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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에서 평화를 찾다3: 학살로 얼룩진 중세 고도 모스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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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5-28 ㅣ No.369

[발칸에서 평화를 찾다] ③ 학살로 얼룩진 중세 고도 모스타르


전후 20여 년… ‘불안한 평화’에 매일 평화 위해 기도

 

 

- 1993년 11월 붕괴됐던 중세 이슬람 양식의 아치형 스타리모스트 다리는 2004년에 복구돼 이듬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세르비아군의 봉쇄를 견디다 못한 사라예보 시민들은 지하에 굴을 팠다. 무너지면 다시 파고, 버팀목을 세우고, 계속 파나갔다. 그러길 얼마나 했을까, 1993년 중반에 시 외곽 나토군 주둔지까지 2.7㎞ 땅굴이 이어졌다. 이 지하도가 그 유명한 ‘사라예보 터널’이다. 이 터널을 통해 연간 2000만t의 식량이 사라예보로 들어가 50만 명을 먹여 살렸다.

 

 

내전… 인간의 고귀함 체감

 

사라예보를 탈출한 시민들이 걷고 걸었을 디나릭 알프스 터널을 지나 헤르체고비나로 들어섰다. 헤르체고비나에선 내전의 고통을 실감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곳곳에 널린 폐가 때문이다. 내전 당시 세르비아군의 화학무기 사용 의혹을 증명이라도 하듯, 수십㎞를 달려도 먹을 것도, 마실 물도 없고 농사도 지을 수 없는 폐허가 됐다. 애초 세르비아군과 무슬림ㆍ크로아티아연합군의 전투로 시작됐던 보스니아 내전은 곧 인종과 종교 전쟁으로 확전됐다. 

 

내전 때 크로아티아계 비밀 군 부대장으로 5년간 복무한 요시프 오다크(51)씨의 증언이다.

 

“전쟁은 우리가 원한 게 아니었지요. 적군이었지만, 원수도 아니었지요. 수백 년을 같은 땅에 함께 살아온 이웃끼리 피를 흘린 겁니다. 그래서 저는 늘 부대원들에게 당부했어요. 기도하자고요. 절대로 약탈하지 말고, 성폭행도 하지 말고, 가톨릭 신자로서 살아가라고 주문했어요. 평생 갈 전쟁은 아니니까, 힘을 내자고 격려했어요. 인종청소까지 당하는 극한 상황에서 벌레처럼 살았지만, 인간의 고귀함을 더 간절하게 체감했습니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 위해 기도하고 있다

 

짧은 인터뷰 끝에 그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보스니아의 형제들이 기도한다는 걸 꼭 기억해 달라”고 말했다. 오다크씨의 이 말은 발칸을 취재하고 돌아온 이후에도 내내 귓전을 맴돌았다.

 

- 15세기 이슬람 양식의 상가가 그대로 보존된 모스타르 구시가지.

 

 

사라예보에서 서남쪽으로 129㎞ 떨어진 아름다운 중세 고도 모스타르(Mostar)에 들어선 것은 출발한 지 3시간이 지난 뒤였다. 모스타르는 크로아티아어로 ‘오래된 다리’라는 뜻. 도로에서 내려 비좁은 사잇길로 내려가니 곧바로 옛 이슬람 상가인 쿠윤질룩 거리다. 상가 가판엔 이슬람 특유의 잡화와 실크가 있고 호객이 뒤따른다. 

 

골목을 돌아서자 이슬람과 가톨릭 마을을 동서로 잇는 ‘스타리모스트’(Starimost) 다리가 나온다. 1566년 이 지역을 점령한 오스만튀르크가 만든 길이 30m에 폭 5m, 높이 24m의 아치형 다리다. 다리에 서니 네레트바 강 협곡 사이로 숨 막힐 듯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진다. 하지만 이 다리는 1993년 11월 폭격으로 무너졌다. 이슬람 모스크 9개도 이때 파괴됐다. 다리는 강 속에서 석재 파편 1088개를 건져 올려 2004년 7월에야 복구했고, 2005년 구시가지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 상흔은  씻은 듯하다. 하지만 다리에는 ‘Don‘t Forget 1993’, 곧 1993년을 잊지 말자는 표석이 남아 그날의 상처를 드러낸다. 

