라 다양한 사회사업과 복음전파에 힘을 다하는 인보성체수도회.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 안에 평등하고도 성숙된 삶을 꾸려나가는데 이바지하고자 하는 노력과 희망이 공동체의 기도 소리와 함께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2년 3월 10일, 주정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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