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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결손가정 어려움을 극복한 강완숙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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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3-25 ㅣ No.1457

[특별 연재] 이 시대, 순교신심에서 길을 찾다


결손가정 어려움을 극복한 강완숙 순교자



삶의 푯대를 상실한 현대인들은 인문학, 심리학, 과학의 문을 서성이며 길을 찾고 있다. 여기, 한평생 순교신심을 연구해온 손골성지 윤민구 신부는 신앙의 유산이 담긴 순교신심에서 삶의 방향키를 찾아 우리에게 들려준다. 올해는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의 시복이 이뤄진 기쁨의 해이다. 오는 8월 시복이 이뤄지는 강완숙 골룸바의 생애를 조망한다.


강완숙(姜完淑, 골룸바, 1760-1801) 순교자는 우리나라 천주교회의 최초 여회장으로 초기교회에서 많은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래서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분인데 결손가정이 많은 요즈음 강완숙 순교자의 가정에 대해 살펴보는 것도 필요하고 유익할 것이다.

1811년 조선 천주교 신자들이 북경 주교에게 보낸 <신미년 편지>에는 강완숙 순교자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강완숙 골롬바는 집안이 대대로 양반 가문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성품이 총명하고 지혜가 뛰어나 보통 사람들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또한 매우 강직하고 정직하여 도리가 아닌 일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강완숙의 아버지는 성격이 양순하였는데, 어머니는 까다로운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강완숙은 세상살이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여자로서는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고는 세상을 버리려는 생각에서 남자 옷을 짓기도 하였습니다. 비록 실천하지는 못하였으나, 그 성품이 어떠하였는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강완숙 순교자는 양반 집안에서 좋은 성품을 지니고 태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서얼(庶孼) 집안이었다. 당시 서얼 집안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미 인생에 어떤 주름이 잡혀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강완숙은 성장하여 덕산(德山)에 살던 홍지영(洪芝榮)의 후실(後室)이 되었다. 홍지영이 상처(喪妻)하여 재혼한 것이다. 결혼한 강완숙은 홀시어머니와 전실(前室) 아들 홍필주(洪必周, 필립보, 1774-1801)와 함께 살게 되었다.

위의 <신미년 편지>에 “강완숙은 세상살이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여자로서는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고는 세상을 버리려는 생각에서 남자옷을 짓기도 하였습니다”라고 쓰여 있는데 여기에 대해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 1775-1801)은 그의 백서(帛書)에서 다음과 같이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남편이 용렬하여 마음을 드러내고 이야기하지 않으므로 늘상 우울하고 답답하여 언제나 속세를 떠나려는 원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강완숙의 남편은 다정다감한 성격은 아니었던 것 같고 그래서 두 사람의 관계가 그리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강완숙은 결손가정에서 만날 수 있는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신미년 편지>에서는 ‘세상살이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가 없었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여성이 이혼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혼자 산다는 것을 세상이 허락하지도 않았고 친정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세상을 버리려는 생각에서 남자 옷을 짓고’, ‘속세를 떠나려는 원의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갑갑하고 어둡게 살던 강완숙 순교자가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되었다. 황사영의 백서는 여기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충청도 지방에 천주교가 처음으로 전파되자, 강(완숙) 골롬바는 ‘천주교’라는 석자를 듣고는 스스로 짐작하여 말하기를 “천주(天主)는 하늘과 땅의 주인으로, 그 종교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가 올바르니 그 도리도 반드시 참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이에 관한 책을 얻어 한 번 보고는 마음을 기울여 믿고 따랐습니다. 그녀는 총명한데다가 부지런하고 민첩하였으며 열심하였고 극기(克己)함이 뛰어나서 남들이 미치기 어려웠는데 온 집안은 물론 이웃과 인근 마을까지 힘써 교화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남장을 하고 출가(出家)까지 하려던 강완숙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고는 달라졌던 것이다. 강완숙 순교자는 마음을 다하여 믿었을 뿐 아니라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생각을 바꾸고 다른 사람들 특히 가족들을 대하였다. 그러면서 집안 식구들과 이웃들에게 신앙을 전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강완숙은 남편을 신앙에로 이끌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남편은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강완숙 순교자의 정성을 아는 시어머니는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여기에 대해 달레(Ch. Dallet)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강완숙 골롬바가 남편에게 천주교인이 되라고 권하면 그는 “옳아, 옳아”라고 말하였지만, 그 다음에 천주교의 적들이 이 종교를 비방하면, 그렇다는 뜻으로 머리를 끄덕이며 그들의 말을 전적으로 믿었다. 아내가 나무라면 눈물을 홀리며 자기 잘못을 뉘우치다가도 나쁜 친구들이 다시 그를 보러오면 전과 마찬가지로 행동하였다. 골롬바는 자신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성과도 올리지 못하였으며, 자기는 도저히 남편에게 진실한 마음으로 천주교를 실천하도록 만들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강 골롬바는 또 시어머니를 입교시키는 데도 전념하였다. 시어머니는 하느님을 섬기고 천주교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하였다.

