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0일 (월)
(백)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교육 주간)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왕따 당했던 순교 복자 조용삼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3-26 ㅣ No.1459

[특별 연재] 이 시대, 순교신심에서 길을 찾다


왕따 당했던 순교 복자 조용삼



삶의 푯대를 상실한 현대인들은 인문학, 심리학, 과학의 문을 서성이며 길을 찾고 있다. 여기, 한평생 순교신심을 연구해온 손골성지 윤민구 신부는 신앙의 유산이 담긴 순교신심에서 삶의 방향키를 찾아 우리에게 들려준다. 올해는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의 시복이 이뤄진 기쁨의 해이다. 오는 8월 시복이 이뤄지는 조용삼 베드로의 생애를 조망한다.


하느님께서 사울 왕의 후임을 선택하실 때의 일이다. 사무엘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이사이의 집으로 갔는데 맏아들 엘리압을 보고 그가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으려니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에게 기름을 부으려 하였으나 하느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사무엘 상 16,7). 그리고 하느님은 다윗을 선택하셨다.

우리나라 초기교회 순교자 중에 조용삼(趙龍三, 베드로, ?-1801)이라는 분이 있다. 그는 왕따당했던 분이었다.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 1775-1801)은 자신의 백서에서 조용삼을 이렇게 소개하였다.

조용삼 베드로는 양근 사람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홀아비로 곤궁하게 지냈는데 농사를 지으면서 근근이 생활하였습니다. 그래서 조용삼 베드로의 나이가 서른에 가깝도록 관례(冠禮)도 못하고 장가도 들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몸이 부실하여 병들어 늘어지고 잔약(孱弱)하였으며, 외모도 별로 보잘 것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세상일에 어둡기까지 하여 남들이 모두 조롱하고 비웃고, 사람 축에 넣지 아니하였습니다.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오직 정 아우구스티노만이 그의 열성을 칭찬하였습니다.

후에 조용삼 순교자는 박해자들에게 “하늘에는 두 주인이 없고,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천주를 위해 한 번 죽는 것뿐이며, 다른 말씀은 드릴 것이 없습니다”라고 신앙을 고백하며 순교하였다. 그런데 이런 그의 속마음을 알리없는 사람들은 외모만 보고 조용삼 순교자를 왕따 시켰던 것이다. 오로지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 1760-1801) 순교자만이 조용삼 순교자의 진가를 알고 그를 받아주고 교리를 가르쳐 차츰 신앙의 길로 인도해 나갔다.

천주교 교리를 배우기 시작한 후 조용삼 순교자는 부친과 함께 신자들과 어울려 지냈다. 그러면서 교리를 더 배웠으나 미처 세례성사를 받기 전에 그만 박해가 일어나고 말았다. 경신년(1800) 4월에 아버지와 함께 여주에 있는 이중배(李中培, 마르티노, 1752-1801) 순교자의 마을에 갔다가 이중배 순교자와 함께 붙들렸던 것이다. 이때의 상황을 황사영 백서에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경신년 부활절에 개를 잡고 술을 빚어 가지고, 한 동리 교우들과 함께 산골 작은 길가에 모여 앉아서 큰소리로 희락경을(부활삼종기도) 외우고, 바가지와 술통을 두드려 장단을 맞추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노래가 끝나면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고 나서는 다시 노래를 부르고, 이렇게 해가 다 저물도록 계속하였습니다. 얼마 뒤에 원수처럼 지내는 가문의 고발로 이중배는 교우 열한 사람과 함께 체포되어 관청으로 끌려갔습니다. 교우 중에는 마음이 약한 사람도 있었지마는, 모두 이중배 마르띠노의 격려하고 권면하는 힘에 의지하여, 여러 번 지독한 형벌을 겪으면서도 한결같이 굳게 버티어, 결국은 석방되지 못하고 갇혀 있게 되었습니다.

교우들이 모여 부활축제를 벌인 곳은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2리 ‘점들’이다. 이곳에는 임희영(任喜永, ?-1801) 순교자도 살고 있었다. 조용삼 순교자에 대해 황사영 백서에서는 계속해서 이렇게 전하고 있다.

