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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빵과 장미, 그리고 여성의 인권: 세계 여성의 날을 통해 본 여성의 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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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3-23 ㅣ No.1488

[경향 돋보기 - 빵과 장미, 그리고 여성의 인권] 세계 여성의 날을 통해 본 여성의 인권

 

 

인권이란 당연하게도 사람이 사람으로서 누려야 할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뜻하는 말이다. 생명의 안전이라든지 신체의 자유와 같은 권리,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 경제·사회·문화적으로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등은 인간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온전함을 보존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데 필요한 인권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돌아보면 모든 인간과 시민의 보편적 평등이라는 규범적 원칙이 작동하는 근대 시민 혁명 이후의 사회에서도 인권과 시민권을 아무런 제약 없이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가령 19세기만 하더라도 여성에게는 정치적 참여의 수단인 투표권이 부여되지 않았고 고등 교육, 재산 소유, 법적인 소송 등의 자격도 인정되지 않았다. 여성은 이성적 능력을 의심받았고, 무엇보다 자신의 행위를 책임질 수 있는 독립적인 ‘인격’(person)으로 인정받지 못하였으며, ‘여성이 있어야 할 자리는 가정’이라는 오랜 관념이 불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어디서나 일을 하면서 살아왔으나 산업화와 더불어 가정과 일터가 분리된 이후 불평등과 차별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실을 잣는 정방공(spinster)에게는 혼기를 놓친 ‘노처녀’란 뜻이 따라붙었고, 가정에서 무보수로 이뤄지는 돌봄 노동은 지금도 일이 아닌 소비 행위로 간주될 뿐이다. 하지만 19세기 이래 지구촌의 여성들은 각자의 자리와 저마다의 현장에서 억압과 차별에 맞서 인간의 존엄성을 주장하며 인권과 시민권의 평등을 향해 부단히 전진해 왔다.

 

오늘날 ‘3·8 세계 여성의 날’이 지구촌의 대표적인 기념일로 자리 잡게 된 배경에는 20세기를 통해 각국의 여성들이 펼친 실천이 자리 잡고 있다. 세계 여성의 날은 지난날의 특정 사건을 단순히 기념하는 날이라기보다 오히려 미래를 내다보며 현장을 증언하고 여성 인권의 의제를 새롭게 제시하는 행동주의적 실천의 날이자 연대의 축제로써 그 생명력을 유지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 여성의 날의 유래, 최초의 여성의 날

 

해마다 3월이 다가오면 국제 연합(UN)을 비롯한 국제 기구나 각국의 단체들은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하는 각종 행사를 공지하고 관련 정보를 제시하지만, 이 날의 기원에 관한 설명이 매우 달라 불일치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이는 세계 여성의 날의 유래와 관련하여 다양한 기원설이 공존해 왔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미국이나 일본에서 오랫동안 널리 공유된 세계 여성의 날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는 한국과도 차이가 있으며, 캐플런, 이토 세츠 교수를 비롯한 몇몇 연구자들이 지적하듯이, 구체적인 사실로 뒷받침되지 않는 신화적 전설 같은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다. 사료와 전거로 뒷받침되는 내용을 간추려 보면 아래와 같다.

 

세계 여성의 날은 여성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 조건을 개선하고자 여성 선거권의 획득을 촉진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최초의 단초가 주어진 곳은 미국이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미국은 유럽의 다양한 지역으로부터 가족 이민을 통해 이주한 노동자 가족이 증가하는 상황이었고, 그 가운데 상당수를 차지하는 여성들은 생계를 위해 섬유나 의류 산업 등에서 저임금의 장시간 노동을 감수해야 했다.

 

이처럼 산업 현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늘어남에 따라 노동 운동을 중시하는 사회주의자들은 자신의 삶의 조건을 결정할 수 없던 여성들의 제도적 권리 개선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에 1909년에 미국 사회당(SPA)은 전국여성위원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2월의 마지막 일요일(1909년 2월 28일)을 ‘여성의 날’로 선포하고 여성 선거권(투표권, vote for women) 집회를 개최하였다. 하지만 단수로 표현된 ‘여성의 날’(Woman's Day)은 그 자체로 특정한 의미를 갖는 기념일이 아니라 여성 선거권 집회를 열고자 임의로 선택된 하루였을 뿐이다.