 

스타리모스트 다리를 건너 사거리를 지나 서쪽으로 향하면 성 프란치스코 성당이 나온다. 모스타르 교구의 주교좌성당이다. 내전 당시 파괴된 성당과 종탑을 다시 지었다. 그런데 오스만튀르크 통치 당시 종탑을 모스크보다 낮게 지을 것을 강요했던 걸 되갚고자 모스타르 전역 어디서나 볼 수 있도록 높게 지었다.

 

모스타르교구 성 프란치스코 주교좌성당.

 

 

가톨릭 공동체, 치유의 길로   

 

가톨릭 공동체는 그러나 내전의 상처를 다 씻지 못했다. 여전히 재건축 중인 성당과 같이 치유의 길을 걷고 있다. 성당에 들어가 짧은 기도를 바치고 나오려니 문앞에 2차 세계대전 직후 모스타르가 공산화된 1945년 2월 6일 순교한 66위의 사진이 한데 걸려 있다. 대부분 모스타르교구 신학교 교수 신부와 부제들, 성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이다. 

 

“십자가에 침을 뱉으면 살려주겠다”는 말을 한마디로 거부하자 공산주의자들은 이들을 방공호에 몰아넣고 화형에 처했다고 한다. 일부는 스타리모스트 다리에서 떨어트려 죽이는 바람에 시신도 찾지 못했다. 지하에 들어가니 일부 벽면에 보스니아 내전 당시 파괴된 모스타르교구 성당 사진이 60여 점이나 걸려 있다. 전쟁은 끝났지만, 전쟁은 여전히 내연하고 있었다.

 

 

[인터뷰] 내전 중 크로아티아계 포병으로 복무한 보르슬라프 칠리치씨

 

“전쟁이 끝난 지 20년이 넘었지만, 내일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보스니아의 현실이죠. 그래서 날마다 평화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20여 년 전, 40대를 전후해 참전, 포병으로 복무한 보르슬라프 칠리치(62)씨는 여전히 불안해 했다. 지금도 여전히 영토의 49%를 세르비아계의 스프르스카공화국(RS)이, 51%를 이슬람계와 크로아티아계가 연합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화국(FBiH)이 연방을 이룬 채 대통령과 군, 경찰을 따로따로 유지하는 ‘불안한 평화’ 체제이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세 분의 대통령이 대통령위원회를 두고 8개월마다 의장을 맡아 대통령직을 수행함에도 세르비아계와 크로아티아계가 독자 국가와 자치 공화국을 수립하겠다고 해서 날로 군사적 긴장이 높아가고 있다”고 귀띔했다. 

 

전쟁 당시를 회고한 그는 “사라예보 봉쇄 당시 영하 30℃의 겨울을 식량도, 전기도, 물도, 약도, 의료진도 없이 견디면서 전쟁 전 18%에 이르던 사라예보의 가톨릭 신자가 전쟁이 끝난 뒤엔 2%밖에 남지 않았다”며 “사지를 벗어나 전쟁을 하면서도 우린 얼마나 평화를 원했는지 모른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전후 복구과정에 대한 불만도 털어놓으며 “전후 EU에서 보스니아에만 1500만 유로를 지원했는데, 그중 1200만 유로는 정치인들의 손아귀에 들어갔다”면서 빈부격차 또한 전쟁의 불씨가 되지 않을지 불안해 했다. 

 

그는 “평화에 대한 중요성을 더 몸으로 느끼며 살아간다”면서 “이를 위해서 특히 평화를 위해 가정 기도에 더 충실해지려 노력한다”고 덧붙였다.

 

[평화신문, 2016년 5월 29일, 글ㆍ사진=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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