관청에 끌려가서 조용삼 베드로가 굴복하지 아니하자 관리가 노하여 말하기를 “네가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네 아버지를 당장에 때려죽이겠다” 하고 그의 아버지를 끌어내다가 그가 보는 앞에서 혹독한 매질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조용삼 베드로는 하는 수 없이 배교한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석방되어 옥문을 나오면서 이중배 마르띠노 등 여러 교우들에게서 깨우치고 권면하는 말을 듣고는 조용삼 베드로는 다시 마음을 돌이켜 죄를 참회하고 다시 들어가 관리에게 성교회(聖敎會)를 믿는다고 분명히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관리가 크게 노하여 다시 가두고 석방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매번 심문을 당할 때마다 다른 사람들은 의례적인 매를 맞았지마는 오직 조용삼 베드로만은 특별히 가장 많이, 가장 혹독하게 매를 맞았습니다. 그것은 그 고을 사또가 그 외모를 보고 마음으로 몹시 업신여겨 이러한 자는 쉽사리 항복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는데 뜻밖에도 오히려 그 신앙이 몹시 굳고 단단하므로 미움이 특히 심하여 기어코 죽이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외모 때문에 조용삼 순교자는 옥에 갇혀서도 불이익을 당하였던 것이다. 그러던 가운데 조용삼은 마침내 옥중에서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되었다. 이후 그의 착한 행동과 아름다운 말은 여러 신자들을 감동시켰다. 이렇게 약 11개월을 옥에 갇혀있던 그는 1801년 2월에 다시 경기도 감사 앞에 끌려나가 배교를 강요당하며 무자비한 형벌을 받게 되었다. 조용삼은 약해질 대로 약해진 몸을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3월 27일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옥사(獄死)로 순교한 것이다.

앞에서 신자들이 부활축제를 지낸 곳이 ‘점들’이라고 하였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사실 이중배 순교자가 살던 곳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런데 위에서 본대로 황사영이 쓴 백서를 보면 조용삼 순교자는 이중배 순교자의 마을에 갔다가 이중배 순교자와 함께 체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샤를르 달레(Ch. Dallet)가 쓴 “한국천주교회사”를 보면 조용삼 순교자가 임희영 순교자의 집에 살다가 임희영 순교자가 체포될 때 함께 체포되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실제로 이중배 순교자와 임희영 순교자는 함께 옥살이를 하다가 같은 날 순교하였다. 그렇다면 혹시 이중배 순교자와 임희영 순교자가 같은 마을에 살았던 것은 아닌가 추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추정이 사실이라면 이중배 순교자는 임희영 순교자가 살았던 여주군 금사면 금사2리 ‘점들’에 살았을 것이다.

‘점들’은 윤유일(尹有一, 바오로, 1760-1795) 순교자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윤유일 순교자의 삼촌 윤선(尹?, 안드레아, ?-1801) 순교자나 사촌 윤운혜(尹雲惠, 마르타, ?-1801) 순교자와 윤점혜(尹點惠, 아가다, ?-1801) 순교자가 살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점들’은 초기 우리나라 교회와 깊은 관계가 있던 곳이다. 그래서 이 기회에 ‘점들’에 대해 짚고 갈 것이 있다.

필자는 ‘점들’에 대해 연구를 하였다. 그리고 우리 교회사에서 이야기하는 ‘점들’은 ‘여주군 금사면 금사2리’라는 결론을 내고 글을 통해 알렸다. 그래서 지금은 많은 이들이 필자의 의견에 따라 ‘점들’의 위치를 말하고 있지만 전에는 ‘여주군 점동면 당진리’라고 생각했었다. 여주에는 ‘점들’이라는 지명이 두 곳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혼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어 다시 언급하는 것이다.

《경향잡지》의 전신인 《보감(寶鑑)》에서는 ‘점동면의 점들’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점동면 당진리의 점들’은 마을 이름이 아니고 들의 이름이다. 한글학회에서 펴낸 한국지명총람에서는 ‘점동면 당진리의 점들’을 가리켜 ‘점말 앞에 있는 들’이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같은 책에서 ‘금사면 금사2리의 점들’은 ‘금사 서쪽에 있는 마을, 옹기점이 있었음’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것은 필자가 현장답사를 통해서도 확인하였다.

따라서 조용삼 순교자나 이중배 순교자가 체포된 곳 그리고 윤유일 순교자 등이 살던 곳의 현재 지명은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2리’이다.

* 윤민구 도미니코 신부 - 1975년 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탈리아 로마에 유학하여 1983년 라떼란대학교에서 사목신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2003년까지 수원가톨릭대학교에서 강의하였다.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사무차장으로 일하였고 안성 대천동, 성남 수진동, 이천, 분당 야탑동성당 주임신부를 지낸 후 현재 손골성지 전담신부를 맡고 있다.

[외침, 2014년 8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윤민구 도미니코 신부]



1,900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