 

 

이주민 여성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이 미친 효과

 

공교롭게도 1909년 11월에 뉴욕시에서는 의류 산업 여성 노동자들의 대대적인 파업이 자생적으로 일어났다. 흔히 ‘2만 봉기’(Uprising of the 20,000)라고 부를 만큼 파급력이 컸던 이 파업은 이주민으로 구성된 의류 산업 여성 노동자들의 힘겨운 투쟁을 지지하는 여성들의 폭넓은 연대 속에서 진행되었다.

 

미국 사회당이 1909년에 이어 1910년 2월에 여성 선거권 쟁취를 위한 ‘여성의 날’ 집회를 다시금 개최하게 된 것은 스스로 권리를 자각하고 존재감을 드러낸 여성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이 사회적 쟁점으로 부각되었던 당시의 사회적인 흐름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여성 노동자들의 수난은 그 뒤에도 이어졌다. 1911년 3월 뉴욕의 대규모 의류 업체인 트라이앵글 셔츠웨이스트사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140명 이상의 사망자가 나왔으며, 대부분의 사망자는 화재 안전장치가 마련되지 않은 건물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여러 나라의 여성들이 함께 기념하다

 

이처럼 선거권을 이슈로 개최된 ‘여성의 날’ 최초 집회의 효과는 여성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으로 말미암아 그 효과가 증폭되었고, 미국 여성들의 움직임은 유럽의 여성들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1910년 8월에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제2회 국제 사회주의 여성 회의에서는 클라라 체트킨 등의 발의로 모든 나라가 여성의 날을 함께 기념하자는 ‘국제 여성의 날’에 관한 결의가 채택되었다.

 

이에 1911년부터 독일, 오스트리아, 덴마크, 스웨덴 등 유럽의 나라들이 먼저 여성의 날을 국제적으로 기념하기 시작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더 많은 나라로 그 범위가 넓어졌다.

 

 

세계의 역사를 바꾼 러시아의 여성의 날

 

한편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이후 전시 경제 아래에서 생계의 압박을 받게 된 여성들은 전쟁에 반대하고 식료품의 품귀와 가격 앙등에 항의하는 시위를 펼치기 시작했다. 1917년 3월 8일(음력 2월 23일)에 여성의 날을 맞이하여 러시아의 페트로그라드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벌인 파업과 시위는 2월 혁명의 도화선이 되기도 하였다.

 

1921년 6월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2회 코민테른 여성 회의는 여성의 날을 기념하는 나라들이 날짜를 3월 8일로 통일하여 함께 기념할 것을 결의하였고, 이에 1922년부터는 3월 8일이란 날짜에 맞추어 여성의 날을 기념하는 관행이 국제적으로 정착되기 시작하였다.

 

 

지역을 가로질러 지구촌을 엮어낸 조각보의 상징

 

세계 여성의 날은 여성 해방 운동의 물결이 전 세계로 확산되는 1970년대에 들어와 또 다른 전기를 맞게 되었다. 유엔이 ‘세계 여성의 해’를 선포한 1975년 3월 8일에 뉴욕에서는 페미니스트들을 비롯한 수많은 여성이 현수막을 앞세우고 거리를 행진하여 이날을 기념하였다. 그리고 1977년 12월에 유엔 총회는 모든 국가가 여성의 권리와 국제적 평화를 위한 유엔의 날을 정하여 공포할 것을 권고하는 결의를 채택하여 세계 여성의 날의 확산에 기여하였다.

 

이를 계기로 유엔의 여성 인권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졌다. 유엔 총회는 1979년 12월에 ‘여성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차별 철폐에 관한 협약’을 결의하였으며, 1993년에는 ‘여성 폭력 철폐 선언’을 채택하였다. 그리하여 1995년에 베이징에서 개최된 유엔의 제4차 세계 여성 대회는 여성의 권리가 인권임을 확인하고 선언과 강령을 통해 성 주류화 전략을 공유하는 자리가 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세계 여성의 날은 애당초 열사의 죽음이나 영웅적인 투쟁과 같이 과거에 자리 잡은 어느 하나의 특정한 사진에서 유래하거나 이를 기억하거나 추념하고자 정한 날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당대의 현실 속에서 저마다 목소리를 표출하려는 여성들의 열망을 조각보처럼 엮어낸 상징에 가깝다.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예상하지 않은 돌풍을 몰고 오듯이, 무수한 여성들의 행동주의적 실천을 통해 변화를 도모해 온 선언, 연대, 축제의 현장은 한 세기를 넘어 유지되고 있는 살아 있는 역사인 것이다.