시어머니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데는 강완숙 순교자가 며느리로서 자신이 해야 할 도리를 다한 것이 크게 작용하였다. <신미년 편지>는 이렇게 쓰고 있다.

시어머니는 다소 괴팍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강완숙은 효성 지극한 마음으로 시어머니의 뜻에 맞추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때로 시어머니와 뜻이 안 맞는 일이 있으면 부드러운 태도로 공손하게 시어머니를 설득하였기 때문에, 그럴 때마다 시어머니는 결국 강완숙의 의견을 따르게 되곤 하였습니다.

시어머니를 신앙으로 이끈 강완숙은 친정 부모에게도 신앙을 전하였다. 그러다가 신해박해(1791)가 일어났다. 그리고 박해로 인해 강완숙 순교자에게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강완숙 순교자가 집을 떠나 서울로 올라오게 된 것이다. 이때의 일을 달레 신부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시어머니를 신앙으로 이끈) 이 승리를 거둔 뒤 골롬바는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도 입교시켜, 이들은 둘 다 모범적으로 세상을 떠났다. 1791년의 박해가 일어나자, 강 골롬바는 음식을 만들어 옥에 갖다줌으로써 신앙 증거자들을 도왔다. 그러다가 강 골롬바는 붙잡혀 홍주 목사 (洪州牧使) 앞에 끌려나갔다. 그의 신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아무 형벌도 당하지 않고 배교한다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석방된 모양이다. 얼마 안 있어 강 골롬바는 남편에게 전답을 보살피도록 맡긴 다음, 그와 헤어져 시어머니를 모시고 자기 딸(즉 홍순희 루시아)과 남편의 전처 아들 홍필주 필립보를 데리고 서울로 와서 살았다.

1801년 체포된 강완숙은 문초를 받으면서 이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저는 천주교 서적을 (예산에 사는) 공씨라는 과부에게서 배웠습니다. 신해년(1791년)에 윤지충이 전주 감영에 갇혔을 때 제 이름이 죄수의 진술에서 나오자 포졸들이 천주교 서적을 수색하여 가지고 갔으며. 남편에게는 집안을 다스리지 못한 죄를 적용하였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저를 내쫓았으며 다시는 서로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천주교에 대한 박해로 자신에게 피해가 올 것을 두려워 한 남편은 강완숙에게 배교를 하던지 집을 떠나라고 요구했다. 이제 겨우 결손가정의 어려움을 신앙으로 극복한 강완숙 순교자에게 또다른 어려움이 들이닥친 것이다. 그러나 강완숙 순교자는 결단을 내렸다. 집을 떠나더라도 신앙을 포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남편과 결별하고 신앙생활을 더 잘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서울로 떠났다.

* 윤민구 도미니코 신부 - 1975년 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탈리아 로마에 유학하여 1983년 라떼란대학교에서 사목신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2003년까지 수원가톨릭대학교에서 강의하였다.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사무차장으로 일하였고 안성 대천동, 성남 수진동, 이천, 분당 야탑동성당 주임신부를 지낸 후 현재 손골성지 전담신부를 맡고 있다.

[외침, 2014년 6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윤민구 도미니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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