 

 

지금은 21세기, ‘빵과 장미’는 성취되었나

 

세계 여성의 날의 역사적 의미를 함축하는 인권의 상징으로 잘 알려진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빵과 장미’일 것이다. 미국 시인 제임스 오펜하임이 1911년에 발표한 ‘빵과 장미’는 당시 뉴욕, 시카고 등에서 분출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배경으로 작성된 시로 알려져 있다. “우리가 싸우는 건 빵을 위해서야. 그러나 또한 장미를 위해서도 싸우지.”란 구절은 이후 1912년 로렌스 파업의 장면을 압축하는 기억의 단서가 되기도 하고, 뒷날 노래의 가사와 영화의 제목으로 재현되는 등, 일하는 여성들의 인권 문제를 환기하는 중요한 상징으로 회자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21세기로 접어든 오늘날 지구촌 여성들의 인권, ‘빵과 장미’는 어떠할까? 세계경제포럼이 작성하여 발표한 ‘세계 성 격차 보고서’(Global Gender Gap Report)는 경제적 참여, 교육 수준, 건강과 생존, 정치적 권한 부여 등 4개 분야를 중심으로 전 세계 144개국의 성별 격차를 비교하고 분석한다.

 

최근의 보고서는 오히려 성별 격차가 확대되는 추이를 보이며, 이와 같은 퇴보를 보인다면 지구촌의 성별 격차를 줄이는 데는 170년이 아니라 217년이 걸릴 것이라는 암담한 전망을 내놓았다. 그런가 하면 최근 미국에서 시작된 ‘미투’(#MeToo)나 ‘타임스업’(#Time'sUp) 운동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다른 여러 나라로 확산되면서 피해자들의 증언이 이어지고 있다.

 

여성과 남성의 성별 임금 격차가 3분의 1을 넘어서고 외국의 미투운동에 앞서 ‘#OO_내_성폭력’의 핵심어 표시(#, 해시태그)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을 장식했던 우리나라에서는 현재 검사를 비롯한 전문직 여성들이 감내해야 했던 직장 내 성폭력과 성희롱이 사회적 쟁점이 되고 있다. 해마다 지구촌 각 나라의 세계 여성의 날 캠페인과 행사 소식을 집산하는 공식 웹 사이트는 2018년의 캠페인 주제를 ‘진보를 위한 압력’(#PressforProgress)으로 선정하였다. 이는 해당 사회의 정부를 비롯한 조직과 단체들이 여성들의 목소리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고 의지와 책임을 공유하면서 성 평등의 원칙을 더욱 힘 있게 밀고 갈 때가 되 있음을 시사한다.

 

 

‘빵과 장미’의 행진은 계속되어야 한다

 

‘빵’이 열악한 상황에서 충족되어야 할 최소한의 생존적 필요를 뜻한다면, ‘장미’는 인간의 존엄성에 부합하는 고양된 인식과 품격 있는 삶에 대한 희망의 기대 지평이다. 노동자에게 임금은 생명줄이지만, 생존을 위하여 인격의 존엄성을 침해당하고 행복을 추구하며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다면, 그것이 일하는 여성들이 원하는 여성의 해방이나 진정한 노동의 미래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고용된 일터에서의 생존권과 한 개인의 인격권의 핵심인 성의 자유를 맞바꾸도록 강제하는 것은 차별과 폭력의 시작이다. 이 점에서 ‘빵과 장미’는 분리될 수 없고 분리되지 말아야 한다. 낮은 목소리와 작은 날갯짓으로 시작되는 ‘빵과 장미’를 향한 여성들의 행진이 더욱 증폭되고 부단히 지속되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 신상숙 - 서울대학교 여성연구소 객원 연구원.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서 반성폭력 운동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고, 여성 인권, 여성 운동, 여성 정책에 관한 연구를 진행해 왔으며, 이화여자대학교를 비롯하여 여러 대학과 기관에 출강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8년 3월호, 신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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